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원초적 행복(맛)

풍경소리

느림보 이방주 2016. 5. 21. 14:42

풍경소리


 

풍경소리에는 풍경은 없었다. 풍경은 없어도 어디선가 그윽한 풍경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 풍경 소리는 풍경이 있어야만 들리는 것은 아니구나. 풍경 없이도 소리가 들려야 참된 풍경 소리로구나.

굽이굽이 보련산보탑사 가는 산길을 오르노라면 풍경소리라는 작은 밥집이 있다. 낡은 통나무집에 황토를 바른 것도 좋고, 통나무집을 둘러싸고 있는 녹음이나 화사한 듯 다소곳이 피는 꽃도 좋다. 발코니 낡은 의자에 앉아 계곡 어스름에 차갑게 내려앉은 달빛을 받으며 오랜 정인情人과 해후의 홍차를 마시면 딱 좋을 것 같은 분위기이다. 고요한 마음으로 앉았노라면 한 마장쯤 되는 보탑사에서 계수溪水를 타고 동동 떠내려와 연곡지에 떼 지어 몰려다니던 풍경 소리가 한 마리씩 두 마리씩 튀어 오를 것만 같다. 그때마다 밥집 풍경소리에 앉아 있는 우리도 마음속의 작은 종이 뎅그렁뎅그렁 울릴 것만 같다.


이름이 아름다운 밥집 풍경소리를 언제 가보나. 보탑사 비구니스님들이 독경하듯 피워낸 꽃을 보러 드나들면서 작은 주차장에 차를 대는 내디딤은 없었다. 그런데 그 풍경소리에 간단다. ‘풍경소리에서 사십년 전 정인을 만나 민물새우찌개를 안주로 술밥을 먹는다고 한다. 약속을 정하고 기다리는 2,3일은 이순耳順의 가슴도 설레었다.


아파트 앞에서 친구 철이를 만났다. 선배 두 분을 모시고 왔다. 사십여 년 전 백양사에서 내장산으로 넘어가는 금선계곡에서 5인용 텐트 하나로 밤을 함께 보냈던 같은 대학 여자 선배님이다. 늦가을 밤 선배들이 행여 얼기라도 할까봐 마른나무를 주워 모닥불을 피우고, 다섯 여자는 텐트 안에서, 다섯 남자는 밖에서 밤을 새웠다. 내장산행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같은 대학 1년 선배일 뿐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정의로운 지킴이였다. 그 후로 선배들이 졸업할 때까지 우리를 친동생처럼 챙기고, 우리는 그녀들을 친누나처럼 의지했다. 점심시간이면 구내식당으로 배고픈 우리를 불러냈다. 하나같이 모범생이었던 선배들은 다섯 노라리의 알뜰한 멘토mentor가 되어주었다.


선배들이 졸업 후 바로 선생님이 되는 바람에 잊고 지냈다. 남녀관계로 만난 것이 아니고 착한 선배와 허랑하기 짝이 없는 후배들로 만났기 때문에 쉽게 잊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젊은 시절을 그리워할 나이가 되어서야 선배들은 노라리 후배들을 기억해 내고, 노라리 후배들은 알뜰한 선배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알뜰한 선배 중에 한 사람인 길이누나가 은퇴 후에 내가 선망하던 풍경소리를 운영하며 한가롭게 지낸다니 기막힌 우연이 또 있었을 법한 일이다.


나는 친구 철이와 명이’, ‘영이두 선배를 모시고 보탑사 꽃구경을 하며 길이 누나와 만날 시간을 기다렸다. 꽃이 아름다운 것을 보면 스님들의 자비를 보는 듯하고, 절집의 모든 당우들이 깔끔한 것을 보면 스님들의 수행을 짐작할 수 있다. 보련산 꽃술 같은 보탑에는 층마다 부연 끝에 풍경이 매달렸다. 연꽃송이 꽃잎 같은 산봉우리로 넘어가는 석양에 울려 뎅그렁뎅그렁 염불을 왼다. 풍경에는 잉어인지 붕어인지 매달려 한 순간도 눈을 감지 않고 정진한다. 저 멀리 바다에서 강으로 강에서 실개천을 타고 이곳 보련산까지 올라오느라 비늘도 살도 다 내려 말라빠진 잉어라야 청아한 소리를 낸다. 내려놓을 것은 다 내려놓고 가벼워질 대로 가벼워진 몸이라야 실바람에도 소리를 낸다.


풍경소리에서 길이 누나를 만났다. 예쁘던 옛 얼굴에 주름이 갔다. 화장기 하나 없어도 주름진 60대 길이 누나가 더 아름다웠다. 길이 누나는 내 손을 잡고 감격해 했다. 다섯은 빠지고 우리만의 다섯이 한자리에 앉았다. 바깥선생님께서 민물새우찌개와 동동주를 내왔다. 나는 동동주를 마시기 전에 새우찌개를 한 숟가락 맛보았다. 깔끔하다. 고소하고 시원하다. 텁텁하거나 기름지지 않아서 좋다. 길이 누나는 이것저것 넣지 않아야 제맛 내는 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동동주를 한 탕기씩 받았다. 길이 누나는 취하지도 않았는데 예전처럼 내게 말을 놓았다. 평소 반말을 싫어하던 나도 웬일인지 군살 뺀 반말이 더 정겨웠다. 민물새우찌개 덕인지 풍경 소리 덕인지 따질 필요야 있으랴.


술이 몇 순배 돌고 나도 지나치게 취했다. 그때 어디선가 풍경 소리가 들렸다. 뺄 것 다 빼고 버릴 건 다 버린 민물새우찌개가 풍경을 울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마음으로 듣는 풍경 소리는 격식도 차림도 다 버린 길이 누나의 순정한 우애라고 생각되었다. 환청이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우리를 만난 길이 누나의 마음의 울림이려니 했다. 모두의 마음이 풍경이 되고 울림이 되어 산 아래에서 산문을 열고 보탑을 향하여 차오르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향기로운 술에 취했다 깨었다 하는 동안 밤은 점점 깊어만 간다. 바람도 멎었는데 그칠 줄 모르는 풍경소리는 더욱 청아한 소리로 울어댄다


   (에세이포레 기획연재 2016.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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