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수필
☆☆☆ 닭들의 변명
“우리가 열렸다. 야, 들어가자.”
먹을 게 수두룩하단다. 힘들이지 않고 쉽게 주워 먹기 좋아하는 닭들은 다 모여라. 정체성을 버리고 다 모여라. 정체 같은 건 필요 없다. 낯을 가리면 되니까. 먹을 게 떨어지면 항상 열려있는 울짱으로 먹이를 찾아 뛰쳐나가면 된다. 훤하게 열려 있으니 울짱은 뛰어 넘을 필요도 없다. 그래도 욕할 사람도 없다. 왜냐고? 우리는 닭이니까. 의리나 도덕은 없어도 되는 닭이니까. 정체성도 철학도 없는 닭이니까. 아니 본래부터 열려 있는 울짱이니까.
아침부터 눈이 내린다. 처음에는 길쌈하는 집 목화송이 날리듯 보일 듯 말듯 폴폴 날리더니, 어느새 온 하늘에 재티가 날리듯 까맣게 날아오른다. 그런 하늘 한가운데서 난데없이 한겨울 버마재비 한 마리가 날아든다. 아, 내 안에서 자라던 성격 까칠한 녀석이 아름다운 눈꽃송이의 향연에 뛰어든 것이다. 아마도 눈꽃을 난무하는 낙화로 착각이라도 한 모양이다. 어느새 저놈이 먼저 나를 부른다.
“여, 수필가 느림보님 안녕하슈? 무슨 근심이라도 있는게유? 그 뭐 콩자반 먹다가 염생이똥 씹은 얼굴로 하늘을 쳐다보우?”
나는 그 놈의 능청이 보기 싫다.
“어 사마귀, 오줌싸개야 한겨울에 웬일인가?”
“왜 또 사마귀라 불러요. 오줌싸개는 또 뭐요? 버마재비라고 점잖게 불러 주시지.”
“네 놈이 수시로 꼴을 바꾸니까 그렇지.”
“정체성이 없다 그 말씀이신가? 정말로 정체(正體)의 세탁은 인간들이나 하는 줄 알았는데 우리 동물들의 세계에도 그런 요상한 것이 있던데요. 인간들에게 배운 건지. 아니면 전생이 인간이었던지.”
“그 얘기나 좀 해 주게.”
“수필가 느림보님 그건 그렇고 우리 짐승들의 집을 말하는 ‘우리’란 말을 인간들은 어떤 의미로 사용하나요?”
“우리? ‘우리’의 의미를 공부하자 이건가? 우리를 공부하려면 ‘열림’도 알아야 하는데. ‘우리’와 ‘열림’이란 단어는 매우 요상한 관계가 있거든. 자. 그러면 수업 시작.”
1. ‘우리’와 ‘열림’에 대하여
<우리>
‘우리말큰사전’에서(한글학회 간)에서
우리 1 : 짐승을 가두어 기르는 곳
우리 2 : 갈매나무(우리(牛李)
우리 3 : → 울타리
우리 4 : 기와를 세는 단위. 한 우리는 200장이다.
우리 5 : 말하는 사람이 자기편의 여러 사람을 일컫는 말
“여보게 버마재비. 사람들은 ‘우리 1,3,5’의 의미를 많이 사용하지. 난 말이야 ‘우리 1’에서 ‘우리 5’로 의미의 확산이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요즘에는…….”
“아 그럼 인간도 우리네 짐승과 같다는 말인가요?”
“그럼. 결국 다 부처님 앞에서는 다 불쌍한 중생(衆生)이니까.”
“그럼 다 같은 중생이라면서 버마재비, 오줌싸개, 사마귀 하고 놀려대나요. 당신도 별 수 없이 짐승이면서.”
“그래 맞다. 다를 게 없지. 너희가 군집이란 우리에 갇혀 있듯이 결국 우리도 사회라는 우리에 갇혀 있으니 말이야. 버마재비야. 하나 더 공부할까? ‘울’에 대하여 말이야.”
