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축 읽는 아이(나)

쓰다 남은 돌멩이처럼

느림보 이방주 2000. 11. 18. 23:39
내가 좋아하는 친구 중에 여석(餘石)이라는 사람이 있다. 여석이라 하면 그의 인품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마음 씀씀이가 쓰다 내던진 돌멩이 같아서 어느 친구인지 먼저 그렇게 불렀는데 다들 따라 부르게 되었고, 본인도 좋아해서 이제는 아호(雅號)가 되었다.
餘石이 餘石으로 불려진 까닭은 많지만 하나만 든다면, 우선 그 마음의 넉넉함이다. 그와 한 학교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아주 신설학교는 아니지만, 학교를 이주하여 규모가 갑자기 커지고, 고요하던 여학교를 남녀 공학으로 개편하여 여학생들만 가르치던 우리는 여러 가지로 당황하고 있었다. 이슬만 받아먹고 사는 것 같이 순결한 여학생들과 지내던 우리 눈으로는 오랑캐 같은 사내들이 몰려 왔으니 생활지도의 한계가 어디인가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그 때 1,2학년만 있던 남자애들이 우리를 가장 황당하게 한 것은 실내화를 네것 내것 구분하지 않고 신어 가는 삐뚤어진 동포의식이다. 이놈들의 동포의식은 울도 담도 없어서 제 친구의 것이나, 선배 여학생의 것이나 구분이 없었다. 거기다 스승의 신발도 거리낌없이 신어가서 스승의 짚신을 가슴에 품어 따뜻하게 했다는 옛 제자 이야기를 욕보였다.
내 실내화도 수난의 대상이 되었다. 출근해서 내 이름이 굵고 진하게 쓰여있는 신발장의 문을 열고 보면, 실내화가 없어졌다. 한 두 번은 그러려니 하고 내빈용으로 하루를 견디고 퇴근길에 새로 사곤 했지만, 되풀이되자 욕이 저절로 나왔다.
한번은 출근길에 여석과 현관에서 만났다. 다행히 내 실내화는 밤새 안녕이었다. 그런데 여석의 신발이 없어졌다. 그의 발은 나보다 표준형이라 더 자주 수난을 당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를 위로하는 마음으로 버릇없는 아이들을 향해서 욕을 퍼부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아주 태연하게
"이 놈들이 또 내 신을 대신 신어갔네. 이 놈들이 아주 도통한 놈들이여. 이승에 있는 물건이 임자 없다는 걸 벌써 터득했으니, 오늘은 또 이 도사들한테 뭘 가르치나?"
나는 얼굴이 화끈했다. 우리가 잘못 가르친 아이들, 그건 우리 책임이라는 말인가? 인간의 본성이 숨김없이 드러난 것인데 무얼 욕하는가? 라는 답답함의 표출인가? 그는 아마 이승의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일시적인 보관자일 뿐이라는 진리를 이미 터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때만큼 내 자신이 작게 보인 적도 드물다.

