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

미호천 개똥참외

느림보 이방주 2017. 9. 4. 07:42

미호천 개똥참외


2017년 9월 3일

미호천에서


미호천 방천 둑 아래 못 보던 꽃이 피었다. 처음에는 가시박인가 했는데 병아리 주둥이처럼 노랗고 앙증맞은 꽃이 아무래도 참외꽃이다. 개똥참외가 아닐까? 자전거를 세우고 살펴보았다. 이런, 이런 개똥참외다. 벌써 암꽃 한 송이가 아기 방에 아기씨를 실었다.


지난 홍수로 온갖 오물이 떠내려 와 쌓였는데 쓰레기더미를 비집고 덩굴손을 내민다. 세상은 온갖 천박한 가치들이 제각기 박자도 없는 춤을 추고 있는데 개똥참외는 뿌리를 내리고 덩굴을 벋어 서둘러 꽃을 피웠다. 수컷은 수꽃을 피울 줄 알고 암컷은 당연히 암꽃을 피웠다. 수꽃은 섭리처럼 암컷의 꽃술에 꽃가루를 뿌리고 서산에 지는 해를 바라보며 장엄하게 최후를 맞을 것이다. 개똥참외는 그렇게 섭리대로 산다. 이제 곧 찬바람이 나면 열매가 익어 씨앗을 남길 수 있을지 앞날이 어둠에 가릴지라도 오늘은 꽃을 피운 것이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참외는 어디서 어떻게 떠내려와서 씨앗을 내렸을까. 미호천 자전거길을 바로 넘어선 황톳물이 찰랑찰랑 풀숲에 잔물결을 일으킬 때, 동동 떠내려 온 참외씨앗이 오로로 모여 있다가 물이 빠지자 바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 아이들은 태생부터 개똥참외가 아니다. 까치내 상류 어느 참외밭에서 수확을 기다리던 잘 익은 돈 덩이였다. 농투사니의 희망이고 꿈이었을 것이다. 억수로 퍼붓는 비를 맞고 탁류에 떠내려 온 귀공자이다. 개똥참외 신세가 된 귀공자이다. 증평 보광천에서, 진천 백곡천에서, 청주 무심천에서 고임 받던 귀공자가 탁류에 떠내려 와 버림받고 천대받는 개똥참외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개똥참외는 천대받았든 버림받았든 제 할일을 다 한다. 서둘러 덩굴을 벋고 노랗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려는 서슬이 퍼렇다. 비록 밭에 들지 못하고 미호천 뚝방 아래 자리를 잡았어도 제 할일이 뭔지 안다. 나는 암꽃 한 송이에 맺힌 작은 아기씨를 보며 애처롭다. 덩굴에서 수꽃 한 송이를 따서 암꽃에 가루받이를 해 주었다. 별 수 없어 보이는 개똥참외 가루받이지만 왕가의 혼인식 주례라도 된 것처럼 기뻤다. 오늘밤에는 이 아이들이 밀월여행을 하리라.

나는 절실한 기도를 한다. 개똥참외 아기씨가 잘 자라고 익어서 성과가 되어라. 잘 익은 개똥참외는 미호천으로 합강으로 백마강으로 떠내려가, 고라니 쫓는 까치내 농투사니 허기도 달래고, 곰나루 동학군 제사상에도 오르고, 사비성 부흥백제군 영가에도 오를 지어다. 출생 신분이야 아무리 개똥이지만 거룩한 일에 왕후장상王侯將相이 따로 있으랴. 기어리 그리 되어라.

개똥참외는 참외밭에 들지 못하고 밭둑 똥더미에서 나고 꽃피고 열매 맺혔어도 제 할일을 다 할 것이다. 홍수가 나도 증평 사람들은 삼포에 가고, 진천 사람들은 멧돼지를 쫓고, 까치내 사람들은 고추를 따듯이 어우렁더우렁 제 할 일 다 하며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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