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

목화꽃은 포근한 사랑

느림보 이방주 2017. 9. 12. 08:24

목화꽃은 포근한 사랑



2017년 9월 9일

 대진고속도로 덕유산 휴게소에서

 

산에서 보는 가을 하늘은 처절하게 파랗다. 어찌 하늘빛이 저렇게까지 고울 수 있을까? 해마다 가을이면 이토록 처절하게 푸른 하늘을 보고 또 보아야 한다. 가을 하늘은 파랄수록 슬프다. 어머니 떠나시던 그 가을 새벽하늘이 저렇게 곱고 파랬다.


대진고속도로 덕유산 휴게소에서 목화꽃을 보았다휴게소에 갸륵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 비록 화분이기는 하지만 목화씨를 세워 꽃을 피워냈다. 목화꽃은 씨를 세우기가 어려운 만큼 화사하다. 볼수록 따듯하다. 하얗게 피어서 성숙할수록 홍조를 띠는 모습이나, 초록 다래가 갈색으로 익어가는 모습이 다 옛날 그대로이다. 가루받이가 끝났는지 하얀색 꽃살이 초경하는 아이 개짐에 배어나듯 븕어가는 모습이 곱다. 마치 신방에서 첫밤을 겪어내고 첫 문을 열고 나오는 첫새벽 색시처럼 곱다. 내 가슴까지 설렌다.


가을조차 익어가면 다래는 저절로 벌어져 예닐곱 개의 씨앗 방에서 새하얀 면화가 터져 나온다. 엄마는 절로 터져 나오는 목화솜을 일일이 손으로 따서 모았다. 가을이 깊어 다래 달린 채 남은 목화 대궁은 베어서 볕이 잘 드는 산소 제절에 널어놓고 다래가 터질 때마다 한 송아리 두 송아리 목화솜을 따서 붉은 수수 이삭 담긴 댕댕이보구리에 담아 오셨다. 그것은 엄마의 노동을 준비하는 작업이다.  씨아로 씨를 바르고 목화솜을 타고 고치를 만들어 물레를 돌려 실을 뽑고 베틀에 올려 베를 짜야 한다. 목화꽃은 엄마의 숨가쁘게 끊이지 않는 노동을 품고 있다.


수업료 달라는 말이 영 나오지 않을 때는 목화 솜 따는 엄마에게 갔다. 목화 대궁을 드놓면서 거드는 척하다가 목에 걸린 생선 가시를 빼내듯이 그 힘든 말을 뱉어냈다. 목화솜처럼 포근해진 엄마는 고쟁이 안주머니에서 꼬깃꼬깃 한 달치 수업료 사백오원을 꺼내 주셨다. 지폐를 세는 엄마의 손이 지폐만큼 파랗다. 푸릇푸릇 백 원짜리 지폐가 하얀 목화솜 때문에 퍼렇게 멍이 들어 보였다. 우리 엄마 손도 다른 엄마들처럼 가늘고 긴 손가락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평생 무명 앞치마 풀어놓지 못하던 어머니는 하늘빛이 처절하게 고운 날, 그날만은 당신이 베틀에 앉아 손수 짜신 명주옷으로 갈아입으시고 저 강을 건너 가셨다. 지금도 어드메서 무명 앞치마 입고 목화솜을 따서 댕댕이보구리에 담고 계실까.


휴게소 앞산에 저녁 해가 목화꽃에 더 붉게 타다가 산을 넘어 간다. 서산에 지는 초가을 태양은 목화꽃이 더 고운 이유를 알까 모를까. 가을 하늘이 더 처절하게 슬픈 이유를 알까 모를까.

목화꽃, 그냥 봐도 포근한데 꽃말이 '어머니의 포근한 사랑'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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