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

미호천 왕고들빼기 꽃

느림보 이방주 2017. 9. 13. 14:07

미호천 왕고들빼기 꽃




2017년 9월 13일

미호천에서

 

 

미호천에 예쁜 들꽃이 무덕무덕 피었다. 며칠 전만 해도 꽃대조차 보이지 않더니 무더기로 피어 있다. 멀리서 봐도 청초하다. 자전거를 세우고 가까이 가서 들여다본다. 볼수록 예쁘다. 굳이 존재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요란한 색깔도 아니고 향기가 진한 것도 아니다. 꽃이 소담하게 크지도 않다. 그냥 희끗희끗할 뿐이다.


여름내 무성한 풀섶에서 남들처럼 이슬 맞고 바람맞다가 선들바람이 불면 꽃대가 올라온다. 꽃대는 개망초보다 높고 쑥대보다 높이 쭉 뻗어 오른다. 그렇게 높은 곳에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꽃을 피운다. 노란색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하얀 색도 아니다. 어머니가 베틀에 앉아 손수 짜낸 부드럽고 윤기 나는 명주 색이다. 옅은 현미색이다. 그런데 나비나 벌은 다른 꽃보다 먼저 찾아든다. 명주인 줄 알고 찾아올까, 따뜻한 사랑인 줄 알고 찾아올까.


왕고들빼기 꽃이다. 고들빼기 중에서 제일 크게 자라는 왕고들빼기가 꽃을 피웠다. 다른 고들빼기들은 대개 샛노랗게 꽃을 피우는데 왕고들빼기만 옅은 명주 색으로 피어난다. 고들빼기는 땅속 깊이 곧게 뿌리를 내린다 하여 고들빼기라 한단다. 척박하거나 말거나, 시원한 물을 찾아 나서는 일도 없다. 영양이 좋거나 말거나, 달콤한 젖줄을 좇는 일도 없다. 그냥 땅만 보고 땅을 향하여 곧고 깊게 파고든다. 고들빼기는 땅이 본분인 걸 다 안다. 그런 고들빼기의 왕, 왕고들빼기다.


고들빼기가 꽃을 피우는 미호천에는 미호천 사람들이 산다. 미호천 사람들은 고들빼기 꽃을 보면서 산다. 고들빼기로 김치를 담가 먹고, 고들빼기 잎으로 쌈을 먹는다. 땅에 곧게 뿌리를 내리느라 쌉쌀해진 맛을 먹고 사는 미호천 사람들은 사는 것도 고들빼기 삶이다. 부가 그리워 곁눈질 하는 법이 없다. 배만 곯지 않으면 된다. 쌀농사를 짓던 이들은 논에 물을 가두고 모를 심어 쌀을 거두는 것을 천명으로 안다. 벼 수매가를 낮추거나 말거나 백성이 먹을 만큼은 농사를 짓는 것이 미호천 사람들이 지녀온 사명이다. 쌀값이 내려진다고 내 양식만 거두고 돈 되는 작물을 곁눈질하는 법도 없다. 배추를 심던 자리는 배추를 심고, 가지를 심던 자리는 가지를 심는다.


미호천 사람들은 이념을 모른다. 그냥 사람다운 사람을 사람으로 여긴다. 목마르면 샘 파서 물을 마시고 배고프면 씨 뿌려 밥 먹고 사는 게 미호천 사람들의 삶이다. 미호천 사람들은 사람다운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 이념이다. 미호천에 사는 사람들은 고들빼기의 곧은 뿌리를 닮았다. 이해를 속셈할 줄 모르는 무모한 이념은 흔들릴 줄도 모른다. 때로 핫바지라 조롱당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섭리라면 그냥 맞고 사는 것이 그들의 이념이다.

미호천 왕고들빼기 꽃을 보면서 미호천 사람들을 생각한다. 왕고들빼기처럼 쌉쌀한 맛을 이념으로 삼은 사람들은 오늘도 곧게 미호천에 뿌리를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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