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워브리지의 야경
2006. 7. 25.
우리가 숙소로 정한 곳은 테니스로 유명한 웸블던 파크 부근의 '숲 속의 작은 민박'이라는 한국인 민박집이었다. 10분쯤 걸으면 웸블던 지하철역이 있다. 역에서 숙소 근처까지의 거리는 아주 깨끗하고, 주변의 주택들도 말할 수 없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전철을 타고 흥청거리는 차이나타운에 가서 저녁 식사를 하였다. 배낭 여행을 하는 여행자 치고는 과분한 집을 찾아 영국에서의 첫 식사를 했다. 풍성하기는 하였지만 그렇게 흡족한 맛은 아니었다.
런던의 여름밤은 시원하고 쾌적하다. 피부에 와 닿는 공기는 끈적거리는 우리나라의 열대야와는 다른 기분이다. 우리는 초등학교 때 어느 교과서에서 본 것 같은 템스강의 타워 브리지의 야경을 보기 위하여 천천히 템스강가를 걸었다.
타워브리지는 런던 타워(Tower of London)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런던 타워는 밤에 보아서 그런지 약간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하기는 옛날에는 감옥으로 쓰이기도 하고, 때로는 병기고로 쓰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어두컴컴한 분위기가 꼭 단두대에서 끔찍하게 처형된 유령들이 탑 위를 빙빙 도는 것 같은 기분이다. 아들의 말을 들으면 헨리 8세의 두 부인이 이 감옥에서 처형되기도 했고, 프랑스 왕, 히틀러의 측근인 루돌프 헤스도 여기에 투옥되었었다고 한다.
런던 타워의 으스스한 분위기에 비해 타워브리지의 야경은 찬란하였다. 지독하게 절약하는 영국인들은 밤에도 불을 켜지 않고 사는 모양이다. 가로등이나 거리의 간판들도 다 어둑어둑하다. 그러나 타워브리지에서 바라본 템스강가의 야경은 휘황찬란하였다. 특히 울긋불긋한 런던 브리지의 불빛은 일품이다. 10시가 가까워지자 드디어 타워브리지에도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장시간 비행의 피곤도 잊어버린 채 강가로 내려서서 다리를 바라보았다. 강 위에서 조명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거대한 탑을 보았을 때, 신비스럽게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동경을 완전히 엎어 버렸다. 잔잔한 물과 물에 비친 타워는 낭만적인 모습일 뿐만 아니라, 보다 웅장하고 섬세하며 아름다웠다.
나는 문득 이 타워브리지는 런던 시민이 '인간적 해방'이라는 인프라를 구축한 의미 있는 다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19세기 말에 완공하여 120여 년간이나 런던의 시민에게 신분간의 교두보가 되어 준 것이다. 대개 수도의 변두리는 중심부보다 하층민이 살게 마련이고, 변두리에 사는 하층민들은 중심부로 진출하기 쉽지 않게 마련이다. 이렇게 다리가 놓이면 지역의 차이에 의한 하층민의 물리적 소외감은 물론 심적인 거리감도 해소되기 마련이다. 런던은 이미 1800년대에 서민들이 두 다리로 걸어 다리를 건너 중심부로 진출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실로 계급 간의 축지법을 이룩한 것이다.
사실 계급이라는 것은 항상 존재하게 마련이다. 다만 그 계급을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이냐 하는 것만 다른 것이 아닐까? 상층 계급이든 하층 계급이든 자신이 앉아 있어야하는 규범이나 문화의 범주 안에서 주저앉아 있으려고만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에게 교통의 통로를 마련해 주는 사업이야말로 인간을 이해하고 해방시키는 아름다운 정치가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런던의 하층민과 상층 계급이 어디에 어떻게 살았는지 모른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계급의 경계를 없애고 정신적 인간 해방을 이루려는 사회적 시도의 분위기에서 나타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춘향전이 한창 읽혔을 18세기를 지나 19세기에 들어서서 런던에서도 가시적인 인간 해방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1880년대 세계에 미치는 영국의 힘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영국의 힘과 자존심을 투영한 대 역사(役事)였을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타국의 왕을 투옥시킬 만큼 오만했던 그들의 역사(歷史)를 생각하면, 자신의 부인을 처형할 만큼 지독했을 헨리 8세의 폭정을 생각하면, 반드시 인간 해방이라는 인도적인 다리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영국인들이나 런던 시민이 해군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던 당시의 향수에 젖어 있다면, 그것 또한 헛된 자존심이 아닐까 한다. 이 다리 위에서 그것을 비웃듯이 다른 민족의 웃음소리가 밤을 새우는데 말이다.
우리는 다리 아래서 깊어가는 런던의 밤을 바라보면서 이국의 정취에 젖어 돌아갈 줄을 몰랐다.
타워브리지에서 바라본 템즈강의 야경
(2006.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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