“선생 아니랄까봐 그러세요? 아무튼 배우는 건 우리 짐승도 좋아하니까?"
<울>
‘우리말큰사전’에서(한글학회 간)에서
울 1 : 다른 개인이나 패에 대하여 이편의 힘이 될 겨레붙이(그 사람은 울이 세다)
울 2 : ① ‘신울’의 준말 ②‘울타리’의 준말 ③ 속이 비고 위가 터진 물건의 가를 두른 부분
울 3 : 뜰 (황해)
울 4 : ① 양털 ② 모직물(wool)
울 5 : ‘우리 4’의 준말
울 6 : 우리 5의 준말
※ 참고사항
울타리 : 풀이나 나무 따위를 얽거나 엮어서 담 대신에 경계를 지어 막는 물건
울타리 밖을 모르다 : 집안에만 있어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다.
“여보게 버마재비, 사람들은 ‘울 1, 2, 5’를 많이 쓰지. ‘우리’와도 관계가 좀 있고.”
“수필가 느림보님, 당신 왜 자꾸만 ‘우리 1’과 ‘우리 5’를 한가지로 보려고 하나요? 그러니까 ‘울 1’과 ‘우리 2의 ②’를 하나로 보려고 하는 것 아닌가요? 다른 사람에 대하여 이편의 힘이 될 겨레붙이가 되려면 아무래도 울타리를 해야 한다는 말처럼 들려요.”
“옳지. 버마재비, 오줌싸개. 네 녀석도 이제는 서당개가 다 되었구나.”
“아니 그게 아니고요. 요즘 우리 짐승들의 세계에 요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서요. 짐승들의 우리가 확 열려버렸거든요.”
“우리가 열리다니? 그러면 짐승들이 다 뛰쳐나가겠네.”
“아니 애초부터 우리 짐승들의 우리는 열려 있었어요. 열려 있었기에 정체성도 없고, 배반을 식은 죽 먹듯 하고, 먹이만 바라기를 하다가 쉽게 들어 왔지요. 그러니 쉽게 나갈 수밖에요.”
“아, 거기는 우리라는 닫힘과 열림이 함께 존재하는 아이러니 상황이었구나.”
“수필가 느림보님, 그 ‘열림’에 대해서 좀 가르쳐 주세요.”
“그래? 낱말 공부 시작.”
<열리다>
‘우리말큰사전’에서(한글학회 간)에서
열리다 : ① 문, 뚜껑, 서랍, 자물쇠 따위가 열러지다. ②모임이 시작되거나 베풀어지다. ③ 어떤 공간이 트리거나 펼쳐지다. ④ 어떤 길이나 바탕이 생기다. ⑤ 어떤 운영 따위가 처음으로 시작되다. ⑥일깨워지거나 발달되다.
※ 참고사항
열린 넋 : 베르그송 철학에서 기성사회의 질서를 벗어나서, 전 인류를 포용하는 정신. 곧 열린사회를 실현하는 창조적 정신을 일컫는 말
열린도덕 : 베르그송 철학에서 전 인류를 포용할 수 있는 사랑과 창조적 성격을 띤 도덕
열린사회 : 베르그송 철학에서 종족이나 민족을 초월하여 전 인류를 포함하는 동적, 창조적 사회
“아하. 그러니까 인간들의 세계에서 그 베르그송인가 누군가 하는 사람의 정의대로라면, ‘열림’이란 말은 창조적이고, 수용적이란 말이군요.”
“버마재비야 제법이구나. 당연하지. 아이들 말로 당근이지.”
“수필가 느림보님, 그럼 왜 우리들의 세계에서는 뛰쳐나가야 할까요?”
