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

도깨비바늘은 사지창이 있다

느림보 이방주 2017. 10. 21. 08:31

도깨비바늘은 사지창이 있다

 


2017년 10월 19일

주중리에서

 

주중리의 오후는 한가하다. 벼를 베어낸 논바닥에는 볏짚이 아직 그대로 널려있다. 볏논에 들어갈 일이 없는 농부들이 논둑에서 서성인다. 다 이루어낸 볏논은 모든 걸 비워낸 성자의 모습이다. 들깨를 걷어낸 비얄밭이나 뚱딴지가 꽃은 떨어진 채 꽃대만 쓰러진 자투리땅도 황량해 보인다. 다만 배추나 무가 파랗게 자라는 남새밭이나, 대추나 감이 탐스럽게 익어가는 밭머리는 아직 풍요의 흔적이 남아 있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남새밭 둑에 도깨비바늘꽃 열매가 노을빛에 무성하다. 이제 꽃잎이 진 것도 있고 다 익어 열매를 흩어버릴 준비를 하고 있는 놈도 있다. 보랏빛으로 물든 줄기와 잎, 다 익어 바짝 독이 올라 있는 바늘 열매가 새롭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잡초더미에 숨어있더니 다른 들풀이 시들어 주저앉아버리자 혼자 도도한 체한다. 오늘은 자못 고고해 보이기도 한다.


가만히 살펴보니 배추밭 두둑 하나를 온통 도깨비바늘꽃이 독차지했다. 주인장은 마음이 넉넉해서인지 아니면 도깨비바늘꽃을 좋아해서인지 제초제로 초토화시키거나 예초기로 쓸어버리지 않았다. 들풀 들꽃을 찾아다니는 나는 주인이 고맙다.


사진 찍고 둑에서 내려왔다. 바짓가랑이가 새까맣다. 익은 놈이 없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그 뾰족한 도깨비바늘이 귀신같이 달라붙어 있다. 하나하나 떼어내야 한다. 도깨비바늘은 그저 바늘이 아니다. 바늘 하나에 갈라진 창이 네 개이다. 백제 근초고왕이 왜왕에게 하사했다는 칠지도 모양은 아니라도 끝이 네 갈래로 갈라졌으니 사지창四枝槍이라 이름 지어도 좋을 것 같다. 도깨비바늘의 사지四枝는 포크처럼 일렬로 갈라진 것이 아니라 네 방향으로 살벌하게 갈라져 앙큼하게 도사리고 있다. 끝은 갈고리 모양이라 짐승의 털이든 사람의 바짓가랑이든 한번 붙잡으면 놓을 줄을 모른다. 귀침초鬼針草란 별명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하나하나 떼어내려면 무한한 인내가 필요하다.


귀침초는 약으로도 쓰인단다. 놀랄 일이다. 한의사 김오곤 씨가 쓴 약초 이야기에는 급성 간염, 신장염, 충수염에 쓴다고 했다. 염증뿐 아니라 통증을 없애고 어혈을 풀어준다고도 한다. 별게 다 약이 된다.


염증을 치료한다니 간염이나 신장염만 고칠게 아니라 곪아 터지려 하는 마음도 치료해 주었으면 고맙겠다. 어혈뿐 아니라 가슴에 맺힌 시퍼런 멍도 풀어주었으면 좋겠다. 부지불식간에 탐욕스러워지는 것, 작은 일에 분노하고 노여워하는 것, 스스로 어리석어지는 것 같은 삼독三毒을 말이다. 삼독으로 미워하고 시기하게 된다. 이것이 번뇌의 근원이 아닌가. 귀침초라 하니 번뇌의 근원인 삼독을 깔끔하게 치료해주면 고맙겠다. 내 안의 모든 응어리도 사지창으로 푸욱 찔러 끈적끈적한 화농化膿을 쭈우욱 짜내어 풀어냈으면 좋겠다.

귀침초를 떼어내서 무얼 바랄까. 에라, 그냥 두자. 아니 절로 달라붙은 사지창이 오히려 고맙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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