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주도유와 사장 권명호군
공항에 마중나온 명호군은 알아볼 수 없었다. 나는 아내의 배낭을 빼앗아 두 개를 한꺼번에 메고 전화를 걸어 검은색 모자를 쓰고 배낭 두 개를 멘 사나이를 찾아오라고 했다. 명호군은 이내 달려 왔다. 사실 그쪽에서 나를 알아보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라는 내 판단이 맞았다. 내가 그를 초등학교 3학년 때의 귀여웠던 모습만 머리에 그리고 있었던 것은 큰 오산이었다. 역시 그가 나를 키크고 머리 숱많은 안경잡이 선생이라는 기억을 더듬는 것이 훨씬 나았다. 그는 이마가 약간 넓어진 사십대의 사업가로 변신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30년만의 해후라는 가슴벅찬 의식을 거행했다. 주변 사람들을 의식할 수 없을 만큼 우리는 흥분하고 감격했다. 오십대의 느긋함이나 사십대의 중후함은 이미 우리를 떠나 있었다 . 우리는 이미 스물 둘 초임교사이고 아홉살짜리 초등학교 삼학년으로 돌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도유 사장 권명호군은 내 교직의 최초의 제자이다. 첫아이인 셈이다. 처음 의풍학교에 부임했을 때 다른 애들보다 훨씬 어리고 애기 같았지만 눈망울은 훨씬 초롱초롱하고 똑똑하며 바깥 세상에 대한 질문이 많던 아이다. 명호군의 말에 의하면 청주대학교 관광경영학과 1회로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서 10여년간 관광회사를 경영했다고 한다. 그런 인연으로 제주도 관광가이드인 부인과 결혼하여 조천읍에 바다가 동그랗게 보이는 언덕에 팬션을 짓고 중년 이후의 삶을 설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산골 아이의 호기심이 그렇게 실현된 것이다.
제주도유에서 권명호 사장 내외와 함께 http://www.jejudoyu.com/ (064-784-3057)
제주도유는 멋진 삶을 설계하는 한 사나이의 낭만적인 삶의 보금자리다. 바다처럼 넓은 웃음을 가진 아내와 제 어릴 때보다 두배는 커다란 쌍둥이 사내와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그들의 삶의 보금자리다. 아침에 일어나 아이들과 바다를 바라보고, 잔디를 깔아 놓은 너른 마당에서 공을 차고 마당가에 매달아 놓은 농구 골대에 공을 집어 넣으며 '하하' 웃을 수 있는 그런 삶의 보금자리다.
제주도유(濟州陶遊)는 도자기 체험 학습을 하면서 삶을 즐기는 공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또 자신이 충청도 사람이므로 충청도 말로 '제주도유---'하는 의미도 담고 있다고 한다. 명호군의 어린 시절 장난기 어린 눈빛처럼 재미 있고 의미가 깊다. 그래서인지 반지하층에 전시실과 가마까지 갖춘 공방을 마련해 놓고 흙을 빚어 제법 고졸한 맛이나는 그릇을 구워 내는 넉넉함을 가진 삶이 사실 부러웠다. 전시실에 전시된 작품들이 도예에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수준급으로 보였다. 그저 보아서 아름답고 수수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면 그게 예술품이 아니겠는가? 명호군에게 도예에 어떤 예술적 주제가 있느가를 물어 보았다가 쓸데없는 질문이었다고 바로 후회하였다. 정원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아 자연과 어울려 그대로 예술이 된 그릇들이 그의 자유스러운 사고를 드러내고 있는데 말이다.
아름다운 정원(하르방과 귀여운 옹기가 어울린다)
그들 내외가 사는 팬션에는 담이 없다. 탁 트인 언덕 위에 덩그러니 얹혀 있고 어느 문이나 항상 열려 있었다. 명호군이나 그의 아내는 팬션을 관광 사업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은 않았다. 그들의 열려 있는 생각과 열려 있는 삶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있었다. 나도 그냥 거기에 취하고 한아름 나누어 받고 돌아온 느낌이다. 나는 그들의 그런 삶의 모습이 대견하고 흐믓했다. 제자들의 삶에서 세사에 찌든 내안을 씻어낸 기분이었다.
