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산남고 학생 여러분!
오늘 아침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졌습니다.
야마나시 현립 원예고등학교 타이꼬(太鼓) 연주 반이 떠나는 날입니다.
우리 학교 사물놀이반 친구들이
그들과 서울시청 앞에서 합동 공연을 하기 위해서 함께 떠나기로 했습니다.
새벽 바람이 제법 차가운데
야마나시 원예고등학교 학생들이
선생님들과 함께 우리 학교 강당에서 악기를 나르고 있었습니다.
나는 뭔가 도울 것이 있을 것 같아 기웃거렸지만 크게 도울 일이 없었습니다.
우리 사물놀이반 부모님들께서 나오셔서 그들을 이별하면서
우리 민족만이 가질 수 있는 꾸밈없는 따뜻한 사랑으로
그 아이들을 보듬어 주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떠나 보내면서
그들이 학교에 머무는 삼일 동안의 일들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바로 어제
합동 공연을 보면서 처음에는 섭섭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냥 섭섭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가슴에 쌍심지를 돋우고 불을 켜는 듯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물놀이반 아이들이 왜 타이꼬만 합동으로 연주하고 체험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왜 우리 악기를 연주해 보지 않느냐 이것입니다.
하얀 백지에 먹물이 스미듯 일본 전통 리듬을 타고 일본의 혼이
우리 아이들의 깨끗한 가슴을 물들이는 것 같아 가슴이 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 짧은 나의 기우였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물놀이반 친구들이 무대에 올라가 우리의 장단을 연주하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사물놀이는
꽹과리, 징과 같은 땅의 소리와
북, 장구 같은 하늘의 소리가 어우러져
천지가 한마당에 내리고 들어서는 창조과 개벽의 소리였습니다.
연주는
잔잔하게 하늘의 소리로 시작하더니
이어 땅의 울림이 은은하게 퍼지는 듯하다가
갑자기 땅을 뒤집을 듯이 휘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때로는 낙숫물이 떨이지듯이 신비로운 소리가
때로는 실개천에 물이 졸졸 흐르듯 하다가
미꾸리가 꿈틀대는 개울물이 되었다가
때로는 열길 바위에서 실폭포가 쫄쫄 물줄기를 떨어뜨리다가
갑자기 은어나 숭어가 튀어 오를 것 같은 거대한 폭포수가 되어
관객을 향하여 소리를 퍼부어댔습니다.
그렇게 마구 우리의 가슴을 두드리다가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잔잔한 호수의 잔물결이 되기도 하고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함부로 던진 돌멩이가 물수제비를 뜨듯 엇박자로 놓이는
휘몰아치고 좌로 튀기고 우로 튀기고 하늘을 찌르고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도저히 열두 명이 연주하는 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때로 잔잔하다가 느리다가 빠르다가
찌르고 두들기다가 때로 쓰다듬는 소리였습니다.
이렇게 신이 내려와 갖은 요동을 다 치고 휘돌아치는 연주를 하면서도
친구들의 땀묻은 얼굴에는 여유로운 웃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우리 친구들에게 살아 있는 우리 혼이 그렇게 드러났습니다.
단조로 일본의 장단으로는 물들일 수 없는
꼿꼿한 혼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선명하게 살아 있었습니다.
이어
일본 학생들의
"축제 후와 시간의 소리와 저녁 노을과 함께"라는 타이코 연주가 있었습니다.
소리보다 동작이 큰 연주는 북의 울림이 커서 웅장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박자는 단조로웠습니다.
우리 농악에 따르면 날라리에 해당하는 피리가 곁들여져서
다소 애상적인 분위기를 느꼈습니다.
몸집이 큰 학생이 나와서 느릿한 동작으로 전통 춤을 추다가
하얀 깃발을 흔들어대서 조금은 해학적이기도 했습니다.
다음에
일반 학생들의 타이꼬 체험이 있었는데
일본 음악 교사를 따라서 한 10분쯤 연습하고 구경하던 1학년 학생들이 모두 따라했습니다.
동작이나 소리의 크기는 미치지 못했지만
장단만큼은 거의 타이꼬반 학생들 수준을 소화해냈습니다.
문화는 뿌리의 깊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뮐쌔 꽃 좋고 여름 하나니"
새미 깊은 물은 가물에 아니그츨새 내이 일어 바랄에 가나니"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움직이지 아니 하므로 꽃이 아름답게 피어 열매가 많이 달립니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그치지 아니하므로 내가 이루어져 바다에 갑니다.)
이런 생각 말입니다.
뿌리 깊고 큰 나무는 바람에도 가뭄에도 오염된 물에도 흔들리거나 시들지 않는다는 진리를 더욱 굳게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많은 예산을 들여 우리에게 봉사한 것이 미안하고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냥 이웃 나라의 청소년들이 우정을 돈독히 하는 수준에 머무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산남고 학생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을 믿습니다.
(2008. 7. 28. 산남고등학교 홈페이지 학교칼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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