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

동백꽃 사랑

느림보 이방주 2018. 3. 8. 15:06

동백꽃 사랑

 

2018120

남원 큰엉 해안경승지에서

   

누구보다 그대를 사랑한다.’

동백冬栢의 꽃말이다. 제주 여행 다섯째 날에 남원 동백나무군락지에 갔다. 육지는 한겨울인데 높이 15m쯤 되는 동백나무마다 붉은 꽃이 소복하다. 짙은 초록빛 잎사귀를 뒤덮은 붉은 빛깔이 경이롭다. 동백은 두 번 핀다고 하더니 나무도 붉고 낙화가 널브러진 땅도 붉다. 동백은 땅에 떨어져 누워도 처음 피었을 때만큼 붉다. 꽃술이 샛노랗게 살아있어 꽃잎은 더 빨갛다. 맞아, 누구보다 그대를 사랑하는 순정은 생사를 넘어서 붉은빛으로 타오르게 마련이다.

여수 오동도 동백꽃도 마찬가지이다. 오동도에 전하는 동백꽃으로 피어난 여인의 순정이라는 전설은 누구보다 그대를 사랑하는절개를 명명백백하게 들려준다.

 

(앞부분 생략)

오동도에는 아리따운 한 여인과 어부가 살았드래

어느 날 도적떼에 쫓기던 여인

낭벼랑 창파에 몸을 던졌드래

바다에서 돌아온 지아비

소리소리 슬피 울며

오동도 기슭에 무덤을 지었드래

북풍한설 내리치는 그해 겨울부터

하얀 눈이 쌓인 무덤가에는

여인의 붉은 순정 동백꽃으로 피어나고

그 푸른 정절 시누대로 돋았드래

 

<오동도와 전설>비문에서

 

아리따운 여인은 죽었지만 순정은 동백꽃으로 붉게 소생했다. 지어미를 그리워하는 지아비의 정절은 시누대로 살아나 서슬이 퍼렇다. 동백꽃이 피는 서천 마량리, 울산 목도目島 동백나무 숲, 강진 백련사, 고창 삼인리 동백 숲, 부산 동백섬에도 조금씩 변개되기는 했지만 화소話素는 같은 전설이 있다. 일본이나 대만의 동백꽃 군락지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전한다고 하니, 사람들의 사랑에 대한 심의는 동서고금이나 민족을 초월하여 다름이 없나 보다.


인간의 공동심의가 지어내어 전해오는 전설은 허황된 이야기라고 치부해버리기에는 시사해주는 의미가 너무 크다. 오동도 동백꽃 전설 주인공인 아리따운 여인은 누구보다 그대만을 사랑하기 위해 낭벼랑 창파에 몸을 던진다. 그녀는 정절이 목숨보다 소중했다. 지아비는 아리따운 아내에게 또한 누구보다 그대만을 사랑하기때문에 그리움과 지조를 버릴 수 없었다. 여인의 순정이 동백꽃으로 피어났다면 지아비의 지조는 시누대로 돋았다.


도대체 정절이 무엇이기에 목숨보다 소중할까. 정절은 마음에 따라가는 몸이기에 소중한가 보다. 도적은 아리따운 여인만이 가진 것을 노렸을 것이다. 도적의 눈에는 여인이 성의 노리개로 보인 것이다. 사랑도 없이 폭력만으로 성을 노렸기에 도적이다. 맞다. 그건 틀림없는 도적이다. 오늘날에도 사랑도 없이 성을 소유하려는 자는 도적이다.

마광수 교수는 저서 성애론에서 성이 없는 사랑은 자칫 공허한 개념이 되기 쉽다라고 했지만, 나는 오히려 사랑 없는 성이야말로 공허한 행위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지구상의 모든 동물들 가운데 서로 마주 보면서 그야말로 성애를 할 수 있는 생명은 인류밖에 없다고 한다.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의 표정에서 자신만을 향한 사랑을 감지하면서 육체의 기쁨보다 영혼의 오르가슴에 드는 유일한 종이라 생각해 왔다. 그래서 인간의 성을 성애性愛라 하는 것이다.