권사장의 작품들(뜰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마당에서 보이는 바다
고국에 돌아온 3년간 나를 찾으려고 교육청 홈페이지를 뒤졌다는 정성이 고맙다. 그리고 작년 5월 나와 전화 통화를 하고 감격해서 울었다는 그의 마음이 너무나 고맙다. 우리가 묵을 객실에 아내와 아이들까지 데리고 함께 올라와 흩어졌던 가족이 만난 것처럼 저 깊은 곳까지 들떠서 얘기하는 그의 상기된 얼굴이 고맙다. 아이들까지도 신기해서 귤을 한 바구니씩 내오는 가족들의 삶의 분위기가 고맙다.
2. 마라도
마라도, 거기에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그 섬에는 그냥 그리움만 가득 잡초가 되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그 섬에는 그냥 태초의 혼돈만이 검붉은 빛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배에서 내려 세상을 휩쓸어 갈 것 같은 바람을 맞으며 원두막 같은 뭍으로 올라섰을 때, 얼마되지도 않는 초원이 내게는 광막한 광야를 맞은 듯했다. 초원이 끝나는 지점에 푸른 바다가 있고 바다 위에는 양떼가 몰려오듯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초원, 바다, 그리고 파도
태초에 세상은 이렇게 아주 작으면서도 광막하게 느껴지는 광야로부터 창조되었는지도 모른다. 제주도 巫歌 <초감계>에 의하면 천지창조는 창조주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스스로 이루어진 것으로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태초 이전에 천지가 혼합하여, 하늘과 땅의 구별이 없는 채 어둠위 혼돈 상태였었다. 이러한 혼돈에서 하늘과 땅이 갈라져서 천지가 개벽하게 되었는데, 하늘에서 아침이슬이 내리고, 땅에서는 물 이슬이 솟아나서 음양이 상통하여 개벽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하늘은 갑자년 갑자월 갑자일 갑자시에 자방으로 열리고, 땅은 을축년 을축월 을축일 을축시에 축방으로 열리고, 사람은 병인년 병인월 병인일 병인시에 인방으로 열렸다.
<김태곤,최운식, 한국의 신화>
이것은 하늘 땅 사람이 차례로 생겨났다고 하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창조주가 세계를 창조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 열리고 부딪쳐 세상을 이루었다는 사고는 바로 마라도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천지 창조 신화에 비해 이렇게 스스로 창조된 마라도는 제 스스로그 곧 창조주가 되는 것이다. 태초에 제주도 사람들은 작으면서도 광막해 보이는 땅 덩어리를 우주로 생각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감계>는 바로 그런 사고에서 나온 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라도의 하늘, 바다, 땅은 그대로 태초의 모습으로 보였다. 사람은 어디로부터 이 땅에 올라왔을까, 인방은 어디일까, 바다일까, 하늘일까를 생각하는 동안 일행은 어느덧 가파초등학교 마라도 분교의 너른 잔디구장(?)을 지나고 있다. 인방에서 태어난 최초의 아기들이 놀던 땅이 이 학교의 마당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했다. 마라도의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제주도 전설에 이렇게 전한다.
수백 년 전, 가파도에도 마라도에도 사람이
살지 않았던 시절, 모슬포에 살고 있는 이씨 부인은 어느 날 물을 길러 가다가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게 된다. 울음소리를 좇아가니 태어난 지
3개월도 채 안된 여자아이가 수풀 속에서 울고 있었다. 백방으로 수소문해 보았지만 아이의 부모를 찾을 수 없게되자, 이씨 부인이 딸처럼 기르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이씨 부인에게도 태기가 있어 첫아이를 낳았고, 여자아이는 자연스럽게 아기를 봐주는 애기업개가 되었다. (제주
전설집)
마라도의 사람이야기는 이렇게 애기업개의 한으로 부터 시작된다. 또 기록에 의하면 마라도는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무인도였고 숲으로 우거졌었다고 한다. 아마도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우거져서 먼데서 바라보면, 여름에는 검푸르게 보이다가 이른 봄이면 불꽃이 타오르듯 뭍에 대한 그리움으로 꽃이 피었을 것이다. 그런 무인도를 1800년대 개간 허가를 받은 이들이 화전을 일구기 위해서 불을 질러 나무가 불타 없어져 지금은 갈대만 무성한 땅이 되었다고 한다. 마라도 특유의 나무로 숲으로 덮인 섬을 상상해 본다.
