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7.26.
런던에서의 첫 아침이 밝았다. 아침 공기가 시원하다. 친구와 나는 이미 아침잠이 없는 나이가 된 탓도 있고, 시차에 적응하지 못하는 탓도 있고 해서 일찍 잠에서 깨었다. 밖으로 나갔다. 거리는 참으로 깨끗하다. 깨끗한 거리에 자동차들은 미끄러지듯 소리도 없이 질주한다. 사람들은 소박한 복장으로 커다란 가방을 메고 일터로 나간다. 우리는 거리를 조금 거닐었다. 도시라고는 하지만 어느 부유한 시골길처럼 조용하고 공기가 맑다. 집집마다 아주 작은 정원에 꽃을 가꾸고, 정원이 없으면 창가의 화분에 최대한 화려하게 꽃을 가꾸었다. 마치 전제주의 시대에 누구의 지시라도 받은 듯 정원과 화분의 모양이 통일되어 있다.
출근 시간이 지나면 전철 요금이 대폭 내린다는 아들의 말을 듣고, 우리는 9시 30분이 넘기를 기다리기 위해 택시를 타고 주변의 윔블던 파크로 향했다. 택시 기사는 나이가 지긋했지만, 아주 친절하게 윔블던 파크의 테니스장 주변에 우리를 내려 주면서 "Good bye"하며 덥수룩한 수염에 숨어있는 하얀 이를 드러내었다. 검은 색 모자 모양이기 때문에 블랙 캡(black cab)이라 불리는 택시는 중국 곡부에서 본 마차처럼 고전적인 모습이었다. 지금은 붉은색이나 노란 색, 또는 아름다운 무늬로 틔어 보이는 것도 있으나, 전통적인 자동차 모양으로 통일되어 있어서 멀리서 보아도 택시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운전석과 승객이 타는 자리가 투명 유리로 분리 되어 있었다. 물론 조수석에는 승객이 탈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클래식한 모습의 런던의 택시
나보다 테니스에 흥미가 많은 아내는 마치 테니스의 성지에라도 온 듯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그런 어머니의 속내를 아들은 충분히 짐작하고 있는 듯 했다. 아직 개장할 시간이 되지 않아서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밖에서 보이는 테니스장은 TV에서나 보던 그대로였다. 아내는 아마 그런 코트에서 샤라포바 선수처럼 멋지게 뛰는 것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정문에서 한 발도 들여 놓지 못하게 철저하게 가로 막고 있는 일꾼들은 개장을 준비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는 그냥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돌아 나오는 길에 윔불던 파크(Wembledon park)에 들렀다. 우리의 공원과는 다르다. 우리의 공원에는 좁은 공간에 자꾸 어떤 구조물을 만들어 넣으려고 하는데 여긴 그냥 너른 잔디밭이다. 양탄자처럼 포근한 잔디가 있고, 드문드문 그늘 지울 나무가 있고, 호수가 있고, 호수가 없으면 분수가 있으며, 햇볕을 쬘 수 있는 의자가 놓여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지나면 비둘기가 날아든다. 이것이 런던의 공원이다. 윔불던 파크는 아주 소박하고 자그마한 잔디밭이었다. 조깅할 수 있는 포장길과. 잔디가 깔려 있어서 어른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테니스 라켓을 잡고 공을 치는 법을 가르칠 수 있는 소박한 공원이다. 나중에 가 본 하이드 파크(Hyde park)처럼 광활한 공원은 아니었다.
