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집에는 감나무가 많다. 산줄기가 좌청룡 우백호로 갈라져 감싸안은 골짜기 한가운데 봉긋하게 솟아 오른 명당에 자리잡은 우리 집은 겨울에도 바람이 없다. 집 주변 산기슭, 따뜻한 언덕배기, 울타리 근처는 겨울에 짚으로 싸매지 않아도 감나무가 얼어죽지 않는다. 그래서 집 주변은 온통 감나무 밭이다. 가을이면 붉게 떨어진 감잎과 나무에 달린 소담한 열매가 가슴을 풍요롭게 한다.
사랑채를 지나 큰 마당 건너에는 한아름이 넘는 고욤나무가 한 그루 있다. 지금은 늙어 얼마 달리지 않지만, 한창 젊은 나이에는 내 키만큼이나 큰항아리에 가득 담을 만큼의 고욤을 떨었다. 그 고욤을 항아리에 담아 놓고 겨우내 숙성을 시키면 죽처럼 무르익는다. 한겨울 무료할 때면 큰 양푼에다 하나 가득 떠다 놓고 식구들이 빙 둘러앉아 달고 그윽한 맛으로 모두 행복해 했다. 고욤은 찰수록 맛이 좋았다. 질척하고 차지면서도 차가운 고욤 국물을 놋숟가락으로 떠먹는 맛은 정말로 일품이었다. 그때마다 할머니께서는 고욤 씨를 모아 햇볕에 말리신다. 그래서 모아진 고욤 씨앗은 이웃에 나누어주기도 하고 남은 것은 텃밭에 모를 부으신다.
고욤나무가 어느 정도 자라면 따뜻하고 바람이 침범하지 않는 곳에 옮겨 심으신다. 그렇게 해서 2∼3 년 되면 형님들이 접을 붙인다. 해마다 봄이 오면 열 그루 이상 접을 붙일 고욤나무가 있어서 형님들이 바빠졌다. 날이 점점 따스해지면 고욤나무에서 감나무 새순이 나오는데, 그 보송보송한 잎이 귀여워서 어린아이들이 따 가기도 하며, 막 태어난 송아지가 막무가내로 뛰어다니다가 부러뜨려서 실패를 보는 것이 태반이다. 싹은 어리지만 대목인 고욤나무 뿌리가 튼튼하기 때문에 접목에서 나온 감나무 싹은 1년만에 우리 키보다 더 자란다. 그렇지만 가늘고 길어 연약하기만 해서 역시 사람들의 보호가 필요하다. 버팀목을 세워 비바람에 지탱하게도 해주고, 주변에 보호목을 세워 짐승들의 침입도 막아 주어야 한다. 겨울에는 짚으로 방한복도 만들어 입힌다. 그렇게 한 3 년 사람들의 보호를 받고 나면 처음으로 꽃이 피고 한두 개 열매가 매달린다. 참으로 신통하고 귀엽다. 그러나 그 열매는 발갛게 익어 세상을 구경하는 영광을 맛보지는 못한다. 감나무의 영양을 걱정하여 형님들이 모두 따 버리기 때문이다.
이듬해부터 감을 수확하는데 그렇게 수확할 수 있는 감나무가 50주 이상 되었다. 감을 따는 일은 농가에서 매우 번잡스럽고, 큰 일이다. 더구나 한창 추수가 시작될 때부터 추수가 끝날 때까지라 그 시기가 맞물려 천대받기가 일쑤다.
감을 따면 곶감을 만들거나, 큰 바구니에 담아 연시로 만들기도 하고, 따뜻한 소금물에 담가 떫은맛을 우려내어, 먹기도 하고 내다 팔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곶감을 만드는 일은 할머니의 차지다. 제사가 많은 종가라 이듬해 감이 나올 때까지 제수로 써야 하기 때문이다. 할머니께서는 종가에 시집오셔서 제사를 지내시는 일로 늙으셨기 때문에 정성이 여간 아니셨다.
우선 감 고르는 일부터 다른 식구들은 참견을 못했다. 너무 커도 안되고, 너무 작아도 못 쓴다. 또 까치 주둥이 자국이 한 군데도 없어야 하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잘 익은 놈이어야 한다. 그런 놈들을 큰 광주리에 실하게 담아 깨끗한 행주로 먼지를 닦아 하루쯤 습기를 날려보낸 다음, 툇마루 따뜻한 양지쪽에 앉아 껍질을 벗기셨다. 벗겨진 감은 소쿠리에 담아 개나 닭이 침범하지 못하는 대문간 지붕 위나 장독 위에 널어 말리셨다. 속살을 온통 드러낸 감은 하루 종일 짱짱한 가을 햇볕을 받으면서 검붉은 색으로 변해 갔다. 그러면 거죽은 굳어지고 안으로는 말랑말랑해지면서 숙성해 간다. 거죽이 약간 쪼글쪼글해지면 할머니께서는 나를 시켜서 지붕 위에서 감 소쿠리를 내려오게 하시고는 손질을 하신다. 깎아 놓은 감이 모두가 검붉은 곶감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고추 만한 말벌이 달려들어 파 가기도 하고 까치가 상처를 내놓기도 한다. 그런 곶감을 할머니께서는 손으로 만져 상처를 아물게 하기도 하시고, 쪼글쪼글한 놈을 잘 만져서 제상에 올리기 좋게 모양을 내신다. 이 때 아주 망가진 놈은 내 차지가 된다. 할머니께서는,
"그놈이나 먹고 똘똘한 것은 손대지 말아야 한다."