숲 사이에는 군데 군데 늪이 있었을까? 지금도 남아있는 물 웅덩이가 신기했다. 어떻게 숭덩숭덩 구멍이 뚫린 현무암 암반위에 모래흙만 남은 땅에 물이 괴어 있을까? 잔디밭 갈대밭이 습기 없이 그냥 모래 알갱인데 군데군데 산재한 웅덩이에 괸 물이 작은 호수처럼 보여 신기하다.
분교장 마당에 있는 잔디구장과 축구골대, 그 옆으로 물이 괸 작은 호수가 보인다
우리는 마라도 분교장의 잔디 구장을 지나 그 유명하고도 비싸면서도 맛은 별로인 마라도 자장면을 먹고 바닷가를 한 바퀴 빙 돌았다. 최남단의 관음 도량, 팬션, 천주교 성당이 이채롭다. 선인장 자생지를 지나 남쪽 끝에는 대한민국 최남단 표석이 있었다. 사람들이 표지석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남쪽 끝 바위 위에 서서 남쪽 바다를 바라본다. 끝이 없이 푸른 물이 넘실거린다. 사람들이 사는 바닷가에는 파도가 덮칠 듯한 소리를 내며 몰려 오지만, 여기서는 조용하기만 하다. 그저 흰물결이 일직선을 그으며 몰려 왔다가 서서이 밀려간다. 바다의 꾸짖음은 인간의 모습에 따라 그렇게 변하는 것인가 보다.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그냥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그리움만 전해주고 가버리곤 한다. 송강이 그의 관동별곡에서 " 바다 밖은 하늘이니 하늘 밖은 무엇인가" 하고 의문을 품었는데 옛사람이나 이젯 사람이나 세상 밖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우리는 어느새 바람을 맞으며 절벽 바로 위의 목책을 따라 난 오솔길을 걸어 부두로 향하고 있었다. 주어진 1시간 30분이라는 시간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어린 아이처럼 웃으며 떠들며 바다를 바라보며 맞는 바람은 봄바람처럼 포근하다. 오솔길에는 이미 봄이 온듯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지고, 햇살을 받아 벌써 새싹이 파랗게 돋고 노란 꽃을 피우기도 했다. 우리도 봄을 맞은 듯 마음이 따사로웠다. 부두로 향하는 길에 그 유명한 마라도 등대, 마라도 풍력 발전소 등이 보인다.
배가 아직 들어 오지 않아 바람을 맞으며, 검은 두부물이 흘러내리다 굳어버린 것 같은 바닷가를 걸었다. 원시의 땅을 밟으니 우리가 어린 아이가 되는 듯하다. 아내가 열일곱 소녀처럼 머리카락을 날리며 바다를 바라본다. 나도 그냥 따라 열아홉이 된 듯하다.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원시의 검은 바위들이 뒹구는 해안
3. 눈 속의 한라산
이튿날은 6시 30분에 아침 식사를 했다. 권사장의 아내는 간소하면서도 맛깔스럽게 아침상을 차려 놓았다. 상이 깔끔하다. 명호군이 밥상을 함께 차리는 모습이 보기 좋다. 아침상은 명호군이 직접 짰다는 통나무 식탁에 제주도 흙으로 직접 빚어 구워낸 투박한 토기로만 이루어져 있다. 박물관에나 있을 법한 오래된 자기에 밥을 담아 먹는 기분이었다. 그릇이 두껍기 때문이 국이 쉽게 식지 않았다. 음식까지도 깨끗하고 고졸한 예술품으로 보였다. 아담하고 깨끗한 식당은 온통 작품들로 장식되어 있어서 시계를 거꾸로 돌려 원시의 자연인이 된 듯한 기분이다. 창 너머에는 파도가 하얗게 선을 그으며 밀려오는 바다가 둥그렇게 반원을 그리며 다가 오고 있었다.
