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축 읽는 아이(나)

단발머리 3

느림보 이방주 2001. 6. 1. 13:58
초등학교 친구들이 만나는 날은 어린날 시집간 누나 오는 날처럼 엷은 흥분이 일어난다. 나는 시간을 잘 몰라서 30 분쯤 늦게 도착했다. 어느 모임이나 늦게 참석한 사람이 환영을 받듯 나도 그렇게 다 모인 다른 친구들의 환영을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뜻밖에 여자들이 있었다. 그 중에 노여사가 눈에 띄어 동부인이 아니라 여자 동창들이 참석한 것을 눈치챘다. 처가의 먼 친척 며느리가 되어 한두 번 만난 적이 있는 노여사 외에 아무도 알아 볼 수 없었다. 그 중에 그런데 머리를 길게 늘인 한 여인이
"오늘을 기다려 가슴이 설레어 어젯밤에는 잠도 못 잤는데 몰라보다니……" 하고 푸념을 하였다. 여자들을 포함한 우리들은 그 농에 기분 좋게 웃으며 한잔씩 새로운 건배를 해도 그를 알 수 없었다.

친구들의 설명을 듣고야 그가 바로 그 '단발머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 단발머리는 아니었지만 그 때의 청초한 얼굴을 잃지 않고 있었다. 눈은 아직도 검고 얼굴은 그 때처럼 희었다. 긴 머리가 코트 깃에 닿았고 옅은 화장으로도 깨끗한 그의 얼굴이 바로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이 나이에도 그의 옆자리로 옮기는데 용기가 필요했다.

내가 그 단발머리를 만난 것은 초등학교 1학년 입학하는 날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날, 나는 서울 아이들이나 입는 빨간색 골덴 양복을 입고 학교에 갔다. 서울에 계시던 아버지께서 큰 누님의 결혼식 빔으로 사오신 옷이었다. 자주색 빛이 나는 진한 빨간색에 거뭇거뭇 덩굴 무늬가 있는 한 벌이다. 정말로 그 당시에 시골에서는 구경도 못하는 옷이었다. 까까머리를 요즘 아이들이 쓰는 차양 없는 모자로 감추기만 했어도 서울 거리에서나 볼 수 있었던 어린이였을 것이다. 그래서 당당하게 학교에 갔다.

사촌형을 따라 십리를 걸어 들뜬 마음으로 도착한 학교에는 온통 검은 양복을 입은 아이들뿐이었다. 혹 한복을 입고 온 아이들도 있었지만, 사내아이들은 검은 양복에 흰 깃을 동그랗게 달고 가슴에 수건을 매달았고, 계집아이들도 검정 바지에 반코트처럼 생긴 검정색 저고리에 흰 깃을 달아 입은 아이들이었다.

맨 끝자리에 쭈빗쭈빗 서 있는 나에게 아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궁금한 것은 남자가 여자 옷을 입은 것인지, 여자가 까까머리를 한 것인지였을 것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창피스러웠지만, 당당하게 서 있었다.

거기 빙 둘러선 아이들 중에 그 단발머리가 있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그렇게 검은 색 교복을 입었지만, 칼라가 작은누나의 그것보다 유난히 희고 빳빳하게 서 있었다. 머리는 검고 유난히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남자인 것을 확인한 아이들이 물러가자 우리는 다시 선생님 구령에 맞추어 섰다.

이튿날부터 나는 빨간 골덴 양복은 동네에서만 입었다. 단발머리는 학교 바로 뒤 마을 한 가운데 고래등같은 기와집에 사는 아이였다. 단발머리는 처음 볼 때처럼 변함없이 깨끗해서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나도 검은 색 양복에 누나가 하얀 칼라를 풀을 먹여 세워 주었지만, 그 애 앞에서만은 이상하게 주눅이 들었다. 단발머리가 깨끗하고 윤이 나서인지, 아니면 까만 눈과 하얀 얼굴과 빳빳한 칼라 때문인지 모를 일이었다.

열 아홉 살 예쁜 우리 선생님은 단발머리뿐만 아니라, 일곱 형 누나들에게 입학 전 교육을 경쟁적으로 받아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앞서는 나도 많이 귀여워 해 주셨다. 그런 선생님의 사랑 때문에 나는 점점 학교에서 당당해지고 잘난 체하기도 하고 무용 시간 같은 때는 기회를 보아 단발머리와 짝을 맞추었다.

