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

칠보산 함박꽃

느림보 이방주 2018. 7. 2. 15:25

칠보산 함박꽃

   


201869

괴산 칠보산에서


  

신라 법흥왕 때 유일대사가 괴산 쌍곡리에 절을 세우려고 공사를 시작했다. 이때 까마귀 떼가 나타나더니 대팻밥을 물고 어디론가 날아갔다. 스님이 따라가 보니 어느 작은 연못에 대팻밥을 떨어뜨렸다. 그런데 그 연못 안에 석불이 있었다. 스님은 연못을 메우고 그 자리에 절을 짓고 연못에 부처님이 있어 깨달음을 얻었다.[覺有佛於淵中]’라는 의미로 각연사(覺淵寺)라 하였다. 보개산각연사는 칠보산 아래에 있는 것으로 다들 알고 있지만 대웅전은 보개산을 주봉으로 칠보산을 안산으로 하고 있다.

대웅전에서 바라보이는 동남쪽 계곡으로 낙락장송 그늘 아래 산철쭉 꽃을 바라보면서 한 시간 반쯤 오르면 칠보처럼 아름다운 칠보산이다. 각연사 부처님은 날마다 중생이 아닌 칠보를 바라보고 있다. 대웅전 바로 앞은 비로전이다. 비로전 돌부처님은 오른손으로 왼손 검지를 감싸 쥐고 있는 비로자나부처님이다. 처음 연못에 계셨던 부처님인지 알 수는 없지만 지권인으로 세상은 모두 하나임을 가르치고 있다. 천년을 칠보만 바라보고 한번도 다른 곳에 눈길을 준 것 같지 않다. 하지만 한곳만이 아니고 온누리의 중생을 향하고 있을 것이다. 광배 구름무늬 속에 핀 연꽃은 혹 목란이 아닐까 싶다. 신라의 다른 부처님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아한 모습이다. 과연 진리의 세계, 불법의 세계를 두로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통솔할 것 같은 상호이다.

지난 유월 초 칠보산에 또 올랐다. 각연사에 차를 두고 청석재로 올라가 정상에서 백두대간을 조망하고 활목고개로 내려오기로 했다. 처음 보는 것은 아니지만 통일대사 탑비를 얼른 보고 싶었지만 돌아간 까닭은 청석재에서 778m 정상에 올라 각연사를 본 다음 내려오는 길에 각연사 중창 스님의 탑비를 보면 다른 감동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일행은 부부등산모임이라 걸음이 느리다. 그 대신 주변을 다 돌아볼 수 있다. 지난 사월 산불처럼 타오르는 산철쭉은 이제 다 지고 푸른 활엽수가 유월의 따가운 볕을 가려주고 있었다.

정상에서 바라보이는 희양산, 장성봉, 대야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은 수려하기 이를 데 없다. 장성봉에서 한 줄기가 꿈틀꿈틀 내려와 보개산을 이뤄내고, 거기서 둘로 나뉜 한 줄기가 활목재에서 고개를 한 번 숙인 다음 불끈 칠보산을 일으켰다. 칠보와 보개가 빚어낸 목란의 화심자리에 각연사가 앉아 있다. 비로자나부처님은 백두대간의 기운을 쓸어 담고 있는 터전에 좌정하여 여기 정상에 서있는 나를 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상에서 내려와 활목고개를 지나 통일대사탑비에 이르렀다. 천여 년 전 고려 광종 대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기단 위에 귀부, 비신, 이수가 완벽하게 갖추어져 전해지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지난번에는 보지 못했던 기이한 꽃무늬를 발견했다. 귀부의 등 가운데 비신받침에 연꽃을 엎어놓은 모양인 복련좌 무늬인 것이다. 복련좌는 사실은 목란이라 불리는 함박꽃이 피는 모양새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비신이 각연사를 향하고 있다.

통일대사탑비에서 조금 내려오면 각연사 부도탑 2기가 있다. 부도탑 바로 아래를 돌아오다가 문득 함박꽃을 발견했다. 250cm 높이의 작은 나무인데 널찍널찍한 잎으로 하늘을 가리고 그 아래 숨어서 하얗게 피었다. 어떻게 이렇게 고울 수가 있나. 새하얀 꽃잎 한가운데 노란 화심이 있고 그 주변을 우아한 보랏빛 수술이 둘러쌌다. 백작약 모습을 닮았다. 그래서 함박꽃이다. 연꽃도 하늘을 향하여 피고, 백작약도 하늘을 향하여 핀다. 그런데 함박꽃이라 불리는 목란은 땅을 향해 핀다. 목련이랑 비슷하지만 목련은 수명을 다하면 하루아침에 우수수 져버리지만, 함박꽃은 연꽃 밭에 간 것처럼 지는 것도 있고 피는 것도 있고 잎새 뒤에는 새알 같은 봉오리도 숨었다. 그야말로 피고지고 또 피는 무궁화처럼 두고두고 피어난다. 은은한 향기도 부처님 자비처럼 멀리멀리 퍼져나간다.

 

옛날에 한 선비가 공부만 하느라고 건강을 돌보지 않아 콧병이 생겼다. 지금으로 이르면 축농증이 생긴 것이다. 냄새도 맡을 수 없고 더러운 콧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렀다. 코에서 지독한 냄새가 나서 가족들조차 슬슬 피했다. 선비는 죽어버릴 결심으로 산에 올라 칡넝쿨을 끊어 올가미를 만들어 나무에 걸고 목을 매었다. 그때 나무꾼이 소리치며 만류했다. 선비는 자결을 실패하고 병을 고쳐줄 의원을 찾아 유랑생활을 떠났다. 어느 마을에 도착했다. 의원이 있어 진찰을 받았는데 흔히 볼 수 있는 목란꽃 말린 것으로 처방해 주었다. 헛일 삼아 달여 먹었는데 축농증이 서서히 나았다.

 

우리는 목란, 산목련, 천여화, 신이화(辛夷花)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함박꽃 전설을 이야기하며 소담하고 어여쁜 꽃과 은은한 향기에 취했다. 생각해보니 함박꽃은 각연사 비로자나부처님이 바라보는 바로 그 자리에 피었다. 통일대사 탑비의 이수도 이곳을 바라보고 있다. 아니 비신 받침 복련좌가 바로 이 함박꽃인 목란을 본떠 그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칠보산 정상에서도 보개산 정상에서도 여기가 중심이다. 통일대사 부도탑도 여기를 바라보고, 각연사 본래 절터에 있는 석조귀부도 목이 남아 있다면 여기를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여기가 중심이다. 하늘도 땅도 온 세상이 나를 향하고 있고 나로부터 시작이다. 부처님 자비가 이곳으로 모여들고 구원의 손길이 여기에서 시작한다.

함박꽃은 묵상인지 수줍음인지 땅만 바라보고 있다. 백두대간으로부터 각연사 골짜기까지 뻗쳐 내려온 온갖 기운에 감응하여 피어난 꽃이다. 함박꽃이 곧 비로자나부처님이고 통일대사이다. 그 영험으로 선비는 축농증이 낫고, 나는 법열인지 푼수인지 벙그러지는 미소를 감출 수가 없다.

내려오는 길, 각연사 둘레 붉은 꽃들이 깔깔거리며 웃고, 푸른 나무들이 두 손을 모았다. 물소리는 범패가 되고 새소리는 게송이 되었다. 나는 가슴이 터질 것도 같고 하늘을 날 것도 같았다. 보개산을 올려다보니 산도 물도 꽃도 나도 부처도 모두가 하나다.


(월간문학 9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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