우리는 성판악으로 차를 몰았다. 성판악 관리소에는 이미 사람들이 입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싸늘한 바람이 휙 불어 온다. 엄청난 폭설로 폐쇄했던 산을 올들어 처음으로 개방한다고 한다. 오늘 일기는 대체로 영상 10도 가량 된다고 하는데 바지 가랑이로 스며드는 바람에는 냉기가 깊다.
초입에는 사람들이 눈을 치워 놓았는데 길 가장자리 눈이 키를 넘는다. 활엽수 지대는 굴참나무를 중심으로 우리 뒷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들이 빽빽히 들어차 있다. 눈은 나무의 중턱까지 쌓인 듯하다. 하얀 눈위에 어디서 날아왔는지 까마귀들이 짖어댄다. 까마귀가 그렇게까지 까만 것인 줄 몰랐다. 눈은 등산로도 낙엽도 분화구에서 굴러내려온 돌도 길가에 파랗게 돋아 있을 법한 봄풀도 다 덮어 버렸다. 그냥 백설의 세계라고 쉽게 치부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참나무 사이에서 커다란 지팡이를 짚고 수염이 허연 산신령이 나타날 것만 같다.
활엽수 지대의 눈길
우리는 나무 사이로 겨우 난 눈길을 걸어 산을 향했다. 눈이 아니면, 그리고 정상 분화구의 신비가 아니면, 한라산 경관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활엽수 지대가 지나면 침엽수들이 나타나고 침엽수가 다하면 자잘한 관목지대가 있고 초원을 지나 가파른 등성이를 오르면 그냥 낭떠러지 분화구가 나타나는 것이다. 32년전 8월 친구 셋이서 올랐던 한라산에 대한 기억이다. 그 때도 지금처럼 성판악으로 올랐는데 백록담 물가의 푸른 초원에 텐트를 치고 하루 밤을 묵었다. 참으로 겁없는 때였다. 소나기라도 퍼부었어야 하는데 하늘에 별은 초롱초롱하기만 했던 기억이다. 그리곤 이튿날 밀림을 지나 서귀포까지 걸어 갔던 그 젊음이 오늘에 새롭다.
평지를 산책하듯, 논두렁 길을 걸어가듯, 참나무 우거진 고향 뒷산 오솔길을 거닐 듯, 그렇게 끊임없이 걸었다. 길은 등산객들의 발자국에 부서진 눈 사이로 아주 좁게 그렇게 나 있다. 발이 크고 보폭이 남들의 1.5배 정도 되는 나는 걷기에 아주 불편하다. 아이젠을 했지만, 발자국에 의해 이루어진 좁은 길에 삐뚤어지고 미끄러져 비틀거린다. 그러나 경사가 급하지 않아 숨가쁘지는 않았다. 참으로 걸을 만한 산길이다. 햇살이 참나무 사이로 눈위에 그림자를 지우며 찬란하게 빛난다. 차가울 정도로 하얀 눈 위에 비친 햇살이 오히려 따사롭게 느껴진다.
나는 눈을 찍느라고 느린 걸음이 더 느리다. 일행이 나의 느린 걸음을 맞추느라 짜증을 낸다. 그러나 언제 변할지 모르는 변덕스러운 한라산 햇살이 너무나 아깝다. 그리고 산에 오르는 것이 무엇인가. 정상을 목표로 한다면 빨리 땅만 보고 가야만 한다. 그러나 오늘의 산행이 정말로 정상에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에 나혼자 여유를 부렸다.