“그건 짐승이니까 그렇지. 짐승이 베르그송 철학을 아냐? 윤리를 아냐”
“수필가 느림보님, 너무 탓하지 마세요. 인간 세상에도 짐승만도 못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들어볼까요? 지존파, 막가파, 열린……”
“그만 알았다. 내가 잘못했다.”
나는 손을 들어 버마재비의 말을 막았다. 버마재비가 보면 나도 한 우리 안에 들어 있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부끄럽다. 소름끼치게 부끄럽다.
2. 약은 입에 쓰고 좋은 말은 귀에 거슬린다.
“수필가 느림보님, 동물의 세계에 닭이 있어요. 느림보님도 닭을 아시나요? 우리에게는 원수 같지요.”
“얘 버마재비야, 닭이 왜 원수란 말이냐? 우리 사람들은 닭을 아주 좋아한단다. 삼계탕, 찜, 백숙, 튀김…….”
“닭은 우리 버마재비를 좋아해요. 덩치도 커다란 수탉이란 녀석은 멀리서도 나만 보면 ‘꼬꼬꼬’ 흥분하여 날개를 펴고 달려든다니까요. 그러면 병아리새끼들, 암탉까지 우르르 같이 달려들어요.”
“왜 그러냐? 그 무섭게 생긴 도끼 다리를 번쩍 들고 세모대가리를 두리번거리며 퉁방울눈으로 노려보지 그러냐?
“소용없어요. 수탉이 갈퀴 같은 발을 들어 내 이 가느댕댕한 모가지를 한 번 찍으면 세상 끝인걸요.”
“네 배통이 통통한 것이 먹음직스러우니까 그렇지. 그리고 네 녀석이 짐승들의 세계에서는 제법 의리 있고, 주둥아리가 드세어서 닭들이 듣기 싫은 소리를 막 해대니까 아마도 닭들은 네가 원수 같을 거야.”
“그런데 열려 있다면서 닭들은 왜 좋은 말을 싫어하나요?”
“좋은 말은 귀에 거슬리니까 그렇지. 너도 이제 듣기 좋은 말만해라. 수탉에게는 그 화려한 깃털이나 신라의 금관 같은 벼슬을 칭찬하고, 암탉은 부드럽고 고운 깃털과 울음소리나 칭찬해라. 절대로 몸집에 비해 작은 대가리나 그 작은 대가리를 갸웃거리며 대상을 의심하는 모습을 보고 비아냥대지 마라. 역사의식은커녕 아침저녁도 모르고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는 울음소리를 듣고 잡아먹어야 한다느니 어지간히 짖어댄다느니 그런 말을 하지 마라.”
“귀에 거슬리는 말은 귀에 거슬리니 입에 쓴 약처럼 몸에 좋은 것 아닌가요?”
“버마재비야 세상은 모두 사전의 해석대로, 철학의 설명대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니라.”
“수필가 느림보님, 당신을 만나면 나는 더 더러운 놈이 되는 것 같아요. 그 그럴 듯한 궤변을 늘어놓은 당신의 수필을 읽는 것 같아요. 내 이 작은 세모대가리로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요. 에이 썅.”
갑자기 버마재비가 도끼 같은 앞발을 쳐든다. 철없는 당랑이 거철의 자세를 취한 것이다. 두렵다. 내 안에서 키운 버마재비가 오늘은 참으로 두렵다. 아프다. 가슴이 아프다. 내 양심이 도끼 다리에 찍히는 것만큼 아프다. 가슴에서 벌겋게 피가 배어나올 것만 같다.
3. 수탉 같은 신랑
“수필가 느림보님, 닭이 잘 생겼다고 말했지요?”
“그럼 그만하면 버마재비, 오줌싸개, 사마귀보다 잘 생긴 것 아니냐?”
“느림보님은 뭘 보고 그렇게 잘 생겼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래, 화려한 깃털, 불타는 정열의 표상인 신라 금관 같은 계관, 댕글댕글하게 쌍꺼풀진 눈깔, 하늘로 치솟다 기름이 졸졸 흐르듯 윤기 나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땅을 향하는 꼬리…….”
