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빔밥
이방주
부처님 오신 날 법요식이 끝나면 비빔밥으로 공양한다. 이것은 제사를 마치고 제사음식을 이것저것 받아먹는 신인공식神人共食이라는 의미의 음복례飮福禮에서 연유된 것이 아닌가 한다. 불교 의식의 재에서도 그렇고 유가의 기제사뿐만 아니라 산신제나 동제가 끝난 다음에서 신인공식은 거의가 비빔밥이다. 최근에 안동에 가면 헛제삿밥을 먹을 수 있는데 이것도 신인공식은 아니라도 함께 먹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러니 비빔밥을 먹는 의미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화합과 조화의 가치에 있다는 것이 오늘날의 ‘비빔밥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비빔밥의 핵심은 화이부동이다.
스승의 날을 즈음하여 문우들이 일우 선생의 옥탑방에 모여서 비빔밥을 먹기로 했단다. 수필창작교실 문우인 일우一又 선생은 옥상에 각종 채소농사를 짓는다. 나는 서둘러 일우의 명원빌 옥상으로 올라갔다. 마지막 계단을 오를 때 다리가 약간 후들거렸지만 이만한 것도 못 견디랴.
옥상 황토방에는 이미 문우들이 모여 있었다. 분명 부지런한 몇 분은 미리 와서 일우를 도왔을 것이다. 함께 준비하며 얼마나 ‘하하 호호’ 웃었을까 생각하니 나까지 즐겁다. 당신네 선생의 흉을 보면서 즐거워하지 않았다는 보장도 없다. 슬쩍 흘겨보니 상차림이 예사롭지 않다. 옥상 채소밭으로 눈길을 돌리는 척하니까 황토방에서 주인이 나와 맞는다. 일우 선생이 문우들을 대표하여 카네이션 한 송이를 주머니에 꽂아준다. 당연지사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나는 민망하다. 스승은 무슨 스승, 그분들은 다 그냥 나의 문우일 뿐이다.
비빔밥상은 푸짐하다. 앞앞이 커다란 양푼이 하나씩 놓여 있다. 빨강색 바구니에 들깻잎 순, 돌나물, 어린 상추, 쑥갓, 어린 열무, 여린 돌미나리 같은 푸른 채소가 깔밋하다. 콩나물무침, 무생채나물, 취나물무침, 돌미나리무침, 고구마순볶음은 각각 제 맛에 어울리는 그릇에 담겨 있다. 윤이 반짝반짝 흐르는 고추장도 탕기에 가득하다. 부추부침개도 양념간장과 동행하였다. 후식으로 먹을 수박이나 오렌지는 색깔조차 조화롭다. 보리쌀을 2할쯤 섞은 밥은 모듬 양푼에 주걱과 함께 놓여 있다. 모든 상차림이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그릇마다 깔깔거리는 중년 여인들의 웃음이 쏟아질 것만 같다. 주인장 일우의 마음이고 문우들의 정성이다. 각각 다르지만 함께하는 아름다운 삶의 윤기이다.
갑자기 의식이 시작되었다. 강흥구 수필가께서 김영란법에도 훨씬 넘어서는 봉투를 바구니에 담아 준다. 그래도 그분들이 나를 알고 비빔밥만큼 간을 맞추었을 것이 틀림없기에 거리낌 없다. “스승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하는 민망한 꽃말이 담긴 꽃바구니는 전통차를 연구하는 심향당박사가 전한다. 꽃바구니가 나를 더욱 부끄럽게 한다. 주는 분이나 박수치는 분이나 받는 사람이나 모두 기분 좋다. 다 조금씩 다르지만 이때만은 한마음일 거라 믿는다. 우리는 서로 기쁜 말을 골라 하며 한참 서서 웃었다. 오늘은 다른 때처럼 엄숙하게 의미를 말하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말을 않아도 그냥 다 알 것으로 믿는다.