윔불던 파크를 돌아 전철역으로 가면서 공원 같은 공간에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 있는 주택들을 보았다. 주택은 정원이라고 할 수 있는 작은 공원이 품고 있었다. 마치 동화 속의 왕자와 공주가 그곳에 숨어 살고 있을 것 같은 소박하고 예쁜 집이다. 야트막한 울타리와 좁은 출입문, 파릇한 잔디밭, 그 옆에 세워진 소형의 자동차, 손바닥 같이 작은 정원에 심겨진 화초, 창을 뒤덮은 장미 덩굴이 어린이가 그린 한 폭의 그림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결코 화려하거나 사치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작지만 갖출 것을 다 갖추고 현실에 안주하면서 상승의 욕구를 접고 사는 영국인들의 소박한 행복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윔불던 파크의 너른 잔디밭
주택은 홀로 서 있지만, 이웃과 벽을 공유하고 있었다. 공존하면서 개성을 보장하는, 다시 말하면 ‘함께 살아가면서 다르게 사는’ 평소 그들의 생활 철학이 이러한 주거 공간의 모습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전철을 타고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영국 정치의 본산인 국회의사당이었다. 출입은 금지되었지만 거리에서 아주 가까이에 있어서 그들의 정치가 예로부터 민중 가까이에 있음을 말해 주는 듯했다. 고대의 정치치고 완전한 민주주의를 이룬 나라가 몇이나 될까. 민주 정신에 입각한 정치를 했다 해도 대개는 허울뿐이 아니던가? 영국의 국회의사당도 그런 것을 대변하는 것인가? 장엄하고 고전적인 고딕 양식의 건축이었지만, 우선 보기에 아주 가깝게 보였다.
거리에서 백성이 다가와 “아야!”하고 비명을 지르면 허연 수염이 덥수룩한 상원의원이 뛰어 나와 “어디가 얼마나 아프신가요?”하고 어루만져 줄 것만 같아서 부러웠다. 그것은 장엄하고 고전적이며 뾰족한 이 건물의 상징인 시계탑(Bigben)의 위압적인 모습과는 다른 것이었다. 정문을 지키고 있는 경찰관이나 주변 사람들은 매우 친절했다.
웨스트민스트사원에 찾았다. 웨스트민스트사원은 대리석으로 장엄하게 지어진 건물이고 스테인드글라스가 우리의 눈을 놀라게 한다. 웨스트민스트사원은 오랜 기간 동안 변모되어 다양한 건축 양식이 공존하는 듯했다. 영국인들은 이 사원에서 왕실의 관혼상제의 모든 행사가 이루어지므로 더 경건하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특히 별로 정제되지 않은 삶을 살았으면서도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장례식이 이곳에서 치러졌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는 T.S. Eliot, 찰스 디킨스 등 유명 인사들의 묘가 가득하다고 한다. 내부 관람이 하고 싶었으나 너무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어서 바로 옆의 작은 성당만 돌아 나왔다. 기독교 신도가 아니면서도 가슴은 점점 엄숙해진다. 아마도 성인들의 관이 거기에 묻혔기 때문일 것이다.
웨스트민스트 사원
웨스스민스트 사원을 나온 우리는 국회의사당을 지나 내셔널갤러리, 트라팔가광장을 돌아 더몰(The Mall)이라는 거리를 지나 왼쪽으로 센트로제임스 공원을 바라보며 정신없이 버킹검 궁전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가는 길에 트라팔가 광장에서 수많은 비둘기와 넬슨 제독을 동상을 보았다. 그러나 오래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근위병 교대식이 11시 30분에 있다고 해서였다. 햇볕은 말할 수 없이 따갑다. 영국에는 구름 낀 날이 많다하더니 그 말도 헛말인가 보다. 많은 사람들이 광장 같이 넓고 푸른 길을 걸었다. 주변의 잔디가 싱그럽고 특히 도로변의 화단을 정말로 깨끗하고 아름답게 가꾸어졌다.
버킹검 궁 앞에 도착하니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이 멋진 퍼레이드를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사람들 중에는 영국인들도 많았다. 그들은 매일 이 퍼레이드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우리처럼 우리 것을 버려두고 남의 것을 추종하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특히 아랍인들이 많았다. 중국인, 일본인들도 많다. 흑인들이 관광하는 모습도 이채롭다. 한국인이 아주 많다. 이역에서 겨레를 만나는 것이 반갑다. 한국인 특유의 목소리를 들으면 한국의 거리로 착각이 될 정도였다.
이윽고 행진곡과 함께 병사들의 퍼레이드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의상이 과거 그대로인지 현재로 넘어 오면서 조금씩 변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복장과 음악이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교대식은 장엄하고 품위 있게 진행되었다. 근위병들은 이곳으로 오면서 보이는 근위병 숙소에서 준비하고 있다가 이곳으로 행진하여 온다고 한다.
우리에게도 근위병 교대식이 있었다. 우리의 교대식이 영국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는 황제가 존재하지 않는 근위병의 교대식이란 점이다. 그리고 단절되었던 문화의 복원이라는 부끄러움이다. 허울만 있고 알맹이가 없는 하나의 연출이라는 것이 참으로 마음 아프다.