“수필가 느림보님도 별 수 없군요. 외모만 보고 닭들을 평가하다니.”
“게다가 수탉은 말이다. 제 가솔에 대해서 무한 책임을 진단다. 아내를 수십 마리씩 거느리고, 일단 제가 거느리는 암탉에 딸린 병아리들까지 책임을 진단다. 제 목구멍보다 아내들의 주림을 먼저 생각하고, 이웃 수탉의 침범을 막기 위해 피 튀기며 싸우지 않느냐? 너는 보지도 못했느냐? 네놈같이 살이 통통하게 오른 풀벌레라도 발견하면 ‘꼬꼬고 꼬꼬’하고 짖으며 암탉을 부르는 것을……. 마당에서도 제 무리를 한 바퀴 돌면서 크게 홰를 치고 울어 제 영역을 확인 하는 것을……. 그건 수탉의 카리스마야. 그래서 남자들은 수탉 같은 신랑이 되겠다고 다짐도 하지.”
“느림보님, 그건 틀린 말은 아니지요. 그런데 이제 보니 존경하는 느림보님도 꼭 수탉 같은 눈깔을 가지고 있군요.”
“뭣. 뭣이? 이놈아 난 쌍꺼풀이 아니잖아”
“날더러 세모대가리라고 무시하지만 닭은 닭대가리란 걸 모르세요? 인간들도 편견을 가진 자들에게 닭대가리라고 하잖아요.”
“닭대가리? 편견?”
“수탉이 아무리 잘 생겼으면 뭘 해요. 금관 같은 계관이라고요? 하나만 알고 둘은 보지 못하는 인간들이란.”
“그 둘이 뭐냐?”
“닭대가리를 보세요. 작은 것은 문제가 안돼요. 납족한 대가리에 눈깔이 양쪽에 달려 있어서 한 쪽 세상밖에 볼 수가 없어요. 오른쪽을 보면 오른쪽 세상밖에 모르고, 왼쪽을 보면 왼쪽 세상밖에 몰라요. 온 세상을 한꺼번에 수용할 줄 몰라요. 인간들의 말로 통찰력이 없어요. 게다가 이놈은 중요한 사건을 살필 때마다 대가리를 왼쪽으로 갸우뚱거리는 버릇이 있어요. 그러다가 아예 왼쪽으로 한 23.5도가량 기울어져 있걸랑요. 그래서 올곧은 세상이 모두 오른쪽으로 23.5도 기울어진 것으로 본단 말씀예요. 그래서 이제 듣는 것도 보는 것도 느끼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다 왼쪽으로 바루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세계에 대한 기울어진 인식으로 기울어진 지식을 갖게 되고 기울어진 지식으로 기울어진 해석을 하니까 행동도 기울어질 수밖에요. 요즘에는 새벽마다 기울어진 목소리로 꼬꼬댁거리잖아요. 아니 시도 때도 없이 왼쪽으로 기울어진 목소리로 왼쪽으로 기울어진 형상화에 열을 올리고 있잖아요. 제 집 암탉을 거느린다고요? 웃기는 얘기지요. 제집 암탉 목구멍에 넘어가는 모이도 뺏어서 이웃 마당에 노는 암탉에게 넘겨주는 것도 못 봤어요? 게다가 제 마당에 노는 우리 버마제비들만 보면 꼬꼬댁거리고 그 쉰 목소리로 짖어대잖아요. 말은 열려 있고 사고는 닫혀있으니 기우뚱거릴 수밖에요. 수탉의 카리스마는 이미 기울었어요. 왼쪽으로 기우는 순간 옛날의 카리스마는 더럽게 왜곡되어 버렸어요.”
