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

강아지풀꽃에서

느림보 이방주 2018. 7. 22. 17:14

강아지풀꽃에서

 

2018721

주중리에서

 

참 오랜만에 주중리에 갔다. 3주간 자전거를 탈 수 없을 만큼 몸이 부실했다. 마을엔 새벽안개가 흐릿하다. 방천둑을 따라 천천히 페달을 밟는다. 시멘트로 포장한 농로에는 농민들이 논에서 뽑아 던진 잡초가 말라 널브러져 있다. 농로 주변에는 제초제를 썼는지 풀이 말라 죽기도 하고 아예 맨땅인 곳도 있다. 농작물은 싱싱하고 논두렁 밭두렁은 황량하다

마을 앞들을 두 바퀴 돌았다. 마을은 그대로다. 이른 새벽에 텃밭에서 풀을 매는 노인들 몇 분을 볼 수 있다. 작년에 나왔던 이들이 올해도 다 나와 풀을 매고 있을까. 이 풍성한 들판에서 왜 자꾸 황량한 생각이 앞서는지 모르겠다. 가뭄에도 앞 시내에 깨끗한 물이 흥건하게 흐르고 수로에는 가득 흐르는 물이 있어 황량한 느낌을 덜어주기는 한다.

 벼는 한 자가 넘게 자라서 벌써 아랫도리가 통통해졌다. 도라지꽃은 피었다 지느라 보랏빛이 퇴색되어간다. 새뜻한 보랏빛 꽃이 보고 싶었는데 장마 끝에 오는 가뭄 때문인지 영양부족 때문인지 시들하다.  

오늘 눈에 띄는 풀꽃은 강아지풀 꽃이다. 일손이 달려 이태 째 묵논이 되어버린 고래실에 강아지풀이 가득하다. 한 배미가 서너 마지기는 족히 될 듯하다. 수로에서도 가깝고 개천에서도 가까운데다 네모반듯한 고래실이 왜 묵었을까. 일손이 부족한 까닭도 있을 테고 어느 돈 많은 도시인이 농지를 사서 묵히는 것일 수도 있다. 크고 작은 강아지풀이 절로 자라 가득하니 그것도 잠시 보기 좋다.

자전거를 세우고 앉아서 들여다보았다. 볼수록 재미있다. 강아지풀꽃을 뽑아서 꽃대를 반으로 가르면 정확하게 반으로 갈라진다. 끄트머리까지 다 가르지 않고 중간쯤에서 멈추어 코밑에 붙이면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다. 보기 좋은 카이저kaiser 수염이 만들어진 것이다. 아이들은 서로 자기 수염이 멋지다며 깔깔대다 보면 해가 서산에 기울었다.

강아지꼬랑지처럼 보드라운 꽃을 손안에 넣고 엄지와 검지로 가느다란 꽃대를 살며시 당기면 통째로 뽑힌다. 말랑말랑한 꽃대를 쥐고 풀꽃을 세우면 강아지꼬리 같은 꽃이 하늘하늘 흔들린다. 뒷짐을 쥔 손에 강아지풀꽃 한 송이를 감추고 공기놀이하는 여자 애들의 하얗고 예쁜 목덜미를 살짝 스쳐 간질이면 기겁을 하며 비명을 지른다. 버러지라도 기어가는 줄 알았겠지자기가 좋아하는 남자애인 걸 확인하면 더 소리를 지르고 울고불고 난리를 친다. 그래서 강아지풀꽃의 꽃말이 동심이고 노여움인지 모를 일이다.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그건 그냥 어린 시절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 나는 강아지풀꽃이 조 이삭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놈을 눈을 가늘게 뜨고 조금만 가까이 보면 굵직한 조 이삭으로 보였다. 잘 익으면 보드라운 털 밑에 박힌 알갱이가 좁쌀만해진다. 길가에 널브러진 강아지풀이 다 조 이삭이면 어머니가 양식 걱정을 덜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요즘 알아보니 강아지풀꽃의 익은 씨앗이 예전에는 구황식품으로 쓰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강아지풀꽃 열매를 양식으로 삼아 먹는 것은 보지 못했다. 또 요즘에는 건강식품으로 쌀에 섞어 먹으면 밥맛이 좋다고도 하는데 섞어먹는 사람을 보지도 못했고 맛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오랫동안 쪼그리고 앉아 있으니 무릎이 아프다. 무릎이 아픈 만큼 마음도 아프다. 고래실이 묵논이 되어가도 아무렇지도 않은 만큼 쌀이 대접받지 못하는 현실이 말이다. 고래실에 강아지풀만 가득한데도 쯧쯧혀를 차며 걱정하는 농민도 없는 현실이 말이다. 쌀이 대접받지 못한다는 건 농민이 대접받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농자가 천하의 근본이란 말은 영혼 없는 위로의 말씀이 되어 버렸다. 날마다 땀과 흙을 뒤집어쓰고 사는 농투사니의 아픔이다. 결국은 나의 아픔이고 우리 모두의 아픔이 될 것이다. 농민이 숫자가 줄어들고 사람들이 농사기술을 잊어버리는 날, 그래서 식량이 무기가 되는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

마을 앞 운동기구에 매달려 있는 중년 아낙에게 말을 거느라 마을 이름을 물었다. "밭데"라고 한다. 밭이 있어서 그런 말이 붙었는지 그가 잘 모르는 것인지 마을 이름이 믿어지지 않았다. 내겐 주중리만큼 어감이 정겹지는 않다. 그녀는 시내에서 살다 몇 해 전 이사했다는 사실을 내세웠다. 그리고 묻지도 않았는데 중세 영주의 성채 같은 저택을 가리킨다. 애초에 밭데의 촌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듯했다. 그의 말에 이미 농민을 눈 아래로 보는 어조가 묻어 있다. 하긴 그가 가리킨 저택은 농가가 모여있는 마을 저 위에 있다.

주중리에 사는 사람 숫자는 늘어나도, 마을 사람은 줄어들고 있는 현실이 아이러니이다. 주중리가 주중동으로 발전되는 바람에 논에 볏모를 꽂을 사람은 줄어들고 있다. 참으로 묘한 발전으로 오히려 묵논에는 강아지풀꽃만 무더기로 피어난다.

돌아오는 길 부실했던 등줄기에 땀이 흥건하다. 아침이 황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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