버킹검궁의 근위병 근무 교대식
대영박물관은 건물부터 웅장하였다. 대영박물관은 문자 그대로 대영박물관이었다. 왜냐하면 영국의 문화유산보다는 이집트, 그리스 등 각국의 유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집트의 고대 문화유산은 모두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박물관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 이집트관을 돌아보고 나면, 사실 대영 박물관은 영국의 박물관이라기보다 이집트의 박물관이라는 생각이 더 들 정도로 이집트의 수많은 유물이 이역만리로 잡혀와 있었다.
이집트관에서 내가 가장 관심 있게 본 것은 로제타석이다. 세계의 문자를 공부하면서 세계 최초의 비문이라 할 수 있는, 아니 현전하는 최고(最古)의 비문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로제타석에 대하여 참으로 의미 있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 로제타석은 1799년 나폴레옹 군대가 이집트를 침략했을 때, 한 폭파반원이 해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나일강의 지류에서 발견했다. 부대장은 이 돌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즉시 카이로로 옮겼다고 한다. 그런데 이 로제타석을 영국군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프랑스가 알렉산드리아로 옮겼으나, 곧 영국의 수중으로 들어가서 대영 박물관에 전시되게 되었다고 한다.
로제타석은 이듬해 탁본이 되어 유럽의 언어학자들에게 배포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글의 해독이 시작되었는데, 맨 아래에는 그리스 문자, 맨 위에는 심하게 손상된 이집트 상형문자, 중간에는 서민들이 사용하는 상형문자의 초서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그리스어를 토대로 이 문자는 해독되었다. 그래서 기원전 196년 프톨레마이우스 5세 에피파네스 왕 즉위 1주년을 기념하여 멤피스에서 통과된 법령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이집트어가 아닌 그리스어로 기록된 사실이다. 그것은 당시의 이집트 지배자는 알렉산더 대왕 휘하에 있던 한 장군의 후손이 마케도니아 인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앤드류 로빈슨 지음, 박재욱 옮김, 문자이야기. 사계절.2003)
2000여년전의 문자석인 로제타 석
이 문자는 1300여년 만에 햇빛을 본 것이다. 나는 2000여 년 전의 신비로운 작은 돌 앞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자잘한 글씨로 가득한 가로 두자, 세로 석자 정도 되는 이 검은 돌덩이의 신비는 내 가슴을 치고도 남았다. 우리나라의 울산 반구대 암각화라든지, 고령 양전동 암각화 같은 것들도 문자의 기원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런 소중한 유산이 아직 이 나라 산천에 있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신전까지 뜯어다 박물간에 설치하는 영국인들에게 발견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아직 완전하게 해독되지는 못했지만, 울산 반구대 암각화의 신비스러움도 무시할 수 없다.
이집트 관에는 다른 수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집트 문화의 자랑인 상형문자를 새긴 비석, 바위, 람세스 2세의 석상, 석관, 목관, 옹관 등이 전시되어 있다. 심지어 신전을 통재로 들어다 전시하기도 했다. 이렇게 이집트의 소중한 문화재는 지금 영국의 박물관에서 세계인의 이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집트인은 제 나라의 문화재를 보기 위하여 외화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실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영박물관은 인류문화의 보고라기 이전에 해적이 조상인 영국인들의 약탈 문화를 전시한 약탈관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지독한 약탈의 역사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집트 상형 문자는 문자를 새긴 건물의 외벽을 그대로 뜯어다 전시했고, 암각화나 암각 문자는 바위를 통째로 들어나 놓았다. 그리스관에는 그리스 신전을 뜯어다 설치했다. 유신론자들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로마관에 전시된 파르테논 신전의 일부
더욱 끔찍스러운 것은 이집트의 죽음에 관한 전시실이었다. 이곳에서는 영국인들의 야만적 생사관(生死觀)을 엿볼 수 있었다. 관(棺)의 전시는 물론이고 미라가 들어 있는 관을 그대로 유리관에 넣어 전시되어 있다. 미라는 입관전의 염습의를 거치는 모습대로 풀어헤쳐서 전시되기도 했고, 뼈와 해골을 그대로 전시하거나 입관된 미라는 방사선 촬영을 해서 사진과 함께 전시했다. 한 술 더 뜨는 것은 오징어를 말린 것처럼 말라비틀어진 미라를 엎드린 채 그대로 전시하기도 했다.
