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

청미래덩굴 열매를 보니

느림보 이방주 2017. 10. 16. 10:01

청미래덩굴 열매를 보니


2017년 10월 14일

세종특별자치시 금강자연휴양림 매봉에서

 


세종시 금강자연휴양림 매봉에서 빨갛게 익어가는 청미래덩굴 열매를 만났다. 이미 물들이기를 시작한 이파리 뒤에서 다 감출 수 없는 붉은색 열매를 숨기고 익어간다. 언뜻 보면 열매는 오미자 붉은 열매처럼 포도송이 모양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청미래덩굴은 애초에 꽃을 피울 때 하나의 꽃자루에 우산살처럼 쫙 펴진 꽃대마다 노란 꽃을 피운다. 꽃마다 열매가 맺혀 익었으니 마치 우산살 끄트머리에 동글동글한 루비가 달린 듯 아름답다. 붉은 열매가 소나무 가지 사이를 뚫고 들어온 가을볕에 보석처럼 윤이 난다. 가을이 할 일을 다 하듯 청미래덩굴도 가뭄과 장마 같은 고통을 다 받아들여 제 본분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이파리마다 이미 검버섯이 돋고 구멍이 숭숭 뚫리기 시작했다. 열매가 붉기를 더하면 잎은 더욱 초록을 잃어버린다. 봄이면 도톰하고 윤 반짝반짝 나는 잎이 돋는다. 잎은 날이 갈수록 젖살 오른 아기 얼굴처럼 오동통해진다. 보랏빛 입자루가 이어져 잎사귀 가장자리에 동그랗게 붉은색 테를 두른다. 그래서 이파리도 초록의 보석처럼 보인다. 봄에 노란 꽃이 피고 초록색 열매가 맺힌다. 가을이 가까워오면 열매는 연두색으로 옅어지다가 무너진 성터에 서늘한 바람이 불면 빨갛게 익어간다. 초록 열매는 초록답게 새콤하고 빨강 열매는 빨강답게 달콤하다. 초록이 빨갛게 익어가는 것도 서로 다른 맛을 내는 것도 자연과 우주가 내통한 조화이다.

청미래덩굴을 경상도에서는 망개나무라고 했다. 우리 충청도에서도 망개나무 덩굴이라고 했다. 동그랗고 반짝반짝 윤이 나는 이파리에 찰떡을 싸서 망개떡이라 했다. 어렸을 때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가면 상자에 담아 어깨에 걸고 다니면서 '망개에 떠억'하고 외쳐서 참 궁금했었는데 이제 보니 바로 이것이다. 일제 때는 망개나무 잎까지 걷어갔다니 참 대단한 족속이다.

청미래덩굴은 정이 많다. 이른 봄 싹이 나기 전 산성 답사를 가면 무너진 돌무더기에서 비집고 나와 바짓가랑이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성에서 죽은 백제부흥군의 손아귀처럼 소름이 끼칠 때도 있다. 어지간히 키가 큰 놈은 다른 나무에 기대어 있다가 얼굴에 손톱자국까지 내 놓는다. 가시 돋은 덩굴손이 모자라 갈고리 모양의 곁가지도 함께 나와서 옷자락을 잡고 늘어진다. 내 장딴지는 온통 청미래덩굴의 정표투성이다. 정이 깊어 흉터는 쉽게 사라지지도 않는다.

청미래덩굴은 내게는 정 많은 인연이다. 때로 매정하게 떼어내기도 하지만 엉겨 붙는 것을 보면 내가 가는 길에서 만나야 할 소중한 인연인가 보다. 내게는 그냥 가야할 길이다. 이른 봄 산성 돌무더기이든, 이 가을의 금강자연휴양림 매봉이든, 그냥 가야 할 길이다. 문학이든 산성산사 답사이든 그냥 가야할 길이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덩굴손을 내밀어 다른 나무를 지탱하고 벋어 올라가 꽃을 피우고 붉은 열매를 맺는 청미래덩굴처럼 그냥 군말 없이 가야 할 길이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이고 내게 주어진 운명이다. 멀리 금강이 수천 년을 두고 말없이 흘러가듯 그냥 그렇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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