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딴지꽃의 음덕
2017년 9월 26일
주중리에서
주중리 밭머릿길에는 뚱딴지꽃이 흐드러졌다. 뚱딴지꽃은 미호천에도 주중리에도 피기 시작했다. 뚱딴지꽃은 꼭 해바라기꽃 모양이다. 키가 큰 것으로 보면 해바라기 같고 꽃이 작은 것을 보면 루드베키아Rudbeckia 같다. 뚱딴지꽃을 사진만 본 사람은 해바라기나 루드베키아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향하는 각각 세계는 다르다. 해바라기는 끝없는 그리움을, 루드베키아는 영원한 행복을 말하는데 뚱딴지는 뚱단지같이 미덕과 음덕을 말한다고 한다. 꽃을 들여다보면 화심도 꽃말만큼 전혀 다르다. 해바라기는 해를 바라기 한다면서 고개를 대개 푹 숙이고 있는데 비해 뚱딴지 작은 얼굴이지만 하늘을 향하고 있다. 그래도 뚱딴지꽃의 꽃말은 공감이 가지 않는다.
자전거를 타고 미호천에 나가 보면 뚱딴지꽃이 노랗게 줄을 이어 피어난다. 유난히 하얀 구름 몇 장 띄워놓은 푸른 하늘에 어울려 더욱 노랗다. 어린 시절에 마당가나 밭둑에도, 주중리 언덕배기 밭머릿길에도 뚱딴지꽃은 흐드러졌다. 우리나라 곳곳에 지천으로 피어나는 것이 바로 이 뚱딴지꽃이다.
뚱딴지는 돼지감자라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돼지감자로 알고 살았다. 돼지감자를 식량으로 먹고 살 정도는 아니었으나 배가 고픈 보릿고개에는 그것이 ‘돼지’라는 말이 붙기는 했어도 '감자'이기 때문에 꼭 감자 맛일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하긴 날것으로 먹으면 조금 더 심하기는 하지만 아릿한 맛이 비슷하긴 하다.
뚱딴지가 꽃을 피우면 아버지 말씀이 생각난다. 일제 때는 섬지기 농사지은 쌀은 모두 ‘공출’이란 이름으로 뺏기고 돼지감자로 연명했다고 한다. 요즘은 약으로 먹는 돼지감자를 끼니로 먹기에는 맛도 없을 뿐 아니라 속을 훑어내서 힘들었다는 말씀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셨다. 쌀은 다 뺏기고 배급으로 나온 콩깻묵까지 다 떨어지면 돼지감자도 귀해서 삼촌께서 이십 여리나 떨어진 인척 집에서 돼지감자 한 가마니를 얻어 지게에 지고 왔다는 말씀도 들었다. 무게 때문에 주린 배가 자꾸 들어가 앞으로 꼬꾸라질 것 같았었다는 말씀이 어린 가슴을 아프게 했다.
지금은 꽃이 예뻐서 가을의 정서를 마냥 불러일으키는 꽃이 되었다. 뚱딴지꽃차를 만들어 마시는 우리 차 연구가도 있다. 돼지감자는 천연 인슐린insulin으로 알려져 당뇨가 있는 사람들은 치료약으로 쓰인다. 조리법이 연구되어 아린 맛을 없애고 달달하게 만들어 건강식으로 내놓는 요리 연구가도 있다. 지난해에는 사돈께서 보내주신 뚱딴지 차를 겨우내 마셨다. 구황식품이 건강식품이라니 참 전설 같은 옛 얘기가 되었다. 그러나 내 기억에는 배고프던 시절 어른들의 아린 말씀만 남아 있다. 돼지감자는 날로 먹으면 약간 아릿하다.
나라를 빼앗겨 아릿한 맛을 참으며 주림을 고통을 견디어 냈을 생각을 하면 지금도 아리다. 어려운 시절에 우리 민족의 목숨을 연명한 먹거리이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꽃은 예쁘지만 덩이줄기인 돼지감자는 울퉁불퉁 못생겼다. 그래서 꽃말이 음덕이고 미덕인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조상이 벼슬하여 나라에 공을 세웠으면 그 자제에게도 벼슬을 주어 음직蔭職이라 했다. 그렇게 받은 덕이 음덕이다. 아버지나 삼촌의 덕으로 뚱딴지의 덕을 알았으니 나도 음덕을 입었다.
우리 쌀을 앗아다가 맛난 밥을 지어 먹은 일본인들은 아직도 부자로 잘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역사를 어지럽힌 일이기에 아직도 세계의 눈총을 받고 있다. 맛난 쌀을 뺏기고 돼지감자로 연명한 우리도 살 만큼은 살고 있다.
오늘 아침 주중리 언덕배기에 무더기로 피어난 뚱딴지꽃을 본다. 우리는 일본인의 훼사로 아직은 역사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지만 어려움을 참고 견디어낸 조상의 음덕으로 언젠가는 푸른 하늘에 노랗게 꽃을 피운 뚱딴지꽃처럼 그렇게 우뚝 설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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