눈에 덮인 간이 화장실과 대피소
두 시간 쯤 걸으니 울창한 비자나무 숲이 나왔다. 하늘을 찌를 듯한 숲은 눈속에 덮인 대지를 어두컴컴하게 하였다.그러나 그렇게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바로 전나무 숲이다. 전나무 숲 사이에 군데 군데 주목이 보이기도 하였다. 전나무는 하얗게 눈을 덮고 있다. 바람도 없이 잔잔한 하늘과 햇살, 그리고 하얀 눈과 파란 전나무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게 했다. 세상은 이렇게까지 아름답고 깨끗할 수도 있는 것인가. 깨끗한 눈은 간이 화장실까지 덮어 버렸다. 등산로 가에 봉분처럼 불룩한 눈더미가 보였다. 냄새가 나지 않았으면 아마 화장실인지 모르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눈에 덮인 화장실이다. 우리는 화장실 중간쯤 높이로 걸어 산에 오르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쯤해서 노루가 나와야 할 텐데 아무리 둘러 보아도 한라산 노루는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다녀서 굳어진 등산로 이외의 길을 밟거나 스틱으로 찌르면 금방 꺼꾸러질듯이 발이 빠지거나 스틱이 깊이 들어간다. 그런곳을 노루가 다닐 턱이 없다. 아마도 전나무 숲 가지 밑에 눈으로 이루어진 동굴 아래에서 나무껍질이나 낙엽을 주워 먹으며 연명할 것이다. 백록담에 가면 하얀 사슴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신선의 하얀 사슴이 내려와 물을 마셨다 해서 백록담이라 한다고 하지 않는가? 아니면 한라산 사슴이 모두 흰사슴으로 변해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땀이 흐른다. 등산복 앞자락을 모두 열어 놓았다. 가슴이 뛴다. 목덜미로 열기가 복받친다. 가슴을 모두 열었다. 햇살은 눈부시게 전나무 위에 쌓인 흰눈에 빛난다. 이 아름다움 속에서 사람들은 자꾸 산 위로만 올라간다. 거기에는 선녀가 멱감는 백록담이 있기 때문인가? '한라' 라는 말이 하늘을 당긴다 하여 그렇게 지어졌다고도 한다. 하늘을 당겨 손안에 넣을 수 있다면 서둘러 올라야 하지 않겠는가? 눈덮인 전나무의 장관도 버리고 말이다.
햇살과 눈쌓인 전나무, 거기 그냥 취해 버렸다.
마지막 대피소를 12시 안으로 통과하지 못하면 바로 하산해야 한다고 한다. 11시 30분, 대피소가 바로 눈 앞에 보이는데 배가 고파 다리가 떨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대피소 앞 마당 눈 위에 주저 앉아 라면을 먹고 있었다. 따끈하고 얼큰한 라면 국물이 금방 목으로 넘어가는 것처럼 입안에 침이 돌았다. 그러나 라면 가게 앞에 서있는 줄이 너무 길었다. 아내가 시간이 없으니 그냥 통과해야 한다고 한다. 여기서 정상까지는 넉넉 잡아 한시간, 비탈길을 오르니 자잘한 침엽수림이 파랗게 펼쳐진 그 너머 진달래 밭이 눈덮인 광야가 되어 하얗게 보이고 까마득하게 정상이 보인다.
너무 지치고 힘들었다. 그동안 운동을 소홀히 한 것이 후회되었다. 그리고 아침 식사를 조금 덜한 것이 뼈아프게 후회된다. 이렇게 배고플 수가 있는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봄, 학교에서 돌아오는 논둑길이 생각난다. 전기가 흘러 나가듯, 쥐났던 다리가 풀리듯 허벅지에서부터 종아리까지 힘이 쭈루룩 빠져 나간다. 이제 배낭에 간식은 아무것도 없다. 김밥만 한 덩이 남았다. 아, 그게 아니야. 집에서부터 넣어가지고 온 파스텔 우유가 생각났다. 우유 한 병을 단숨에 쭉 들이켰다. 그것은 정말로 원시의 양식이다. 힘이 솟았다. 이 나이에 젖을 먹고 힘이 난다는 사실이 정말 신기하고 우습다.
멀리 정상이 보인다.
