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

들깨꽃과 가시박

느림보 이방주 2017. 9. 20. 19:54

들깨꽃과 가시박


2017년 9월 20일

주중리에서


밖은 아직 어둑하다. 그래도 백화산 너머 하늘이 발그레하다. 백화산 등성이를 어루만지며 오르내리는 산안개가 뽀얗다. 이럴 때는 주중리에 간다. 주성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려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 벼가 누릇누릇 익어가는 주중리 농로를 달릴 수 있다.


마을은 조용하다. 집집마다 꽃을 피웠다. 나가 있는 식구를 꽃이 대신하는가. 나는 집에 피어있는 꽃에는 관심이 적다. 논두렁 밭두렁에 피어나는 들꽃이나 들풀이 좋다. 벼는 어제보다 더 누렇고 그제보다 더 고개를 숙였다. 벼이삭에 이슬이 초롱초롱 맺혔다. 대추알도 더 굵고 밤송이는 절로 벌어 풀섶에 반짝반짝 아람이 나뒹군다. 세상은 날마다 조금씩 더 익어간다.


시냇물이 맑다. 모래는 손으로 비벼 씻어놓은 것처럼 깨끗하다. 방천 둑길을 달리노라면 볏논도 보이고 시냇물도 보인다. 주중리 사람들은 시멘트 포장된 밭머릿길 자투리땅에 들깨를 심어 먹는다. 아마도 들깨를 팔아 돈을 사기보다 들기름을 짜서 고소하게 살고 싶었을 게다. 알이 여문 들깨를 털며 한여름 동안 고초를 털어낼 것이다.


들깨가 꽃을 피웠다. 들깨 송아리에는 이제 막 알이 들기 시작하는 것 같다. 들깨 송아리마다 하얗게 이슬이 내려 앉아 마치 꽃처럼 예쁘다. 깻잎은 간밤 슬쩍 내린 비에 씻겨 깔끔하다. 밭머릿길 자투리땅에서 자라는 들깨라도 익어가기는 마찬가지이다. 논둑에서 밭둑으로 죽 이어지는 머릿길에서 들깨 익어가는 냄새가 난다. 주중리 들깨는 고소한 냄새만 나는 게 아니다. 주중리 사람들의 땀 냄새가 난다. 지난여름 휩쓸고 간 흙탕물 냄새, 나간 자식 그리는 그리움 냄새, 한숨 냄새, 눈물 냄새, 온갖 삶의 냄새가 배어 있다. 주중리 밭머릿길 들깨밭에서 풍기는 삶의 냄새는 아무나 맡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마음이 있어야 맡아진다.


주중리 방천 둑에는 들깨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심지 않은 가시박 덩굴도 있다. 가시박은 아무도 반가워하지 않는데도 손을 내민다. 나뭇가지도 좋고 망초 대궁도 좋다. 덩굴손을 길게 늘여 좋아하든 싫어하든 손을 잡는다. 그리고 막무가내로 타고 오른다. 가뭄도 장마도 간신히 견디고 이제 겨우 꽃을 피우고 깻송아리를 맺었는데 들깨밭도 뒤덮었다. 어젯밤에는 어떤 흉계를 꾸몄기에 덩굴손이 살모사 대가리를 하고 일제히 하늘로 뻗어 있다. 깨밭을 뒤집어엎을 기세이다. 온통 가시박 세상이다.


가시박은 승자라 패자인 들깨의 고소한 문화를 포용할 줄 모른다. 인간사만 그런 줄 알았는데 한갓 들풀의 세상도 그런가 보다. 가시박이 들깨밭을 마구 휘저으며 꽃을 피우는 것을 보니 어느 정치인이 냅다 내뱉은 '궤멸'이란 말이 떠오른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안경 너머로 가느다란 눈꼬리를 치켜뜨고 독살스럽게 내뱉던 '궤멸!'이란 외침 때문에 부르르 떨리던 그날이 말이다. 역사의 한 쪽은 궤멸되는 것은 아닌가 두려웠던 그날 말이다.

 

, 나는 들깨꽃일까, 가시박 덩굴손일까. 생각하는 순간, 가시박이 음흉한 덩굴손을 내게도 내밀고 있다. 그놈들이 자꾸 '궤멸! 궤멸!' 하고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다. 아니다. 여긴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다. 자전거를 집어타고 페달을 밟는다. 기어를 올리고 페달을 더 세게 밟는다. 다행이다. 자전거는 바퀴가 앞뒤로 둘이라 꼬꾸라지지 않는다. 오른쪽 왼쪽에 핸들이 있어 한쪽으로 넘어지지도 않는다. 페달이 둘이라 앞으로 나가기도 쉽다. 둘이어서 참 다행이다. 역사도 두 바퀴로 굴러가면 넘어지지도 꼬꾸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아직도 궤멸이란 악머구리가 짖어대며 내 뒤를 마구 따라오는 것만 같다. 나는 고소한 들깨꽃을 버려두고 모든 정의를 외면한 채 마구 도망친다.

궤멸이란 외마디 소리가 나의 이념도 정서도 궤멸시켜버릴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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