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도꼬마리
2017년 9월 26일
주중리에서
오늘 아침은 안개가 자욱하다. 새벽안개가 걷히면 하늘빛은 얼마나 고울까. 주중리는 안개 속에서 가을빛이 더욱 곱다. 논은 이미 황금으로 출렁이고 밭은 가을꽃이 초조하다. 오늘 아침에는 산비탈을 가로지르는 밭머릿길을 달렸다.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는 길가에 수로가 있고 수로를 펄쩍 건너뛰면 도라지 밭이다. 아직도 남은 하얀 도라지꽃을 찍으려고 수로를 건넜다. 그런데 밭둑에 도꼬마리가 소복하다.
도꼬마리는 이제 막 열매가 맺혔다. 우리 손녀 연재 손바닥 넓이만큼 곱고 깨끗한 잎이 열매를 가렸다. 아니 열매가 고운 하늘빛을 보려고 싱싱한 잎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열매는 소복하게 나있는 가시만 없으면 크기도 모양도 꼭 대추씨 닮았다. 가시 달린 열매가 귀엽다. 며칠 전까지 만해도 열매는 커다란 이파리 뒤에 숨어 있더니 요렇게 예쁘게 모습을 드러냈다.
서울에서는 도꼬마리라 하나본데 우리 충청도에서는 ‘도꼬마니’라 하는 것처럼 두 얼굴이다. 갸름한 타원형 열매에 가시가 소복하게 나 있어서 흉하게 보일 수도 있고 바지에 달라붙어 짜증나게도 한다. 이름조차 독기가 서린 도꼬마리는 한겨울에도 가시에 잔뜩 독을 품고 있다가 바지에 지독하게 매달렸다.
어지간히 익으면 노릇노릇해지는데, 한 주먹 따다가 약한 불에 달달 볶으면 꼭 커피 볶는 냄새가 난다. 가시가 망가질 때까지 볶아서 차를 끓여 마시면 보리차 같기도 하고 옥수수차 같기도 하고 작두콩차 맛도 난다. 도꼬마리 차를 꾸준히 한 일 년쯤 마시면 비염도 기관지염도 없어진다. 다른 기관지 계통에 구접스러운 병들이 깨끗이 없어진다. 그래서 한방에서는 그 열매를 도꼬마리라는 이름 대신에 창이자蒼耳子라고 한다. 백과사전에 보니까 권이卷耳, 시이葈耳, 양부래羊負來라고도 한다고 하니 이름이 많은 것만큼 효능도 다양한 모양이다.
이렇게 하늘빛이 고운 시월이 되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하다. 지금 성인이 된 어머니의 손자는 어렸을 때 비염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겨울에 시작된 비염은 여름이 되어도 잘 낫지 않았다. 병원에 열심히 쫓아다녀도 그때뿐이라 어미 아비를 어지간히 애태웠다. 어머니는 어디서 들으셨는지 도꼬마리를 따오셨다. 병원에서도 낫구지 못하는 지독한 비염에 바짓가랑이에 달라붙는 도꼬마리가 효험이 있으리라 믿지 않았지만,어머니 걱정을 덜어드리려고 차를 달여 먹여 보았다. 효험을 기대하는 마음이었는지 시어머니에 대한 감사의 뜻이었는지 착한 며느리는 참으로 꾸준히 아기에게 도꼬마리 차를 먹였다. 조금씩 효과가 드러나기 시작하더니 겨울이 가기 전에 비염이 없어졌다.
신이 난 어머니는 아예 마당가에 도꼬마리를 심어 가꾸셨다. 시골집에 가보면 지날 때마다 어머니 앞치마에 달라붙는 도꼬마리가 마당가를 가시울타리처럼 지켰다. 오늘처럼 하늘빛이 고운 시월의 어느 날 도꼬마리가 익어가는 시골집 마당에 어머니 꽃가마를 모셔놓고 노제를 지냈다. 막내아들에게 오셔서 두 달 넘어 병마와 싸우시던 어머니는 하늘빛이 처절하게 고운 날 여든다섯 가을을 마지막으로 강을 건너셨다.
콧물을 그치게 해준다던 어머니의 도꼬마리는 콧물에 눈물까지 범벅으로 걷잡을 수 없게 만들었다. 마당가에 도꼬마리를 보는 순간 하얀 앞치마에 가시 덩어리 열매를 따 모으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도꼬마리가 비염 치료제라는 건 헛된 말이었다. 모두 헛된 말이었다. 어머니의 마지막 꽃가마를 모신 마당가에서 도꼬마리는 비염을 벌떼처럼 몰고 와서 콧물이랑 눈물을 폭포처럼 들이 부었다. 할머니의 도꼬마리로 비염이 나아서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어머니의 손자도 비염이 도졌는지 아비의 옆에서 펑펑 콧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우리 부자는 도꼬마리 때문에 도진 눈물 콧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도꼬마리 앞에 쪼그리고 앉았던 오금을 펴고 일어나 주중리에서 돌아오는 길에 안개는 이미 걷히고 구름 몇 장 띄워놓은 하늘은 다른 날보다 더 곱게 푸르렀고, 누렇게 익어가는 벼 이삭이 논두렁에 닿을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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