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버마재비 문답(自責)

버마재비에게

느림보 이방주 2005. 7. 26. 12:33
  버마재비님, 안녕하세요. 사람들은 당신을 ‘오줌싸개’, ‘사마귀’ 이렇게 마구 부르지요?  그 때 기분 어땠어요. 그런데 내가 그 흔한 이름을 두고 낯선 ‘버마재비’라고 불러 주는 데는 다 이유가 있걸랑요? 싫지는 않지요? 아주 어렸을 때 어른들은 오줌싸개가 손등에 오줌을 싸면 사마귀가 난다고 했어요. 당신만 보면 그 사나워 보이는 삼각 대가리나 도끼 모양의 앞발보다 오줌이 참 많이도 들어 있을 것 같은 오동통한 배때기가 더 두려웠어요. 오줌이 묻은 곳마다 흉측스럽게 사마귀가 돋아날 것 같았으니까요. 그러니 오줌싸개니 사마귀니 하는 이름이 당신에게는 얼마나 불명예스러운 이름인가 알만하지요? 그에 비하면 ‘버마재비’라 불러 주는 내게 감사해야지요. 당신의 그 삼각 대가리와 도끼날 모양의 앞발, 다른 곤충들을 마구 잡아먹는 이빨과 턱주가리가 범보다 더 험악해 보인다 해서 우스갯소리로 범의 아재비로 승격시켜 준 이름이잖아요.

 

버마재비님, 오늘이 중복이네요. 그 얇디얇은 초록의 피부로 어떻게 염천을 지내시나요. 이파리 뒤에 달라붙어 있던 알에서 지난 오월쯤에 부화하여, 연록색의 연약한 당신의 배때기도 이제 오동통해지기 시작했겠네요.

 

나는 당신을 보면 참으로 만감이 교차하걸랑요. 왜냐고요? 막 알을 터뜨리고 나왔을 오월에는 우리 눈으로 보아도 속창자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애송이였잖아요. 건드리기만 해도 톡 터질 것 같은 배때기를 가진 그런 주제도 모르고 아무에게나 마구 덤비잖아요. 참 배를 잡고 웃을 일이 아닌가요? 내가 사마귀 공포에서 벗어날 날 만큼 나이를 먹었을 때쯤, 용기를 내어 곧 부러질 것 같은 당신의 보잘것없는 모가지를 당신에 비하면 정말로 거대한 두 손가락으로 집어올려본 적이 있었걸랑요. 개구쟁이였으니까요. 바동거리며 살려 달라고 애원하기는커녕 튀어나온 두 눈깔을 굴리며 아직은 연약한 앞다리의 두 도끼를 흔들며 폼을 잡고 위협하던 가소로웠던 꼴이 기억나기 때문입니다.

 

9월이나 되어서 아침저녁 바람이 서늘해져야 말갛던 초록색 배때기가 흰빛을 띠면서 오줌을 사정없이 내갈길 수 있을 만치 볼록해지잖아요. 그리고 앞발도 제법 여인네들 노리개 도끼만큼은 자라잖아요. 그 때나 되거든 두 눈깔을 번득이며 그 웃기지도않는 오줌싸개 권법이라는 똥폼을 잡아 보세요. 그래도 사실 무서워할 사람은 없걸랑요.

 

당신은 제법 육식 곤충이라고 하대요. 곤충을 잡는데 쓴다는 도끼 같기도 하고 낫 같기도 한 앞다리나 넓적다리나 종아리마다 송송 돋아난 가시돌기는 작지만 제법 맹수의 본을 떠 온 것 같고요. 교미 중에 수컷까지 잡아먹는다는 야만성인지 오르가슴의 극치인지는 모르지만 가소롭더라도 봐 줄만은 해요. 사람들도 그냥 그 의기를 기특하게 생각은 했던 모양이지요. 그래서그런지 당랑거철(螳螂車轍)이니 당랑지부(螳螂之斧)니 하는 당신에게는 과분한 고사성어가 남아 있는 걸 보면 말이에요.

 

당신은 당신의 조상이 춘추시대 제(齊)나라 장공(莊公)의 수레 앞을 가로 막았다던 웃기는 옛 행태가 생각나나요? 하기는 그 작은 대가리로 뭐가 생각나겠어요. 장공이 수레를 타고 사냥터로 갈 때, 겁 없이 그 가소로운 앞발을 도끼처럼 휘두르며 수레를 쳐부술 듯이 덤벼들었었다면서요. 점잖은 장공이 저 놈이 어떤 벌레냐고 물었는데, 현명한 마부가 그래도 얘기를 잘 해 준거지요. “저것은 사마귀라는 벌레입니다. 나아갈 줄만 알고 물러설 줄을 모르는데, 보잘것없는 제 힘은 생각하지도 않고 적을 가볍게 보는 버릇이 있습니다.”하고요. 점잖은 장공이 용기만을 가상히 여겨서 수레를 돌려 다른 길로 가면서 당신을 살려 주었다대요. 그냥 깔아뭉개고 지나갔으면 어떻게 되었겠어요. 그러니 너무 잘난 척 하지 말아요. 당랑거철이라는 말은 사실은 자기 분수를 모르고 상대가 되지도 않는 대상에게 대적하는 무모한 행동을 비아냥거릴 때 쓰는 말이걸랑요.