자신의 일상용품인 듯한 유물과 함께 전시된 미라의 끔찍한 모습
미라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관의 웅장함이나 정교함으로 보아서 분명 천민은 아닐 것이다. 아니 천민이라 하더라도 그 누구의 죽음도 경건하고 엄숙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왕이든 귀족이든 천민이든, 어른이든 아이든, 여자이든 남자이든 그들의 주검을 이렇게까지 짓밟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죽음에 대하여 거룩하고 엄숙하게 대하는 우리 겨레의 사고로는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주검이 무슨 문화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죽음이란 다만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신의 부름에 기꺼이 화답하는 거룩한 일상이 아닌가? 그것이 문화의 유산이 된다 하더라도 이렇게 만인 앞에 공개할 수 있는 일인가? 권력도 부도 명예도 사실은 죽음 앞에 평등하다. 우월한 종족의 죽음은 거룩하고 그렇지 못한 종족의 죽음이라고 짓밟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남의 죽음을 짓밟고 있는 영국인들은 자신의 죽음은 꽃을 던지며 애도하고 있다. 하이드파크(Hyde park)에는 다이애나 항태자비의 죽음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분수를 만들어 놓고 있다. 수많은 영국인들은 그 젊고 자유분방했던 황태자비의 죽음을 애도하고 추모하고 있다. 그들도 황태자비가 황실 타락의 제물이라는 사실을 속으로는 인정하고 있는 모양이다. 런던의 많은 공원에는 이러한 스스로의 죽음을 추모하는 비와 석상과 같은 구조물들이 있다. 이처럼 대영박물관에 끌려와 전시된 주검들도 알고보면 이집트인들에게 성인으로 추앙 받고 있는 사람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웨스트민스트사원의 바닥에나 벽에 새겨진 명사들의 죽음을 추모하는 글, 성스럽게 간직하는 성지에 묻힌 그들의 관이 언젠가 이집트인들의 손에 의해 파헤쳐질지 모를 일이다.
다이애나황태지비를 추모하는 분수(두 가지 다른 물길이 한 곳에서 만나게 되어 있다)
약소국가나 약소민족은 본래부터 약함을 타고 태어난 것은 아니다. 당시의 지도자가 어떤 생각으로 존재하느냐에 따라 약과 강의 선택을 가져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문화유산인 직지심체요절도 딴 나라가 가지고 있고, 우리가 그렇게 자랑하는 최초의 소설 금오신화도 일본에 있다. 그 밖에 내가 아는 많은 소설 책자 류가 프랑스, 일본, 영국, 미국에 가 있다. 훈민정음 원본이 국내에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한국관에도 우리의 불경과 신라 왕릉의 금귀고리 등이 전시되어 있다고 하나, 그 밖의 이집트 그리스 문화재를 보면서 너무나도 치가 떨려서 갈 수가 없었다.
다른 70여개나 되는 방을 종일 돌아보면서, 그들의 행위가 문화의 보존에 대한 영국인들에 대한 소명 의식으로 공감하기 어려웠다. 인류 문화유산의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거대함 보다는 약탈과 피탈이라는 측면에서의 역사를 더 생각하게 한 것은 나의 얇은 지식 탓만은 아닐 것이다. 문화유산은 제 자리에 보관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영국이 자신들이 아니면 훼손되었을지 모른다고 변명할 수도 있다. 그렇게 문화유산을 소중하게 생각했다면 강대국의 아량으로 제 나라에 보존될 수 있도록 조치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인류 문화 유산의 보존이라는 생각보다 오히려 제국주의자가 과시하고 싶었던 침략성과 강대한 힘의 크기가 아닌가 의심받기에 충분하다.
마지막으로 고서를 보관하고 도서관에 들렀으나 우울한 마음을 달랠 수 없었다. 정원에는 꽃을 가꾸고 공원을 사랑하면서 현실적 삶을 고귀하게 생각하는 영국인들이 이민족의 죽음에 대한 야만적인 의식과 이민족의 문화에 대한 약탈 본능을 확인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2006. 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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