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에 절에 들렀다. 청아한 목탁소리가 정적을 울린다. 뜰에 서 있는 보리수 잎이 떨리는 듯하다. 잦은 비로 골짜기 물소리도 제법 화음을 이룬다.
골목을 나서 대로에 이르면 수많은 자동차의 질주 속에 끼어야 한다. 그 북새통을 지나 동부우회도로와 교차로를 훌쩍 넘으면 금방 자연 속으로 빠져든다. 포도밭 사이로 잘 지은 전원주택이 지상의 낙원처럼 아름답다. 용박골을 들어서면 포도밭은 더 많아진다. 꼬불꼬불 좁고 비탈진 길을 간신히 달리면 보살사 주차장에 차를 세울 수가 있다. 서방에 이르는 길은 멀고도 험한 것 같지만 아름다운 포도원을 거쳐 갈 수 있어서 좋다. 도심에서 시오리 길, 여기에 이런 고요가 있다는 것이 말할 수 없이 은혜롭다.
극락보전에서 거룩한 부처님을 바라보며 삼배를 올린다. 나의 신앙은 고작 삼배일 뿐이다. 탑돌이도 삼성각 참배도 할 줄 모른다. 삼배의 순간만이라도 진정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돌아 나오는 가슴을 쓰다듬어 본다.
나는 불교의 교리를 전혀 모른다. 그런데 나의 신앙과의 인연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내가 보살사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개구쟁이 마음으로 학교에서 이십 리도 더 되는 산골짜기에 있는 고찰을 걸어서 가는 길이 꽤나 짜증스러웠을 텐데도 그렇게 멀미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가서 봐도 다른 절과 별다른 것이 없듯이, 그 때도 고찰이라는 것 외에 별다른 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어린 나이에도 진한 감동을 받았던 것 같다.
그 후에도 다른 사찰을 방문할 때면 늘 보살사와 비교하게 되었다. 그 때마다 관광 이외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법주사도 그랬고, 불국사도 그랬으며, 석굴암을 갔을 때도 그랬다. 나는 늘 보살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보살사가 사찰을 보는 관점의 기준이 되었다.
성장하여 결혼을 할 때까지도 나의 신앙심은 그렇게 튼실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사찰 얘기가 나오면 보살사를 잊지 않았다. 결혼을 하고 보살사가 생각나서 아내와 함께 옛날을 생각하며 걸어서 찾아갔다. 용암동 버스 종점이 지금의 청석고등학교 부근 어디쯤이었는데 걸어서 가기에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아내는 구두를 신고 나선 길이라 발에 물집까지 잡혀서 괴로워했다.
마침 주지 스님 한 분만 계시고 경내는 고요하기만 했다. 스님은 우리를 보시고 이 절과 인연이 있는 것 같다고 아는 듯한 말씀을 하셨다. 우리 내외는 스님께서 손수 우려내신 녹차를 대접 받았다.
“두 분이 참으로 천생 연분이시네. 약혼하실 건가, 결혼하실 건가?”
하고 물으시는 스님께 우리는 이미 부부임을 말씀드렸다. 스님께서는 아주 잘한 일이라며 아들도 낳고 매우 착하게 살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不忘言’이라는 계율을 생각했어도 스님께서 으레 하시는 말씀이려니 생각했다. 그래도 우리는 기분이 좋았다. 그 때 아내는 불교와 큰 인연이 없어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착하게 살 사람들이란 말에 기분이 괜찮은 모양이었다.
그 후 우리는 ‘착하게 살 사람들’이란 말을 잊지 않으며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살게 되었다. ‘착하게 살 사람들’이란 말씀이 우리 내외가 지켜야 할 규범이 된 것이다. 임지가 바뀌어 몇 해 동안 객지를 돌다가 고향에 자리를 잡게 되면서 다시 보살사를 찾게 되고 아예 신도가 되었다. 두 아이는 건강하고 착하게 성장하고 우리 내외도 이렇다 할 문제없이 살아온 것도 점점 깊어가는 믿음의 덕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한번은 아버지를 모시고 절에 가게 되었다. 유학자이시지만 불교에도 많은 관심이 있으셨다. 돌아오는 길에 옛날에 할머니께서 이 절에 기도하셔서 나를 낳게 되었다는 말씀을 해 주셨다.
“아들이 셋이나 되는데도 딸이 넷이라, 아들이 하나 부족하다고 전쟁 중인데도 내게 쌀 서 말을 지워 여기까지 와서 칠일 기도를 하고 곧 너를 갖게 되었지.”
이 말씀을 듣고 전에 스님께서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후 아내와 나는 수시로 보살사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믿음은 더욱 깊어졌다. 더구나 불교계에서 많은 존경을 받으시는 종산 스님이 부임하시고는 인연은 더욱 깊어졌다. 스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이 삶의 지남차가 되었다.
우란분절을 맞아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리울 때나, 아내의 눈치를 보아 빙부빙모님의 핑계를 대기도 하였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 대학입학원서 접수를 앞두고 날마다 수업이 없는 시간에 몰래 빠져나가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손과 입으로 지은 죄를 깨끗이 하고 원서에 손을 대기 위해서였다. 3학년주임교사라는 보직을 맡았을 때는 담임선생님들께 보살사 정화수만 드시게 하려고 노력했다. 날마다 물통을 가지고 산사에 가서 물을 길어 날랐다. 나는 우리 열 한 명의 교사들은 한 몸처럼 화합한 것이 정화수의 덕이라 믿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현실주의자였던 내가 내세(來世)에 대해서 확연하지는 않지만 믿음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연이란 말도 어느 정도 수긍하고 있는 터이다. 피나는 노력에 따라 운명의 가닥을 빨리 잡을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보살사와의 만남을 통해서 지혜의 생명을 얻었고, 신앙을 만났고, 내 삶이 지향해야 하는 십자성을 찾았으며, 인연 그 자체의 소중한 가치를 깨달았다. 나의 육신을 점지하고 영혼의 문을 열어준 보살사에는 오늘도 산새가 스님의 목탁 소리와 화음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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