전나무 숲을 지나 힘차게 정상을 향에서 눈을 밟았다. 산기슭을 지날 때보다 오를수록 발은 편안하다. 찬공기로 눈이 얼어서 포장도로처럼 평탄하고, 우레탄으로 마감한 운동장처럼 탄력이 있어 발이 편안하다. 정상으로 오르는 계단은 모두 눈에 덮여 어디가 계단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춥다. 안경을 벗으면 눈이 부시고, 쓰면 안경에 입김이 서린다. 나는 쉬지않고 발을 앞으로 내디뎌 정상을 향했다. 바람에 모든 것이 날려 가는 듯 했다. 바람은 먼지 묻은 바지에 늘어 붙어 있는 세상의 때를 깨끗하게 씻어갔다. 땀 밴 저고리, 모자가 모두 하얘지는 기분이다. 속된 세상의 때묻은 마음까지 모두 눈바람에 씻어내는 듯하다. 관절의 통증까지도 잊어버렸다.
눈에 덮인 신비스러운 백록담
정상에 부는 바람은 말할 수도 없이 차고 맵다. 단추를 있는 대로 여미고 방한모까지 썼다. 그래도 아내는 열심히 모자를 벗고 사진을 찍는다. 바람은 불지만 하늘은 무서울 정도로 깨끗하고 공기가 맑아 제주 섬이 한 눈에 다 보였다. 옛날에 왔을 때는 뭍인지 바다인지 알 수 없더니, 귤밭, 비닐하우스, 도시, 해안이 뚜렷하게 구분되었다. 제주에는 여러가지 재미 있는 전설이 많이 있지만 <설문대 할망>전설이 정상에서 한 번 생각해 볼만했다.
아득한 옛날 <설문대 할망>이라는
할머니가 있었다. 얼마나 거대했던지 한라산을 베게삼고 누우면 다리는 제주시 앞바다에 있는 관탈섬에 걸쳐졌다 한다.
이 할머니는 빨래를
하려면 관탈섬에 놓아 발로 밟고, 손은 한라산 꼭대기를 짚고 서서 발로 문질러 빨았다 한다.성산일출봉에는 높이 솟은 기암이 있는데, 이 바위는
설문대 할망이 길쌈을 할때 접시불을 켰던 등잔이라 하여 지금도 등경돌이라 부르고 있다. 이 바위는 높이 솟은 바위 위에 다시 큰 바위를 얹어
놓은 듯한 기암인데 할머니가 등잔이 얕으므로 바위 하나를 더 올려 놓은 것이라 한다. 이 거대한 여신도 어느날 한라산 중턱에 있는 "물장오리"가
얼마나 깊은가를 재려고 그 물속에 들어섰다가 그만 빠져죽고 말았다 한다.
(조천읍지)
제주 여신의 이 이야기는 제주 사람들의 한라산을 신성시하는 사고가 담겨 있다. 한라산을 그렇게 거대하게 생각하면서도 정상을 짚고 서서 빨래를 할 정도로 친근하게 여기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또한 제주 사람들의 우주를 작은 빨래터나 생각의 울타리 안에 마련한 뜨락 정도로 생각하는 뱃장도 엿보인다.
바다가 보이는 눈 덮인 정상에서
바람을 맞으며 우리가 올라 온 길을 되돌아 보았다. 눈 덮인 진달래 밭에는 바람이 세차게 불어 눈을 뜰 수 없었으나, 햇살은 흰눈 위에 한없이 찬란하게 비친다. 정상까지 오르는 동안 배도 고프고 무릎 관절통이 도져서 몇 번이나 산 아래를 돌아 보았다. 그러나 포기하기는 정복하기보다 더 어려웠다. 모든게 다 그러려니 생각하였다. 그러면서 지난 연말의 방황과 정신적 고통을 생각하니 그 모든 것이 눈바람에 다 날려가는 듯했다. 바람을 맞으면서도 그 희열은 법열의 경지에 다다른 듯 가슴이 떨렸다. 느림보 걸음으로 기어이 도착한 백록담에는 신비가 고운 햇살과 눈 속에 가득했다. 내려오는 길은 사뭇 가슴이 떨렸다.
(2006. 1. 3)
'여행과 답사 > 등산과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묘봉에서 (0) | 2006.06.30 |
---|---|
초록 마중 (0) | 2006.05.08 |
구룡산 생태 육교와 고구마꽃 (0) | 2005.11.10 |
칠보산은 단풍에 불붙고 (0) | 2005.11.03 |
조령산 (0) | 2005.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