“아, 기울어진 닭대가리? 닫혀 있는 열린 사고? 왜곡된 카리스마? 아아, 아아.”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두려웠다. 두려움으로 절로 신음소리가 나왔다. 그것은 닫혀있는 창조적 진화라는 아이러니였다. 내 가슴 속에서 겨울을 난 버마재비가 범처럼 두려웠다. 그 녀석은 정말 범의 아재비였다. 이 녀석을 나의 품 안으로 집어넣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모두 헛수고였다. 그는 수탉에 대해서 이미 너무나 큰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부족한 통찰력에서 시작된 편견이 이렇게 두려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랐다.
4. 정체성 세탁
“그래도 수탉은 저를 따른 닭들을 보호하잖아.”
힘없이 근거도 없는 낱말을 뱉어 보았다. 흥분한 버마재비는 세모대가리에 튀어 나온 두 눈을 탱글탱글 굴리면서 도끼 같은 앞발을 번쩍 들었다. 정말로 나의 사랑스런 애마 무쏘라도 번쩍 들어 엎을 기세였다. 나는 그 녀석이 또 두려웠다. 아, 가슴 속에 범을 키웠구나. 나는 또 후회했다. 그렇다고 패배를 자인할 수도 없었다. ‘보수 꼴통’이라고 욕을 먹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수필가 느림보님, 보호라고 했나요? 웃기지 마슈. 제 아내를 하나씩 잡아먹다가 이웃 마당에 낟알이라도 수북하면 다 버리고 건너갈 놈이 그놈이잖아요. 이미 몇 차례 건너다닌 전력을 잊었나요. 한 번 ‘꼬끼오-’하고 목을 뺐다가 내리면서 또 그 대가리를 갸웃거리며 슬그머니 이웃의 열린 마당을 기웃거리잖아요. 추종하는 닭들이 모두 그 흉내를 내고 우르르 그 녀석을 따라가잖아요. 아니 이제 제 수탉을 버리고 떼를 지어 이 마당을 저 마당을 기웃거리며 몰려 다니잖아요. 그러면서 뭐 열린 사고, 열린 수용, 열린 창조성, 창조적 진화 어쩌고 되잖은 낱말을 지껄이잖아요.”
“열린 창조성? 열린 사고? 아 아.”
“열림이 그놈의 정체성이라네요. 이웃 마당에 슬그머니 건너가서 이것저것 아무거나 마구 훔쳐 먹다가 어린애 똥에 섞인 거시라도 발견하면 그것도 먹을 거라고 혼자 처먹다가 제 얼굴에 똥칠이라도 하면 또 물 맑은 마당을 기웃거리잖아요. 열려 있으니까 아주 손쉬운 일이지요. 열린 사고니까, 열린 창조성이니까. 제 주인인 수탉의 깃에서 구린내라도 나면 바로 다른 수탉을 따라 나서고, 그러면 제 몸까지 깨끗해지는 줄로 착각하고 있잖아요. 배신자가 되는 줄도 모르고. 이 버마재비의 세모대가리로 생각건대 그건 정체성의 세탁이라고 하고 싶어요. 인간들이 날마다 옷을 갈아입듯이 수시로 털갈이를 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세탁하는 거지. 흐흐”
이놈의 입을 틀어막을 수가 없다. 사마귀 같은 놈, 아니 그냥 마귀 같은 놈, 오줌싸개 같은 버마재비. 그러나 그 녀석의 이바구는 정말 무서운 범의 아재비였다.
5. 열림에 대한 궤변
“정체성 세탁? 그게 아니라 그들의 사고는 열려 있으니까 그렇게 해도 괜찮은 거지. 새로운 우리를 만들고 새로운 닭들을 받아들여 다 함께 열린 사고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겠다는 거야. 열린 세계라는 몽유도원도를 현실에 그려 놓겠다는 거야.”
