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어떤 학교에서 교무부장 보직을 맡고 있을 때이다. 출근하여 하루 일정을 점검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학부형이라며 대뜸 이렇게 입을 떼었다.

"그 학교 선생들은 대체 왜 그 모양입니까?"

학부모는 담임교사가 생활기록부에 '책임감이 부족하고 성실하지 못하다'고 기재해서 딸이 가고 싶은 대학 수시 모집에서 낙방했다며, 차마 옮길 수 없는 말로 항의했다. 대학에 떨어져 실의에 빠져 있는 딸을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을 이해하기에 생활기록부에 대한 개념조차도 없는 학부형이 막무가내로 퍼붓는 언어폭력을 다 들어 주어야 했다.

입학사정관전형 등 신입생 선발제도가 다양해진 최근에 생활기록부는 가장 중요한 전형자료가 되었다. 그러기에 교사들은 객관적 자료를 토대로 책임감이 없는 학생은 책임감이 없다고 기록해야 한다. 부모들이야 자식이 어떤 생활을 하건, 다 훌륭하다고만 적어주는 담임교사를 원할 것이다. 그런 이들도 대학입시 제도를 토론하는 자리에 나가면 당연히 고등학교 내신 성적의 불공정성을 비판하며 열변을 토할 것이다. 자기 마음에 들게 평가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불공정인 양 항의하는 것이 세태이다. 그래서 교사는 설 자리가 없다.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실시하는 보충학습과 야간자율학습은 그 불필요성을 논하는 것조차 이미 지루한 일이다. 학부모를 포함한 교육에 관심 있는 인사들은 기회만 있으면 학교에서 인간 교육은 외면한 채 반강제로 입시위주의 교육을 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자식이 다니는 학교에서 갑자기 보충학습과 야간자율학습을 폐지한다면, 진학지도를 포기하는 것 아니냐며 소동을 피울 것이다. 생각해 보라. 학생, 학부모, 교사 중에서 야간자율학습이나 보충학습의 폐지를 가장 바라는 사람이 누구일까? 보나마나 자신을 버리고 밤중까지 학교를 지켜야하는 교사들이다. 그런데도 교사들은 부작용의 원인이나 제공한 것처럼 당치도 않은 항의를 뒤집어 써야 한다. 그래서 교사는 설자리가 없다.

우리 사회는 지향해야 할 가치의 모순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역사는 본질을 요구하는데, 정치는 현실적 욕구를 향해 치달리고 있다. 교사는 학생을 교육하려 하고 교육정책 입안자들은 학생을 통하여 정치를 하려 한다.

사회는 인성교육을 원하고 학부모는 치열한 입시교육을 소망한다. 이와 같은 가치의 혼란 속에서 교원능력개발평가의 일환으로 교사에 대한 만족도 조사를 하니 제대로 될 리도 없다. 그래서 교사는 설자리가 없다.

사회는 무한 경쟁을 요구하는데 아이들에게 상생과 나눔의 철학으로 가르치라 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학교를 불신하고 학원으로 간다. 정치인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권모술수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교사에게는 사명감을 가지고 학생을 바르게 가르치라 한다. 이것은 교육에 대한 폭력이다. 교육의 이름으로 학생들과 교사에게 퍼붓는 폭력이다. 교육을 향하여 날마다 폭력적인 언어와 정책을 쏟아 부으면서 말로는 학교 폭력을 걱정한다. 그래서 교사는 설자리가 없다.

교사들은 아이들을 바람직한 인간으로 가르치는 것이 교육의 본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회 지도자들이 바른 가치를 지향하고 그의 본분에 충실할 때, 학교는 제자리를 찾고 교사도 설 자리를 찾을 것이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도 누구나 자신의 소망을 이루는 정당한 사회가 된다면, 아이들은 폭력을 휘두를 겨를도 없이 미래를 준비하는 일에만 전념할 것이다.

교육에 대한 사회의 폭력이 없어지면 학교 폭력도 사라질 것이다. 나아가 교사들도 소신을 가지고 자신 있게 제자리에 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