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에 들어가니 웬 어머니가 아이들을 꾸짖고 있었다. 세계의 미래를 주도할 인재들이 떼쟁이의 막말에 망나니로 취급되는 순간이었다. 교실은 성역이라는 개념조차 없는 어머니에게 담임선생님을 먼저 찾아가는 게 순서라고 말해 보았다. 말해 놓고도 내가 너무나 무기력한 교사라는데 놀랐다.

"모르는 소리 좀 그만 하세요. 선생들은 왜 모두 그렇게 답답하대요? 우리 아이가 폭력을 당했어요. 알기나 하세요?"

어머니는 학교가 한심하다면 교사는 학부모가 어이없다. 아이들은 일방적 폭력이 아니라 결투였다고 항변한다. 때론 결투를 통해 깨끗이 승복하는 용기를 갖는 것도 성장의 과정이라는 말이렷다. 그러나 폭력인지 사나이의 결투인지 자초지종을 알아볼 사이도 없이, 어머니는 막무가내로 교육의 성역을 휘젓고 있는 것이다. 대화로 풀라고 아이들을 가르칠 여유도 없어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교육이 설 자리가 없다.

학교 폭력이 세정의 화두로 등장했다. 선량한 학생들이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고 있다. 사실은 교사도 상처투성이지만 변명할 말은 없다. 사회단체는 학교의 사정을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연일 교사들의 무기력을 꾸짖고 있다. 국무총리까지 나서서 학교 폭력 대책을 발표했다. 복수 담임을 통한 생활지도의 강화, 폭력을 방치하는 학교의 교장과 담임교사는 중대범죄자로 처벌, 가해자의 대학 입학 전형에서 인성 측정의 요소로 반영하는 등 감독과 처벌을 강화하겠다고 한다. 경찰청장도 몇 달 안에 학교 폭력의 뿌리를 뽑겠다고 목청을 돋우었다. 이 모두가 학교가 폭력을 바라보면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한다고 전제하고 있어 섭섭하다. 문제 해결이 아니라 오히려 가해자에 대한 보복이고 학교에 대한 폭력이다. 인성교육조차 입시를 위한 것으로 만드는 졸렬한 정책이다. 총리께서 교장과 교사를 처벌하겠다고 말하는 순간, 학생에 대한 바람직한 행동 변화를 위한 의도적 행위는 교육이 아니라 처벌을 면하기 위한 도피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교육을 설 자리가 없다.

아이들은 왜 아름다운 청소년기에 자신의 화려한 미래를 준비하지 않고 방황하고 있을까? 왜 자신의 친구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싶을까? 이 사회는 과연 아이들에게 확실한 미래를 보장하고 있는가? 지도자들은 공부를 못한다고, 가난뱅이 자식이라고, 뚜렷한 배경이 없다고, 심성이 거칠다고 아이들의 미래를 빼앗고 있지나 않은가 돌아보아야 한다.

폭력을 휘두르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세상이 아무리 풍요로워도 지키고 다듬어 나갈 자기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무한 경쟁 지대에서 자신들만이 불평등한 출발선에 서있다고 절망한다.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좌절하고 방황하며 자기를 학대한다. 학교는 이들을 위로할 마땅한 미래가 없어 교육은 거짓이 되고 말았다. 내 아이만 생각하는 학부모, 교육의 과정을 무시하는 사회, 학교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정책 때문에 교육은 황무지가 되어 간다.

학교 폭력은 교육적 시선으로 파악하고 교육적 논리로 해결해야 한다. 교육적 성과를 숫자로 나열하고 몇 달 내로 해결하겠다는 정책으로는 결코 뿌리를 뽑을 수 없다. 맞은 아이의 상처도 보살펴야 하지만, 때린 아이의 망가진 심성도 더 따뜻한 가슴으로 보듬어 줄 수 있어야 한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행적이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삶의 지남차가 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한다.

사회적 가치가 바로 서야 교육이 아이들 앞에 바로 설 수 있다. 어른들의 뜻이 지어지선(止於至善)하면, 아이들은 지학(志學)으로 명덕(明德)에 정진(精進)할 것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만은 정치, 사회, 교육이 서로 존중하고 신뢰하는 바탕 위에서 모든 아이들을 똑같이 사랑해야 꽃이 피고 튼실한 열매를 맺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