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

가을여인 구절초꽃

느림보 이방주 2017. 10. 8. 06:07

가을 여인 구절초꽃

 

2017년10월7일

미동산에서

 


    사랑채 가마솥에서 단내가 나기 시작한다. 장작불은 시나브로 사위어간다. 얇은 종잇장을 날리듯 하얗게 재가 되어 폴폴 날리는 속에 빨긋빨긋 불꽃이 남아 있을 뿐이다. 가마솥에는 작은 화구호 용암처럼 옅은 갈색으로 뽀글뽀글 기포를 터뜨리며 엿이 되어가고 있다. 어머니는 커다란 나무 주걱에 엿을 찍어 올려 흘려 보면서 농도를 가늠하신다. 시집간 누나 약으로 쓸 구절초 엿을 고아내고 있는 중이다.

어머니는 음력 99일 중양절이 다가오면 집 뒤 우렁봉에 올라 구절초를 캐셨다. 땅바닥에 파랗게 주저앉아 있던 구절초도 이맘때쯤이면 꽃대가 쭉 올라오고 꽃을 피운다. 말로는 꽃대가 아홉 마디나 올라온다고 하지만 세어보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그런 연유로 구절초인가 보다. 꽃은 분홍색으로도 피고 하얗게 피어나는 꽃도 있다. 어머니는 구절초 약효는 중양절 때 캐는 놈이 제일이라고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누나는 시집간 지 사오년이 되어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가난하기는 했지만 자형과 금슬이 좋아 다른 걱정은 없는데도 엄마는 죄 없이 죄인이 되었다. 색시가 속이 냉해서 그렇다는 말이 시집 쪽에서 들려왔다. 여자는 배가 차면 아기씨가 자리를 잡지 못한다고 한다. 시집간 딸이 배가 차가운 것도 친정어머니의 책임으로 생각되는 시절이었다.

원인을 알아낸 엄마 눈에 불이 켜졌다. 음력 구월이 되자 구절초 대신 엄마가 가을 여인이 되어 온 산의 구절초를 다 쓸어 모을 기세였다. 캐어 모은 구절초를 새끼줄로 엮어 담벼락에 걸어 말렸다. 마른 구절초를 가마솥에 넣고 푹 삶아 물을 내어 거른 다음, 늙은 호박, 수수쌀을 넣어 삭혀서 엿을 고았다. 엿기름을 넣고 삭힐 때나 엿이 달여질 때 온 집안이 달달한 내음으로 가득 찼다. 엿은 아주 딱딱하지도 않고 너무 묽지도 않아야 한다.

까맣게 달인 엿을 한 입에 넣을 수 있는 크기로 동글동글하게 떼어서 볶은 콩가루를 묻혀 꼭 인절미처럼 만들었다. 가끔 내 입에도 한 덩이 넣어주면서 '누나 약이다'라며 경계하셨다. 엿은 쌉쌀하지만 달달한 뒷맛이 남아 입에서 자꾸 당겼다. 엿 항아리가 다락 어디쯤에 숨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참았다. 엄마가 '남자들에겐 이로울 게 없다'고 덧붙인 말 때문이었다. 그 겨울 구절초 엿을 정성껏 먹은 누나는 이듬해 초여름 아기가 생겼다. 그리고 누나는 내리 셋을 낳았다. 어린 마음에 혹시 아기들이 구절초 엿을 닮아 까맣지는 않을까 하던 걱정과 달리 아기들은 토실토실 예쁘기만 했다. 그 때 그 조카들은 이제 기업의 사장도 되고 아기 엄마도 되었다. 조카들을 보면 달달한 구절초엿 향이 나는 것 같다

미동산 산책길에서 구절초꽃을 만났다. 조금 일찍 와 있는 가을 여인을 만난 것이다. 아니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 사랑을 만났다. 누구나 아무렇지도 않게 만나는 구절초꽃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착한 가을비가 살짝 내려 물방이 맺혀 청초하다. 그만큼 아름답다.

어머니는 구절초가 하얗게 꽃을 피우는 하늘 푸른 가을에 꽃향기 은은한 우렁봉 언덕으로 가셨다. 들꽃들풀을 찾아다니면서 예쁜 들꽃을 볼 때마다 들꽃처럼 들풀처럼 살아오신 어머니가 자꾸 보였다. 그럴 때마다 꽃에서 어머니를 보지 말고, 세상을 보고 역사를 보고 민중을 보겠다고 다짐했다. 이제는 들꽃 들풀에서 절대 어머니를 찾지 말자. 가을이 되어도 어머니를 생각하지 말자. 그리움은 잊자, 잊어버리자, 잊어버리자, 잊자 다짐했다. 그런데 하얗게 피어난 구절초꽃을 보는 순간, 어머니는 꽃더미에서 올라와 어머니의 가을로, 어머니의 시대로 내 손을 이끌었다.

산책길을 다 돌아 내려오는 길에도 분홍색 구절초꽃이 무더기로 피어있다. , 이 가을, 구절초꽃 선모초仙母草, 가을 여인, 구절초로 고아낸 강엿, 냉한증을 어루만지는 푸릇한 풀물이 든 어머니 갈라진 손길, 구절초 엿을 약으로 먹고 아기를 가진 누님, 먼 옛날의 들풀 같던 삶들이 꽃으로 마구 피어났다.

돌아보니 구절초꽃은 어머니 약손이다. 어머니 손에는 실제로 구절초 약물이 지워지지 않아 푸릇한 때가 끼어 있었다. 그래서 구절초는 조선의 어머니 손에 묻어 선모초라 했는지도 모른다. 구절초는 조선의 여인이 지녀온 약손이다. 구절초가 꽃을 피우는 가을은 어머니 거친 손길이 그리운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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