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

가을에 핀 삘기꽃

느림보 이방주 2017. 9. 12. 08:20

가을에 핀 삘기꽃


2017. 9. 9.

함양 백암산에서 

 

  이런! 9월인데 삘기가 꽃을 피었네. 5월에 피는 띠 꽃이 9월에 피었네. 때를 모르고 피었나. 삘기밭도 아니고 함양 백암산 다 올라가서 묵은 묘처럼 보이는 봉분에 딱 두 줄기가 피어났다. 처음에는 억새인가 했는데 분명 삘기꽃이다.


삘기라고 더 많이 불리는 띠 꽃은 마을 언덕이나 밭둑에 피든지, 낮은 산 양지바른 묘 제절에서 이른 봄에 아이들의 소망을 저버리고 원망스럽게 피었다. 그런데 얘는 제철도 아니고 제자리도 아닌 곳에서 하얗게 피어나 씨나래 날릴 준비를 하고 있다. 볕이 따갑다.


지금은 눈에 잘 뜨이지 않지만 예전에는 이른 봄이 되면 밭둑이나 따뜻한 묘 제절에 삘기 배통이 통통하게 불어났다. 아기 손을 잡듯 살며시 잡아당기면 풋 향내가 살짝 나는 보드라운 삘기가 올라왔다. 껍질을 벗겨 입에 넣으면 달근한 맛, 씹을수록 혀에 감기는 촉촉한 감촉이 좋았다. 종일 삘기를 뽑으며 달달한 맛에 대한 소망을 다스렸다.


삘기 뽑기는 혼자 하지 않았다. 마을에 같은 소망을 가진 친구들 너덧 아이들이 몰려다니며 함께 뽑았다. 삘기는 제 때 배가 불러 오고 우리가 뽑기 전에 바로 하얀 꽃을 피웠다. 그렇게 아쉬움을 남기고 꽃을 피워버린다. 꽃이 피고 나면 우리들 눈에서 우리의 관심에서 바로 사라졌다.


오늘 새벽에 반세기나 마음을 함께한 친구의 부음을 들었다.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친구를 한 번 더 찾아가야지, 전화 한 번 더 해야지 하면서 하루하루 미루다 부음을 들은 것이다. 친구의 죽음은 그저 슬픔이 아니다. 두려움이다. 나의 죽음이란 공포로 다가온다. 죽음이 공포라면 친구의 죽음은 그 공포를 아주 실감나게 일깨워 주었다.


조금만 더 살지. 친구는 다른 친구들보다 삶을 서둘렀다. 서둘러 결혼하고 서둘러 남매를 낳고 우리가 결혼을 생각할 때쯤 세째를 낳고 마감했다. 서둘러 승진하여 퇴임하고 새집 짓고 귀향하더니 띠 풀이 아쉽게 삘기꽃을 피우듯이 서둘러 삘기꽃 피는 동산으로 영원히 돌아갔다. 착하게 살면 복 받는다는 말도 거짓이다. 이 친구만큼 착하게 산 사람이 또 있을까?


정상 가까운 묘지에서 삘기꽃을 보니 볼수록 서럽다. 친구의 부음을 듣고도 산으로 온 나를 비웃는 것 같기고 하고, 한 번 더 찾아보지 못한 나의 게으름을 탓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나를 그리며 동구밖을 바라보다 떠났을 것 같기도 하여 이 사람이 여기까지 쫓아와 날 원망하는 것 같기도 하다. 생각날 때 한 번 더 가 볼 걸, 생각나면 하루에 두 번이라도 가 볼 걸, 이렇게 영영 만날 수 없는 세계로 가버리는 것을 …….


삘기꽃이 피었다. 4월이나 5월에 피는 띠꽃이 9월에 피었다. 산소에 띠를 두 번 깎는 부지런한 자손 덕으로 한 해 두 번째 피는 꽃이 가을에 내게 삘기꽃을 보내주었다.

산이 숨 가쁘다. 친구가 숨 가쁘게 떠난 날, 가는 친구를 그냥 두고 산에 오르려니 숨이 가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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