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8.8.
8월7일 그리니치 천문대 부근에 있는 중국 음식점에서 모처럼 입에 맞는 중국음식으로 포식을 했다. 점심 식사 후에 하이드 공원에 갔다. 도시 중심에 있는 한없이 넓은 공원이 부러웠다. 끝없는 잔디밭, 호수, 비둘기, 물새, 뱃놀이하는 젊은이들, 왕실의 권위를 자랑하는 각종 구조물들이 이 나라의 전통과 영화롭던 역사를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이런 규모와 영화로운 모습에도 불구하는 나는 영국은 ‘조용한 노을의 나라’라고 이름 짓고 싶었다. 아침의 동쪽 하늘을 밝히며 떠오르는 장엄한 태양도 지나서, 한낮에 열정적인 태양빛도 다 겪고 지나서, 이제 젊은날의 영화로움을 다 초월하여, 조용히 노년을 즐기며 서산으로 기울어가는 아름다운 저녁노을과 같은 나라라는 생각은 나만의 지나친 편견은 아닐 것이다. 그리니치와 하이드 공원을 다녀오는 동안 걷기도 하고, 시내버스를 타보기도 하고, 무인 전동차도 타보기도 하고, 전철 안에서 겪은 사람들의 모습에서 나의 이런 결론은 더욱 확고해졌다.
2층 버스에서 내려다 본 런던의 거리(이민족이 거리를누 빈다)
런던은 참으로 조용한 도시다. 아침에 출근하는 차들이 골목에 줄을 이어도 소리도 나지 않고 막힘도 없다. 그들은 아주 천천히 그들의 행진을 계속해도 절대로 늦지 않는다. 거리를 꽉 메운 승용차, 택시, 2층 버스들도 아주 조용히 그들이 갈 곳으로만 간다. ‘빵빵’거리는 신호음도 없고, 신경질적으로 밟는 가속 페달의 소음도 들리지 않는다. 마을의 집들도 사람이 사는지 살지 않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조용하다. 깨끗하다. 사람들은 아주 예의 바르고 친절하다. 나이 많은 택시 기사들도 웃으며 인사하고, 2층 버스에서 검표원인 뚱뚱한 흑인도 정장 차림으로 조용히 그의 임무를 계속할 뿐이다. 변화와 탈선을 찾기 어렵다. 그들은 항상 웃으며,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를 습관처럼 말한다. 너무나 지나쳐서 입만으로 감사하고 입만으로 미안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앞선다. 정말로 미안하고 죄송해도 말로 표현하기 힘들어하는 우리와 다른 모습이다.
영국인들은 아주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며 매우 검소하다. 지하철에서 만난 사람들은 젊은이나 노인이나 시끄럽게 전화를 받지도 않고, 프랑스나 로마의 길거리에서 만난 젊은 남녀처럼 내놓고 감정을 표현하지도 않는다.
공항의 입국 수속을 하는 관리들도 매우 친절하고 합리적 질문을 했다. 까다롭다고 섭섭해 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지하철 연계구간의 도크랜드 경전철
골목을 누비는 2층 버스
런던의 지하철
런던의 거리에는 교통 신호가 많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다. 횡단보도에서 빨간불이 들어왔어도 차가 없으면 그냥 건너간다. 파란불이 들어와도 횡단보도에 사람이 기다리면 차가 서서 보행자에게 양보한다. 이런 모습들이 아주 익숙하게 습관화 되었다.그러므로 런던의 거리를 걷는 시민에게는 신호가 필요 없을 듯 했다. 질서를 넘어선 무질서의 질서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감동적이었다. 질서를 넘어선 무질서의 질서가 가장 이상적인 질서가 아닐까?
사실 신호라는 것은 질서를 가장한 규제의 상징이다. 산업화 이후의 물질 문명이 만들어낸 기계에 의한 인간 행동의 규제의 신호탄이 아니었나 싶다. 사람들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신호에 의해 규제받으며 바보처럼 차도 없는 거리에서 한참을 서 있어야 하는 것이 최선인 것처럼 살아 왔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 무의미한 신호의 규제로부터 벗어나야 될 때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런던 시민의 성숙된 무질서가 부러웠다.
영국인은 이런 성숙한 문화 속에 자신을 묻고 산다. 이런 문화로 숨 쉬고 이런 문화로 밥을 지어 먹으며 불평 없이 아주 조용히 살고 있는 것이다. 마치 젊은날의 방황과 고통을 다 넘어서서 모든 것을 초탈한 노인과 성스러운 모습과 같이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안정에는 도전이 없다. 도전이 없으면 변화도 없다. 굴곡이 없는 역사는 발전할 수 없다. 영국인들은 이미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려던 과거의 도전 정신을 초탈해 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과거의 화려했던 역사에 안주하면서 경제를 중심으로한 무한경쟁시대인 현재를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과거는 현재를 가꾸어가는 발판은 되지만, 고스란히 현재를 먹여 살려 주는 것은 아니다. 19세기 우리나라에서 혈통에 의한 신분을 재빨리 포기한 양반은 경제가 신분 질서의 중심이 되었을 때도 상층 계급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양반입네 하고 자신의 과거에 안주한 귀족은 결국 자신이 중인이라고 무시했던 신흥 자본가에게 빌붙어 식객 노릇을 해야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 벼룩의 방귀 소리만한 자존심이 된서리를 맞은 것이다.
하이드 파크 안의 호수
영국은 아직도 차량이 우측통행을 하고, 유럽의 다른 나라들처럼 유로화를 쓰지 않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내세우는 명분인 전통 유지라기보다 경제적 대결의 결과에 대한 패배의 두려움으로 인한 비겁함이 아닌가 한다. 사실 유럽 경제를 하나로 묶고자하는 통화의 통일에 합류했을 때 프랑스나 이태리, 독일 같은 나라들에게 최고의 자리를 뺏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왕 겪을 전쟁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겪는 것이 미래를 탄탄히 하는 것이라는 뻔한 논리를 잊고 사는 것 같다. 세계가 언제까지나 자신들을 강대국으로 인정해 줄 것이라는 믿음은 너무나 어리석다. 정치적인 영향력은 결국 경제력에서 나오는 것인데도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영국의 모습에서 많은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국을 비롯한 열강의 침략에 대해 무방비 상태에 있던 중국 사람들의 마음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의사를 포기하고 ‘아큐정전’이라는 소설을 썼던 루쉰의 가르침을 명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다.
노을은 아름답고 낭만적이지만 서산에 태양이 지고나면 역사의 하늘에는 바로 암흑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2006.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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