4학년이 되어서 단발머리가 우리 면에 면장님의 따님이라는 것을 알고 부반장이 되었는데도 주눅이 더 들었다. 담임선생님은 한결같이 여선생님이셨는데, 노래를 좋아하셔서 우리에게 교과서 밖의 노래도 많이 가르쳐 주셨다. 그 때 교내 독창대회가 있었는데, 선생님이 아침마다 내게 노래 연습을 시키셨다.

아침에 학교가면 내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단발머리가 아침 자습 문제를 칠판에 내었다. 글씨를 참으로 예쁘게 써서 아이들이 무척 부러워하였다. 노래연습을 마치고 단발머리가 써놓은 문제를 푸는 것이 참으로 재미있고 즐거웠다.

우리는 5학년 때도 같은 반이 되었다. 나는 반장이 되었다. 5학년 때 선생님은 직접 가르치는 일보다 아이들을 시키는 일을 좋아하셨다. 아이들에게 한 교과씩 맡겨서 서로 가르치게 했다. 참으로 오늘날 유행하는 열린교육을 위하여 최초로 날린 화살이었다. 단발머리는 사회, 자연 같은 것을 칠판에 적어 주고 아이들이 베끼고 외우게 했다.

공부가 끝나면, 둘이서 남아 아이들 나머지 공부를 시켰다. 해가 서산에 염소 턱 수염만큼 남았을 때 돌아오는 길은 한 15분쯤 같은 방향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마디 말도 못하고 한 5∼6 미터쯤 떨어져 걸었다.

그 때, 나는 몸이 극도로 약해져서 결석이 잦았다. 악성 빈혈증이 생겨 등교 길에 쓸어져 되돌아오는 날도 많았다. 한 때 편도선염이 심해서 말을 제대로 못하는 때도 선생님은 변함없이 아이들 공부를 시키도록 했다. 그 때 하필 교내 독창대회가 있었다. 노래라고는 '깊은 산 속 옹달샘'밖에 안 가르치신 선생님은 말도 제대로 못하는 나보고 독창대회에 반의 대표로 나가라고 우겼다. 그 때만은 끝까지 버텼는데, 어느날 아침, 여자아이들 셋이서 내게 와서 달걀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단발머리도 있었다. 달걀을 먹으면 목이 나을 테니 이걸 먹고 독창대회에 나가 달라는 것이다. 나는 대답을 못했다. 그리고 끝내 독창 대회에 나가지 못했다.

6학년 때는 우리 반이 반으로 쪼개져 나는 1반으로, 단발머리는 2반으로 갈라서게 되었다. 반장이던 나는 부반장이 되었다. 나는 종종 2반을 기웃거렸다. 단발머리는 언제나 못 본 체 하였다.

중학교에 가서 나는 단발머리를 잊고 산 것 같다. 우선 내가 다닌 학교가 단발머리에게 떳떳하게 내세울만하지 못했다.

비맞아 쓰러진 수숫대처럼 좌절했던 고등학교 1학년 시절 갑자기 단발머리가 생각났다. 어느 일요일 동네 친구를 꾀어서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가보자고 했다. 우리는 다니던 옛길을 걸어 그녀의 고래등같은 집을 바라보며 공연히 배회했다.

그후에 딱 한 번 단발머리를 스쳐 지난 적이 있었다. 물론 그 때는 세련된 교복과 자주색 가방을 들고 양갈래로 머리를 땋아 내린 여고생이었다. 나는 가슴이 뛰었지만 그냥 스쳐 지나갔다. 그 뒤부터 단발머리는 내 머리를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대학에 가서도 선생이 되어서도 나는 그를 잊을 수가 없었다.

선생이 되었을 때, 그는 어느 학교 양호교사가 되어 있었다. 그 학교의 연구 발표 때 참석하였을 때도 먼발치서 바라보기만 하고 말을 건네지 못하였다. 나는 왜 그리 바보가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나이를 먹었다. 우리 아이들도 이미 사춘기를 지나버린 나이가 되었다. 우리는 서로 비슷한 나이의 자식들의 일을 함께 걱정하고, 자연스럽게 그들의 장래를 화제로 삼았다. 친구를 만나 과거의 애틋함보다 먼저 생활을 걱정하며, 그 때 우리의 아버지보다 더 많은 우리의 나이를 확인한 것이다.
(1999.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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