느림보 창작 수필/원초적 행복(맛)

죽粥

느림보 이방주 2023. 7. 9. 12:34

죽(粥)

 

아내가 저녁으로 콩나물죽을 끓였다. 오랜만이다. 목감기로 고생하는 남편에 대한 배려이다. 한술 떠 보았다. 된장을 덜 풀고 고춧가루를 조금 더 넣었으면 칼칼한 맛이 더 진했을 것 같다. 그래도 콩나물이 많이 들어가서 구수했다. 뜨거운 죽을 한 숟가락 가득 떠서 후후 불어 입에 넣어 보았다. 깔깔했던 목이 확 뚫리는 기분이다. 식도를 타고 뜨겁게 흘러내리면서 니글니글한 기름기까지 개운하게 씻어 내려가는 듯하다. 잃어버린 입맛에는 콩나물죽이 약이구나. 죽은 치유이다.

구수하고 개운한 콩나물 맛으로 먹으면서도 죽사발을 휘저으면서 쌀알을 찾는다. 잠재된 습관이 이토록 오래 간다. 죽도 보릿고개도 참 지겨웠다. 조반석죽(朝飯夕粥)도 호화롭게 생각되던 시절이다. 아침에는 밥을 먹고 점심은 거르고 저녁은 으레 죽으로 에끼는 살림살이는 온 동네가 다 마찬가지였다. 점심때부터 기다린 저녁을 죽 한 대접으로 때우고 나면 바로 배가 고팠다. 밤중에 날고구마를 깎아 먹으면 생목이 오르고, 무를 깎아 먹으면 방귀가 수없이 나오고 금방 배가 고팠다. 그래도 콩나물죽은 고급이다. 콩나물죽은 때깔부터 달랐다. 굳이 쌀 알갱이를 찾지 않아도 되었다.

콩나물죽 말고 무죽도 골을 부리지 않고 먹은 것 같다. 양은솥에 들기름을 두르고 무를 칼치기로 삐져 넣어 달달 볶은 다음 쌀을 조금 넣고 끓여낸 것이 무죽이다. 무가 반 쌀이 반이었다. 쌀이 부족할 때는 여기에 수제비를 떠 넣었다. 죽사발을 휘휘 저으며 수제비 보물을 건져낸다. 쌀 알갱이보다 수제비가 더 흐뭇했다. 아버지는 고춧가루를 잔뜩 풀어 ‘아하 아하’하면서 맛을 과장하셨다. 지금 생각하니 할머니께 저녁마다 죽을 드리는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짐작이 간다.

1960년대 초, 두 차례의 정변이 있은 후 집안은 더 어려워져서 콩나물죽이나 무죽도 쉽지 않았다. 그때 먹은 것이 시래기죽이나 아욱죽이다. 아욱죽은 여린 아욱을 뜯어 손으로 박박 문질러서 숨을 죽인 다음 된장을 풀어 쌀과 함께 끓여낸다. 된장냄새 속에 내게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아욱냄새가 얹혀있어 숟가락을 들기도 싫었다. 색깔조차 거무튀튀하다. 아욱 대궁은 먹을 때마다 미끄덩거렸다. 때로 남은 씨감자 껍질을 벗겨 썩은 부분을 도려내고 도막 쳐서 넣었는데 감자만 골라먹기도 했다. 아릿한 맛이 남아 있어서 수제비만은 못해도 미끄덩거리는 아욱 줄기보다는 나았다. 이렇게 지겨운 아욱죽을 콩나물죽이나 무죽보다 더 자주 먹은 것 같다. 시래기죽도 마찬가지이다.

콩나물죽, 무죽, 아욱죽, 시래기죽보다 최악인 것은 밀기울 죽이다. 이름 그대로 짐승에게나 먹이는 밀기울로 죽을 쑤어 사람이 먹는 것이다. 우리집은 그래도 형편이 나아서 밀기울 죽을 자주 먹지는 않았으나 마을에는 그것만으로 끼니를 에끼는 집도 많았다. 죽으로 크면서 골을 부렸지만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일로 생각하였다. 좌절하지 않고 기죽지도 않고 공부를 놓지도 않았다. 막막하지만 죽을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날을 기다리기도 했다. 할머니는 공부를 열심히 하면 쌀밥을 먹을 수 있다고 등을 두들겨 주었지만 그냥 할머니 말씀으로 들었다.

여름방학 때 고모 집에 놀러 갔는데 점심에도 하얀 쌀밥을 먹었다. 호박전이나 호박새우젓국을 반찬으로 쌀밥을 먹을 때 그 부드러운 맛을 잊을 수가 없다. 고모부가 ‘밥을 뜨라’ 하고는 숯불에 구운 고등어자반 한 점을 밥에 올려주셨다. 외갓집에 가도 역시 하얀 쌀밥을 먹었다. 외삼촌이 딴 상에서 드시고 내가 외할아버지랑 겸상으로 먹었는데 밥을 뜨면 할아버지가 조기젓 한 젓가락을 밥 위에 얹어주셨다. 그때 참 궁금한 것은 고모네나 외갓집은 어떻게 여름에도 쌀밥을 먹을 수 있을까하는 것이었다. 외삼촌은 궁금한 나를 토광으로 데려가셨다. 커다란 토광에는 우케가 하나 가득 들어 있었다. 삼촌은 네가 공부를 열심히 하면 쌀밥을 먹을 수 있다고 할머니 같은 말씀을 하셨다. 나는 막연한 꿈을 가지면서도 엄마가 불쌍했다. 그냥 외갓집에서 살았으면 식구들 밥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따님인 엄마가 얼마나 안쓰러웠을까.

기를 쓰고 공부를 한 것도 아닌데 열대여섯 살쯤 되었을 때는 죽을 먹거나 점심을 굶지 않아도 되었다. 그건 온 마을이 마찬가지였다. 1970년대로 들어서니까 여름에도 쌀밥을 먹게 되었다. 쌀밥이 절실하게 그리운 누군가 열심히 일을 한 덕이었을 것이다. 자신뿐 아니라 온 나라 사람살이를 고심했을 그 분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진 것이다.

인제 죽은 구황이 아니라 치유로 먹는다. 아직도 먹기 싫은 아욱죽은 안 먹어도 된다. 콩나물죽을 먹고 싶으면 콩나물죽을 먹고, 무죽에 수제비를 넣어 먹고 싶으면 그리 하면 된다. 거리에는 죽 전문점도 생겼다. 아침에 쌀을 불려 들깨죽을 쑤어 먹으면 속이 편안하고 마음까지 개운해진다. 저녁에 죽을 먹으면 속이 편하고 아침이 가뿐하다. 몸이 가벼우면 마음까지 가벼워진다. 죽은 영혼까지 치유하는 고급 음식이 되었다. 죽은 이제 배고픔을 해결하는 요기(療飢)의 음식이 아니다. 몸과 마음이 가뿐해지는 치유(治癒)의 음식이 되었다.

콩나물죽을 맛나게 먹고 나니 죽이 없는 세상으로 건너가신 어머니, 할머니가 그립다.

(2023.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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