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SST 선생님 !

그날은 체육대회 날이었어요. 그래도 저는 평소와 같은 시간에 출근했지요, 현관에 막 들어서다가 우둔한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날보다 더 일찍 나오신 선생님께서 아이들과 함께 의자와 탁자를 본부석으로 나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고운 손에 투박한 면장갑을 끼고 무거운 접의자를 두세 개씩 들어 나르느라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모습을 보고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동갑내기인 선생님이나 저는 이른바 원로교사가 아니었습니까?

SST 선생님 !

선생님도 진짜 원로교사는 따로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겠지요? 교육공무원 임용령에 의하면 정년 전에 임기를 마친 교장이 계속 근무를 희망하면 원로교사로 임용되는 것 아닙니까? 현실적으로는 유명무실한 제도이긴 하지만요. 예상되는 잔여기간을 같은 교장급인 장학관으로 살짝 자리를 옮겼다가 다시 교장으로 정년을 마칠 수 있도록 당국이 알아서 배려하기 때문이지요. 탁월한 능력이 아까운 이들이니까요. 그런데 그 너울을 왜 우리가 써야 한다지요? 경력 30년에 55세가 되면 우대한다는 명목으로 생쥐 꼬랑지만한 교직수당 가산금을 지급하면서 '교직수당가산금수혜자'라는 진짜 이름 대신 원로교사 호칭까지 얹어주잖아요. 이런 황감한 우대를 감지덕지해야 하는데, 왜 상투에 붉은 댕기를 맨 것만큼이나 부끄럽고 거북할까요? 교장을 한 일도 없고, 원로라는 말에 담겨 있는 것만큼 공로도 덕망도 없으니 진정성은 없는 호칭이잖아요. 저는 아직 마음과 말이 같은 교사들이 '원로'로 부르는 것을 보지 못했거든요. 그래도 원로교사라는 너울을 썼으니 서 있을 자리는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선생님은 교장 교감은 물론 3학년 부장보다도 항상 더 먼저 출근했어요. 그리고는 마치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젊은 교사들의 책상을 걸레질하고, 찻잔을 씻어 놓고, 집기들의 먼지를 모두 닦아 놓았습니다. 자리에 앉아 수업 준비를 시작할 때에야 교무부장이었던 저는 출근하였습니다. 아무도 선생님의 아침 시간을 알지 못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흘리는 땀의 시간이었으니까요. 선생님의 시선이 머물러 있는 곳에는 항상 아이들이 있었기에 큰 엄마뻘인 선생님을 따르고 존경하며 품에 안기고 고민을 털어놓으며 눈물도 흘렸습니다. 선생님이 지도하는 동아리 아이들은 대회마다 우승기를 휘날렸고, 담당하는 교과 성적은 다른 학교에 비해 윗자리를 차지하여 선생님의 보이지 않는 아이들 사랑은 가시적인 열매로 드러났습니다.

선생님처럼 교직수당가산금수혜자인 우리는 선생님에게서 진짜 원로교사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든 일을 자원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자리를 따르게 된 거지요. 당연히 연구실은 윤기가 돌았고 우습게도 진짜 원로교사인 양 다른 교사들에게 존경도 받게 되었습니다. 교육적 경륜으로 구성원의 사표가 되고 조직에 무게를 더할 수 있으며 학생들에게도 감명을 줄 수 있는 가능성도 갖게 되었습니다.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발걸음이 다르지 않으신 선생님의 자리에 함께 서 보려는 기특한 발길의 덕택이었습니다.

존경하는 SST 선생님!

선생님은 원로교사의 설 자리는 일러 준 진짜 원로교사입니다. 교직수당가산금수혜자가 아니라 원로교사의 진짜 얼굴을 보여주었습니다. 젊은 교사들에게는 교직의 희망을 실천궁행으로 보여 주었고, 아이들에게는 미래를 열어주었습니다. 그냥 선생님을 따르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설 자리였습니다. 이제 교장들도 원로교사가 교직의 꽃이라 생각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훌륭한 교장들이 임기를 마칠 날을 기다려 교실로 돌아올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날이 와도 우리를 원로교사로 불러 줄까요? 그러나 그런 날이 온다면 원로교사로 불러주지 않아도 교직수당가산금을 받지 않아도 마당에 나가 춤이라도 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