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느림보님,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졌네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만, 날씨에 맡겨야하는 우리 버마재비들의 앞날이 암담하기만 하네요. 그런데 느림보님, 사람들의 운명도 뭐 별 수 없게 되었던데요? 특히 용암동 낙가리 사람들 말예요.
느림보님, 지난봄 낙가리로 올라간 적 있지요? 초파일이 전날인가 해서 등때기가 따사롭기에 살살 기어 나와 고개를 둘러보니 포도밭 사이에서 서성거리던데요. 아, 그래요? 보살사에 올라가는 길이었다고요? 낙가리 포도밭 길을 걸어가면서 혹시 대학 다닐 때 긴 머리 여대생과 짝지어 와서 시시덕거리던 추억에 젖어본 건 아니겠지요?
맞아요. 3, 40년 전부터 여기는 포도밭이었어요. 영운동 버스 종점에서 작은 개울에 놓인 시멘트 다리를 건너면, 임업시험장 시험포가 있었지요. 우거진 나무 샛길에서 일어나는 흙먼지를 뒤집어쓰면서 산모롱이를 돌아서면 골짜기 산기슭이 온통 포도밭이었잖아요. 포도밭가 자드락길에서 바라보면 그 때 그 포도밭이 지금도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낙가리 사람들은 아직도 대를 이어 포도 덩굴에 매달려 살고 있잖아요.
그런데 낙가리라는 마을은 꼭 포도송이 모양으로 생긴 것은 알고나 계신가요? 한남금북정맥의 한 지맥이 포동포동 살이 올라 일구어낸 낙가산이 두 팔로 감싸 안고 있어서 마을 모양이 갸름한데다가 언덕마다 사람 사는 집이 알알이 맺혀 있잖아요. 언덕에 그 뭐랄까 별종 인간들의 호화주택이 들어서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소나무 날숨을 받아 마실 수는 있걸랑요. 느림보님 당신이 세모대가리라고 놀려대는 내 머리는 적어도 90도는 마음대로 돌릴 수 있걸랑요. 그래서 주변의 웬만한 건 다 보인다는 건 아시는지요? 그거 참, 인간들 하는 꼬락서니가 보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지요 뭐.
왜 말이 거칠어지느냐고요? ‘인간들 꼬락서니’라고 말해놓고 보니까 눈뜨고 정말 보기 어려운 꼬락서니가 꼬리를 몰고 떠오르네요. 그게 뭐냐고요? 생각해 보세요. 느림보님 당신이 포도밭 가에서 꽃다지 노란 꽃을 바라보면서 ‘이제는 봄이구나.’하고 빌빌거리거나, 자주색 포도 덩굴에서 움트는 끄트머리가 발그레한 포도덩굴 새 이파리를 신기해 할 날도 이제 머지않았다고요.
봄은 어김없이 오고, 봄이 오면 어김없이 꽃다지가 노란 꽃을 피우고, 포도 덩굴에도 물이 오르는 건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낙가리 포도 덩굴에 매달린 사람들은 다 믿고 의심하지 않잖아요? 그만한 건 우리 버마재비 세모대가리로도 다 짐작하니까 뭐 대단한 건 아니고요. 봄은 해마다 거짓 없이 오고, 가져오는 것이나 놓고 가는 것이 해마다 변함없걸랑요. 봄은 그냥 조용히 와서 요란하게 꽃을 피웠다가도 아쉬움이나 안타까움 한 번 없이 다 거두어 가잖아요. 아무리 가지 말라고 몸부림쳐도 봄이 가야 포도는 열매를 맺고, 여름이 깊어야 포도송이는 오동통하게 익어가잖아요. 자연은 숨김도 없고 오만도 없고 편협한 생각도 아예 하지 않잖아요. 사람들처럼 이해를 따져보지도 않고, 아무런 계산도 없이 행동하잖아요. 그런데 정말 사람들은 왜 그걸 모르는지 몰라.