주인이 된장찌개를 올려 보내는 것은 작업 시작 명령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듯이 양푼에 생나물을 고르게 담고 그 위에 밥을 먹을 만큼 얹었다. 이래야 숨이 죽는다. 그 위에 콩나물 무침, 돌미나리무침, 취나물무침을 얹고 반짝반짝 윤기 흐르는 고추장을 새색시 이마에 연지를 찍듯 발랐다. 누군가 참기름을 병째 가지고 다니며 고추장 위에 화룡점정을 했다. 이제 시작이다 했더니 계란 프라이까지 올라온다. 양푼이 화려하다. 애호박을 듬성듬성 썰어 넣고 달달한 대파로 마무리한 된장찌개를 몇 숟가락 넣어야 잘 비벼지는 것은 배달겨레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젓가락으로 비벼야 밥알도 나물도 상처를 입지 않는다. 작은 돌나물 이파리 하나라도 생채기가 나면 화이부동도 상처를 받는다. 밥을 비비는 시간은 결코 긴 시간은 아니건만 기다리는 시간이 어찌 이토록 길게 느껴질까. 숨이 막힐 듯 조용하다. 짧은 정적은 손이 잰 누군가의 탄성이 끝을 낸다. ‘캬 이 맛이야.’ 그렇다. 나도 맘이 바쁘다. 한 숟가락 고봉으로 퍼 담아 입으로 가져간다. 일우의 맛이고 문우들의 맛이고 겨레의 맛이다. 온 산천 산야의 향기로움이 양푼 하나에 다 들어와 있다. 비빔밥 양푼에는 하늘도 태양도 바람도 보슬비도 들어와 어우러졌다. 온 우주가 하나가 되었다. 게다가 주인 일우 선생의 웃음소리도, 문우들의 눈길도 손길도 하나하나 빠짐없이 데치고 버무려졌다. 비빔밥은 어우러지고 버무려진 화이부동의 손맛이다. 한 술 밥이 곧 우리의 우주이다.
입이 바쁘다. 한 입으로 밥도 먹어야 하고 탄성도 질러야 한다. 저마다의 감상이 쏟아져 나온다. 조선 후기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에 ‘음식 먹을 때 다섯 가지를 보라. 첫째 힘듦의 다소를 헤아리고, 저것이 어디서 왔는지를 생각하여 보라. 이 음식은 갈고 심고 거두고 찧고 까불고 지진 후의 공이 많이 든 것이다. 하물며 산 짐승을 잡고 베어내어 맛있게 하려니 한 사람이 먹는 것이 열 사람이 애쓴 것이다.’라고 했다. 고금도서를 막론하고 맞는 말이다. 모두의 사랑과 존경의 마음이 상큼한 돌나물이 되고 향기로운 미나리나물이 되어 한 양푼에 들어가 비벼진 것이리라.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버무려진 마음을 먹는 것이다.
누군가 우리도 이제 그냥 만나지만 말고 문학회 하나를 결성해야 영원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순간 바쁘던 숟가락이 딱 멈춘다. 그래 그런 생각이 드디어 말이 되어 나오는구나. 수박으로 입을 가시고 오렌지로 입안에 향을 바를 때쯤에 향기로운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불쑥 제안은 일사천리로 현실이 되어간다. 나는 속으로 반가우면서도 지켜보기만 했다. 정말 비빔밥의 위력은 대단하구나. 이분들이 밥만 비빈 것이 아니라 정말로 맘까지 비볐구나.
식사가 끝나고 차를 마실 때쯤 씨앗은 이미 푸른 떡잎이 드러났다. 각각의 양푼에 밥을 비볐으면서도 모두의 마음을 담아 비볐나 보다. 화이부동을 이루는 비빔밥 위력이다. 이제 어떤 일이건 비빔밥을 먹고 해결할 일이다.
몇몇은 남아 설거지를 돕고 남자 회원들이 일어섰다. 골목을 돌아 나오는 차들이 경쾌하다. 우리는 비빔밥을 먹은 사람들이다. 아니 마음까지 비벼 먹은 사람들이다. 화이부동을 아는 사람들이다.
(2018. 5.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