인도 여행에서 유네스코 세계인류문화유산인 카주라호의 사원군에 들렀을 때, 힌두 사원에 조각한 성애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 비스바나타Vishvanatha 사원 벽면은 수많은 성애의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벽면을 빽빽하게 채운 조각을 미투나상Mithuna이라 하는데, 힌두교 경전의 하나인 카마슈트라Kama Sutra의 내용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카마슈트라는 성생활의 천고 불변하는 조화의 법칙을 담아놓은 경전의 하나이다. 당시에는 남녀의 성적 화합은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의 본질을 이루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성인聖人이나 성직자는 성교 기술을 적극 계몽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미투나상은 성애의 갖가지 체위를 적나라하게 표현했는데, 어떤 것은 마주보며 희열에 젖어 있기도 하고, 짐승처럼 뒤에 서서 행위를 하는 것도 있고, 심지어 수간獸姦하는 모습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짐승 흉내를 내고 있는 조각상 중에서 엉덩이를 뒤로하고 허리를 굽히고 있는 여인은 매우 괴로워하는 표정으로 보였다. 이런 행위가 종교적으로 완전한 해탈에 이르려는 것이든, 내면의 사념을 버리려는 것이든, 종교적 가르침을 표현한 성스러운 종교적 행위로 힌두인들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성스러운 종교적 행위라도 그대만을 향한사랑이 결여된 성은 폭력이다.


인도 암베르성에 갔을 때 참 희한한 광경을 목격했다. 저녁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이었는데 성채 지붕 위에서 원숭이 두 마리가 교미를 하고 있었다. 원숭이의 표정을 볼 수 없었던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분명히 사랑 없는 공허한 행위일 것이라 단정할 수 있었다. 원숭이는 육신의 형태가 인류와 비슷하기에 교미할 때 마주 볼 줄 알았는데 역시 짐승이었다. , 돼지, 개가 다 그렇다. 닭의 교미는 암컷을 짓밟는다. 암컷의 사랑을 확인할 겨를이 없이 폭력적이다. 수모를 당한 암탉은 고개를 홰홰 저으며 꼬꼬댁하고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자신의 모멸감을 해소한다.


사랑이 없는 성은 폭력이다. 동물적 행위일 뿐이다. 성폭력은 폭행자 자신의 파멸을 부른다. 조선시대 권력을 가진 자들은 하층계급 여성을 성노리개로 삼으면서도 아무런 죄의식이 없었다. 조선 후기 윤지당 임씨(允摯堂 任氏 1721~1793) 같은 여성 성리학자는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성리학을 연구하여 여자도 수양을 통해 성현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여 남녀동등권을 주장했지만 이 역시 상층계급 여성을 두고 한 말이다. 자신이 부리는 여성을 그의 성적 자율권까지 부리려했던 소위 사대부 남성들의 가치관을 오늘날 알량한 권력자들도 누리려 하고 있다. 동물은 사랑도 없이 교미하지만 상대를 소유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성폭력을 하고 여성을 소유까지 하려한다. 이렇게 야만적 가치관을 지닌 그들이야말로 오동도의 도적과 같은 자이다. 원숭이나 닭과 다를 바가 없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권력을 지닌 남성들은 여성이 사랑의 눈짓을 보내지 않아도 성을 행동화할 수 있나 보다. 여성도 정절을 소중하게 여기고 자존감을 위하여 싫으면 당당이 "싫어요." 라고 말해야 더 큰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잊어버린 것 같다. 성애가 해탈 열반하기 위한 성스러운 수행의 길이라 하는 것은 힌두인이 아니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래도 동백꽃 전설의 아리따운 여성, 지조 있는 지아비는 못되더라도 원숭이 꼴은 보이지 말아야겠다.


정절은 무엇일까? 순정으로 온누리에 붉게 피어난 동백꽃이 대답한다. 사랑 없는 성은 공허한 행위일 뿐이다. 성을 도적질한 인간은 결국 파멸한다. 누구보다 그대만을 사랑하는 감미로운 눈짓으로 주고받는 성애만이 성스럽고 아름다운 정절이다.

    (계간 文章 청탁원고 2018. 3.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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