낙가리 사람들을 절망시키는 것은 봄도 겨울도 아니라네요. 그건 바로 인간 당신들이 아닌가요? 당신들이 자랑하는 문화라는 것이 다 그런 거 아닌가요?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단 것은 알아가지고 자연을 하나씩 빼먹어버리는 식의 어리석음 말이에요. 흘러가는 물을 가로 막아 댐을 만들고, 폭포도 볼만한데 분수로 치솟게 하고, 가을을 건너 뛰어 봄을 만들고, 봄을 가로 막아 겨울을 만들고 희희 낙락하잖아요. 겨울에는 여름 수박을 먹는 것을 자랑하고, 여름에는 온 집안에 찬 바람이 돌게 만들어 버리고요.
무슨 얘기를 하려느냐 그거지요. 지금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노려보는 뜻은. 조급하게 굴지 말아요. 내 다 말할게요. 내 세모대가리에 붙은 두 눈깔을 휘둥그렇게 굴려 보니까 여기 낙가리 포도밭을 다 뭉개고 밀어서 택지를 조성한다면서요? 사람들은 왜 자연을 부동산으로 보는지 몰라. 우리들의 삶의 터전이 왜 돈으로 계산되는지 몰라. 사람들은 꼭 그렇게 넓고 화려한데서 살아야만 하나요? 사람들은 그렇게 시멘트로 흙바닥을 싹싹 발라놓고 거기만 디디면서 살아야 제 맛이 나나요? 사람들은 그렇게 아파트를 짓고 층층이 포개져 살아야 맛이 나나요?
사람들은 깊은 숲 잎사귀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싫은 모양이지요? 사람들은 나무뿌리가 뱉어 놓은 맑은 물이 졸졸 흐르는 개울물을 먹으면 배알이 뒤틀리는 모양이지요? 사람들은 포도나무나 꽃다지가 내뿜는 바람으로 숨을 쉬면 허파에 먼지라도 앉는 줄 아는 모양이지요? 낙가리 포도가 이제 제법 당도가 높아져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다니까 심술보가 요동을 쳤나요?
도심 속의 낙원인 낙가리 포도원을 부자들의 낙원으로 만들고, 이 포도밭을 수십 년 지켜온 포도알 같은 정말 사람 같은 마을사람들은 몰아내야 속이 후련하겠지요? 그나마 자연이 남아 있는 이 낙원에 불야성을 만들고, 자동차 뿡뿡거리는 아비지옥으로 만들어야 속이 후련하겠지요? 수백 년 이곳에서 살아온 낙가리 사람들이 포도 농사를 지으면서 평화롭게 살게 그냥 두고, 가끔 찾아와서 그이들의 사는 모습에서 자연을 배우고 포도 맛 같은 진짜 삶의 행복을 배워 가면 얼마나 좋겠어요. 포도덩굴의 날숨으로 찌든 세상을 헹구기라도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사람들은 왜 그걸 모르는지 몰라
단순한 자연의 질서를 어지럽히면 참혹한 운명을 맞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걸 보면, 사람들은 버마재비 세모대가리보다 더 돌대가리야. 어이 추워. 겨울이 오면 불평 없이 생명을 내놓는 버마재비 운명도 아닌데 낙가리 포도밭 사람들은 어디로 쫓겨 가야 하나요? 이제 다음 차례에는 문명을 자랑하던 사람들이 다 그렇게 될 텐데. 안 그래요? 똑똑한 느림보님. 대답을 못하시네. 답답한 사람들은 정말 왜 그런지 몰라.
(2009. 11. 19.)
'느림보 창작 수필 > 버마재비 문답(自責)' 카테고리의 다른 글
傲慢의 生理 -버마재비의 의문- (0) | 2011.04.07 |
---|---|
토끼의 지혜 (0) | 2011.01.02 |
열린 수필 (0) | 2007.02.07 |
수필가 느림보에게 -버마재비의 의문- (0) | 2005.08.21 |
버마재비에게 (0) | 2005.07.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