 

아, 여기까지 얘기하니 나도 쑥스런 일이 생각나네요. 왜냐고요. 가만히 따지고 보니 내가 버마재비였어요. 지금까지 혼자 잘난 척 하더니 무슨 말이냐고요? 네 바로 그겁니다요. 혼자 잘난 척 하는 버릇 말이에요. 내 얘기 좀 들어 볼래요? 피차일반이라고 흉보지는 말고요.

 

처음 선생이 됐을 때 얘긴데요. 스물둘 노랑병아리 주제에 ‘선생님’이라고 불리니 세상에 보이는 게 없더라고요. 이미 이삼십년 선생을 한 선배 교사들이 다 우스워 보이고, 금방이라도 때꼬장물이 짜르르 흐를 것 같이 꼬질꼬질해 보이는 거야. 지금 생각하면 버마재비 같이 세상 물정 내다 볼 줄 모르는 겹눈깔이 원수였지요. 그래서 제 딴에는 구태의연하다고 생각되는 학교를 일신한답시고 앞에 서서 깔쭉거렸지요. 선배들이 볼 때 어땠겠어요. 아마 웃음거리조차도 안됐을 겁니다. 워낙 점잖은 선배님들이라 그냥 보고만 계셨던 거겠지요. 삼십년이 지난 지금 나도 그냥 빙그레 웃기만 하걸랑요. 돌려서 충고할 필요조차도 없다고 생각하니까. 언젠가 저절로 깨닫게 될 테니까. 나처럼 말이에요.

 

그리고 또 있어요. 처음 등단했을 때요. 등단하기 전에는 문단에 올라 있는 분들이 하늘같아 보이더니, 등단의 고갯마루에 일단 올라서고 보니 ‘글’이나 ‘문학’이 별거 아닌 것 같고, ‘뭐 이걸 글이라고 쓰나’ 하고 간이 슬슬 배 밖으로 기어 나오더라고요. 그러더니 작품집 한 권 내고, 선배들이 ‘대단해요.’어쩌구 하면서 입에 발린 격려의 말을 할 때마다 ‘하늘이 뭐 별거인가’하는 생각까지 했다니까요. 문학합네 하는 가소로운 버마재비가 되어버린 거지요. 간덩이는 이미 뛰쳐나가 저 혼자 돌아다니고요. 그러니 웃기는 건 버마재비님 당신만이 아니라 바로 나도라니까요.

 

높이 날던 꿩일수록 살을 맞고 떨어질 때는 더욱 참혹하다는 걸 깨달은 건 바로 얼마 전이예요. 누군가 내 글에서 감추어진 의미를 보지 못하고 비판의 화살을 날리더라고요. 화살 맞은 통증이 가시기 전에 ‘나는 남의 글을 보면서 그러지 않았나?’를 생각했지요. 그랬더니 내가 바로 버마재비였어요. 글 줄 사이에 숨어있는 심오한 의미는 보지도 못하고, 의미를 보지 못하니 그 글이 우스워 보이고, 문학이란 거대한 수레 앞에서 똥폼 잡는 버마재비가 된 거지요. 나도 사실은 당신같이 쬐꼬만 삼각 대가리인데 뭐가 보였겠어요. 아는 사람에게만 보인다는 그 심오한 세계가 보이기나 했겠어요?

 

버마재비님, 아무리 그래도 난 당신과는 달라요. 아니, 다르고 싶어요. 이렇게 빙그레 웃고라도 있잖아요. 당신을 보면서 말이에요. 당신 같은 사람들을 보면서요. 그러니 우리는 동급생이라 하지 말아요. 왜냐고요? 나는 깨알만한 작은 틈으로라도 세계를 보고 있잖아요. 물론 훤하게 다 보지는 못하겠지만, 나의 웃기는 과거를 돌아볼 줄도 알걸랑요. 그런데 당신은 아직도 장공의 수레를 가로막고 그 가소로운 오줌싸개 권법으로 수레를 뒤집을 수 있으리라고 똥폼을 잡고 있을 거 아녜요?

 

참혹하게 땅에 떨어질 수 있다는 것도, 배가 터져 뭉개질 수도 있다는 것도 모르는 딱하고 불쌍한 버마재비님, 정신 차리세요. 당신의 계절은 아직도 멀었어요. 아직은 9월이 아니라 중복이걸랑요.

(2005. 7.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