“수필가 느림보님, 그런 궤변을 늘어놓지 않아도 당신 뭐하는 사람인지 다 알아요. 그건 열림에 대한 본질이 아냐. 이 양반아. 알아? 열림에 대한 궤변이라고 하는 거야. 이 갑갑한 수구 꼴통 나으리야.”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정말 수구 꼴통인가 보다. 와 도망가자. 망신이다. 버마재비가 없는 세상으로 도망가자.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도망갈 수 없었다. 아직 날이 차기 때문이다. 이 날씨에 저 녀석을 품에 품어 주지 않으면 얼어 죽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마 맞아 죽을 것이다. 수레바퀴에 갈려 죽을 것이다. 수탉의 갈퀴 같은 발에 밟혀서 배가 터져 죽을 것이다. 당랑의 거철 같이 무모한 말을 마구 내뱉는 저 녀석을 아직은 내 품에 품어주어야 한다.
☆☆☆ 닭들의 궤변
“먹이가 떨어졌다. 야, 뛰쳐나가자. 다른 우리로 가자.”
저쪽에 보리가 다 익었다. 여긴 이미 풀 뿌리까지 다 캐 먹었잖아. 우리 수탉은 모이 쪼아줄 힘도 없어. 깃털에서는 구린내가 풍기잖아. 더럽다 더러워. 자, 가자. 헛소리만 해대잖아. 시도 때도 없이 초저녁부터 울어대잖아. 왜곡된 카리스마라잖아. 새로운 수탉을 찾아보자. 가자. 새 우리를 만들러 나가자. 어디로 갈까. 저쪽 감자밭에는 울짱이 높다. 그러나 뛰어 넘자. 아니 그냥 열려 있을지도 몰라. 눈을 가리고 아옹하면 다 되니까. 자 떠나자. 울타리 밑의 개 팔자 같은 시절도 다 지났다. 인제는 울타리 구멍에 족제비눈이 되어 눈치를 보다가 울타리 구멍에 족제비 달아나듯 살금살금 달아나자. 아니 여우 눈을 뜨고 여우같은 변명을 늘어놓아 볼까? 아니 저쪽 우리에서 받아줄까? 아니면 우리가 울짱을 치면 돼. 아니 헐어진 울바자에 이웃집 개 드나들듯 하면 되는 거야. 그러면 그쪽 우리에서도 다 울타리가 되어주는 거야. 우리는 어디든 우리니까. 닭은 어디가도 닭이니까. 모두가 다 중생 아닌가. 아무리 궤변이라지만 열림이니까. 열림의 세계를 다시 세워야 하니까. 창조적 진화를 해야 하니까. 가자. 새 우리를 찾자. 젊고 깨끗한 새 수탉을 찾자.
나는 한 쪽밖에 쓸 수 없는 귀로 빛깔도 알 수 없고 거리도 가늠할 수 없는 닭들의 아우성을 들었다. 어느새 내리던 함박눈이 그치고 먹구름 사이로 한줄기 빛살을 쏟아 붓는다. 열림을 왜곡한 또 한 무리의 닭들이 햇살을 받으며 담장 밑에 모여 섰다. 어미닭도 수탉도 없이, 윤리도 철학도 없이, 지남차도 정체성도 잃어버린 닭들이었다. 닭들은 그 햇살이 시험인 줄도 모른다. 꾸짖음인 줄도 모른다. 은총인 줄로 알고 있다. 닫혀 있는 사고로 열려 있는 줄만 알고 있다. 닭대가리니까. 세상은 점점 어두워 온다. 차가운 회오리바람이 분다. 떠나는 닭들이 날리는 깃털에서 역겨운 구린내가 풍긴다. 내가 키운 버마재비는 추위에 바들바들 떨고 있다. 나도 다리가 휘청거린다. 나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내 몸은 이미 떠나는 닭이 날리는 구린내 나는 깃털로 덮여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그런 떠남도 괜찮은 것으로 착각하는 나를 발견하고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2007.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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