시골 학교에 근무하다 고향인 청주로 오게 된 것은 88 올림픽이 있던 해 9월이다. 용하게도 청주여고에 발령을 받아 2학년 수업을 맡았는데, 한 학급에 들어가 이름을 죽 한 번 불렀는데 神躬이라는 김수녕이 그 반에 있었다. 물론 그 때는 서울 올림픽이 한창 계속되던 때라 이름만 있어서 아쉬웠다. 그는 우리 나라 최초의 올림픽 2관왕이 되어 학생들이나 선생들의 환영을 받으며 학교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 환영식에서 그가 읽을 '답사'를 써주는 임무를 맡았는데, 나는 그와 한번도 대화를 나누어 본적도 없고, 얼굴조차 본 일도 없어서 의례적인 말로 한 장을 채웠다. 단상에서 그를 처음 만나 원고를 주면서 한 번 읽어보고 좋은 말을 덧붙여 이야기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렇게 하고도 '운동이나 한 여고 2학년이 무슨 덧붙일 말이 있을까'하고 그의 연설을 기다렸다. 그런데 원고를 들고 읽으면서 어른들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신의 말을 섞어 쉼 없이 유창하게 연설을 마치는 것이 아닌가? 그 후에 동료들로부터 '어떻게 수녕이 생각을 그렇게 꼭 집어 써 주었느냐'는 칭찬을 들었지만 나는 그 때마다 부끄러웠다.
그 이듬해 나는 3학년을 담임하게 되었는데, 그는 프랑스 무슨 세계 양궁대회에 나가 여섯 종목을 휩쓸어 6관왕이 되어 돌아왔다. 3학년인 그가 선수촌에서 휴가를 받아 3학년 담임들의 방인 진학지도실에 인사를 왔을 때는 생글생글 웃으며 얼굴을 붉히는 열 아홉 소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너무나 차갑게 느껴지던 TV에 비친 활 쏘는 모습과 대조적이라 생각되어 그에게 물어 보았다.
"선생님, 저는 시위를 떠난 화살은 그냥 잊어버려요."
그냥 지나는 말처럼 그렇게 자신의 道를 이야기한다. 또 그렇게 생글생글 웃으면서. 올림픽 환영회 때의 일이 생각났다. 활쏘기도 결국 혼자 해야 하는 운동이다. 그는 혼자서 시위를 당기는 고독을 이겨내면서 이런 道를 터득한 것이리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한 성현의 말이 생각났지만, 道를 귀로만 들었지 가슴으로 듣지 못하는 내가 안타깝다. 과연 나의 시위를 떠난 화살은 쉽게 잊어버릴 수 있는 것들이었나. 자신이 없다. 나는 담배를 한 대 물고 유리창 밖을 내다보았다. 뒷모습이 참으로 부끄러웠다.

바로 지난해 어느 토요일의 일이다. 나는 연가를 내고 한국 수필 신인상 시상식에 참석하고 열 한시가 돌아왔다. 그런데 한 담임 선생님이 자기반의 학생이 오토바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전해왔다. 학생부장인 나는 교감, 교장 선생님께 보고를 했다. 한밤중에 이런 보고를 드리는 일이 참으로 죄송했다. 더구나 교감선생님은 부임한지 일주일밖에 안되었기에 더욱 그랬다.
서둘러 영안실에 가보았다. 어머니가 넋을 잃고 있다. 그 어머니가 후회인 듯 푸념인 듯 하소연하는 말을 듣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학교 일과가 끝나고 집에 가서 어머니 일을 도와주다가 읍내에 심부름을 가다가 어둠 속에서 주차된 차를 발견하지 못하고 추돌했다는 것이다. 담임 선생님을 비롯한 우리 학생부 선생들은 너무나 황당해서 어쩔 줄 몰랐고 차도 없이 달려오신 교장 선생님은 자구 이마만 쓰다듬었다. 좀 정신이 들자 교감 선생님은 망자의 형을 데리고 사무실로 가고, 우리는 부모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까해서 자꾸 죽은 아이를 원망했다. '오토바이 타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듣지 않고…….' 어쩌고 하면서
한참 후 교장 선생님을 모시고 사무실에 가보았다. 교감 선생님은 사고 경위를 다 조사해 놓고 보고서를 작성하고 계셨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해 놓아서 다시 한 번 미안스러웠다. 거기에서 우리는 그 아버지와 만났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키가 큰 그는 하얀 얼굴에 주름이 가득했다. 교장 선생님은 그 학부모를 부둥켜안았다.
"제가 자식을 잘못 가르쳐서 교장선생님 심려를 끼치고 학교에 누를 끼쳐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원 당치않은 말씀입니다. 아, 젊은 사람이 이렇게 억울하게 갔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부끄러워서 어디 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속물이 아니었던가. 이 사고로 생활지도를 잘못했다고 불똥이라도 튈까 걱정했던, 그리고 경과를 듣고 안도의 숨을 쉬었던 나는 정말로 속물이었다.
머리 허연 그 아버지와 손을 잡은 교장 선생님은 자꾸만 천장을 쳐다본다. 교원 정년 단축으로 2년을 앞당겨 이제 퇴직을 앞둔 老校長은 당신의 신상 문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한 젊은이의 억울한 죽음 슬퍼하는 모든 청년의 어버이가 되어 있었다.

어찌할 수 없이 이렇게 속되고 이기적인 천성. 몇 분만 지나면 '나는 정말로 아직도 나이 값을 못하는구나, 속물을 벗어날 수 없구나' 하고 반드시 후회하게 만드는 이들, 나는 이런 이들이 부럽다.
(1999.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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