하고 주의를 주셨지만, 한창 말랑말랑해진 곶감을 맛 본 나는 조상님이나 할머니의 엄명을 까맣게 잊어버리기가 일쑤였다. 어른들이 보시지 않는 틈을 타서 몰래 한 개 씩 보는 맛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할머니께서는 곶감이 한두 개씩 없어지는 것을 다 아시면서도 다른 일 같으면,
"이 놈 고약한 놈 어디라고 거기다 손을 대."
하시면서 불호령을 내리셨을 텐데 직접 걱정하시지는 않으시고
"조상 제사 지낼 귀한 건데 갖다 먹으면 죄받지."
하시면서 내 눈치를 살피셨다. 아마도 제수를 놓고 자손을 나무라는 일을 꺼리셨던 할머니의 깊은 정성이었나 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곶감은 댕댕이 줄을 끊어서 만든 바구니에 신문지를 깔고 채곡 채곡 넣어 광 안의 천장에 매달아 보관했다. 여기까지 와서 바구니에 담기는 곶감은 참으로 행운이다. 보관하는 일도 할머니께서 나를 시키셨다. 나는 개상 같은 올라 설 수 있는 물건을 광에 날라 놓고, 할머니께서 시키시는 대로 곶감 바구니를 천장에 매달았다. 아무도 범접할 수 없도록 높게 말이다. 집안 어디고 맘대로 돌아다니는 쥐가 제일 걱정이었다. 그러나 할머니께서는 쥐 말고 머리 검은 새앙쥐가 또 있다는 사실을 모르셨는지, 아셨는지. 아마 다 아셨을 것이다. 그래서 귀여운 손자 놈이 먹을 것까지 요량을 하셨을 것이다. 한겨울 밖에서 뛰어 놀다 집안에 들어오면, 우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다. 광으로 들어가 개상을 옮겨 놓는다. 살며시 곶감 바구니에 손을 넣는다. 키가 모자라 까치발을 떠도 겨우 손가락 끝이 닿을 듯 말 듯 한다. 손가락에 하얗게 곶감 분말이 묻어 난다. 가으내 맨살로 받은 햇볕이 하얗게 우러난 것이다. 이렇게 겨우 한 알 얻어 씹고 또 씹는다. 어디서 이런 고졸(古拙)한 맛이 솟아나는 것일까? 나는 겨우내 한 알 씩, 한 알 씩 훔쳐먹어 제삿날이 돌아오면 모자라는 곶감 때문에 어머니 애를 태우게 해 드렸다.
이제 와서 그 때의 일을 생각해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면 그냥 개구쟁이 시절의 소화(笑話)로 지나칠 수만은 없는 일 같다. 할머니의 정성과 어머님의 조바심은 곶감 만들기에만 쏟으셨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지금 이렇게나마 사람이 된 것은 곶감 만들기에 쏟으셨던 그분들의 정성이 아닌가 한다. 그러면 나는 곶감 만들기의 어디쯤 와 있을까? 아무래도 대목에서 막 터 오르는 새순은 지난 듯하다. 훌륭한 고욤나무 대목에 품질 좋은 감나무 접목이 접붙여져서 사람들의 보호를 받으며 꽃을 피우고 붉은 감이 되어 막 껍질이 벗겨진 정도는 될까? 아니면 이제 막 푸른빛이 가시고 군데군데 붉어지기 시작한 땡감이라도 될까? 가으내 받은 짱짱한 햇볕을 하얀 분말로 내놓는 그런 곶감의 경지에는 언제 도달하게 되는 것인가? 그래서 옛날의 나와 같은 개구쟁이 아이들의 때묻은 손가락에 하얗게 묻어나는 그런 완성의 경지를 과연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중간에 까치밥이나 되지 말았으면 좋겠다. 까치밥이 안되어도, 오뉴월 장마를 견디지 못하며 볕이 짱짱하지 못하다고 투덜거리며 스스로 곯아버려 저절로 떨어져 감나무 아래나 더럽히는 실패작이나 되지 말았으면 좋겠다. 곶감, 그것은 간절히 바라지만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성인의 모습이다.
사랑채를 지나 큰 마당 건너에는 한아름이 넘는 고욤나무가 한 그루 있다. 지금은 늙어 얼마 달리지 않지만, 한창 젊은 나이에는 내 키만큼이나 큰항아리에 가득 담을 만큼의 고욤을 떨었다. 그 고욤을 항아리에 담아 놓고 겨우내 숙성을 시키면 죽처럼 무르익는다. 한겨울 무료할 때면 큰 양푼에다 하나 가득 떠다 놓고 식구들이 빙 둘러앉아 달고 그윽한 맛으로 모두 행복해 했다. 고욤은 찰수록 맛이 좋았다. 질척하고 차지면서도 차가운 고욤 국물을 놋숟가락으로 떠먹는 맛은 정말로 일품이었다. 그때마다 할머니께서는 고욤 씨를 모아 햇볕에 말리신다. 그래서 모아진 고욤 씨앗은 이웃에 나누어주기도 하고 남은 것은 텃밭에 모를 부으신다.
고욤나무가 어느 정도 자라면 따뜻하고 바람이 침범하지 않는 곳에 옮겨 심으신다. 그렇게 해서 2∼3 년 되면 형님들이 접을 붙인다. 해마다 봄이 오면 열 그루 이상 접을 붙일 고욤나무가 있어서 형님들이 바빠졌다. 날이 점점 따스해지면 고욤나무에서 감나무 새순이 나오는데, 그 보송보송한 잎이 귀여워서 어린아이들이 따 가기도 하며, 막 태어난 송아지가 막무가내로 뛰어다니다가 부러뜨려서 실패를 보는 것이 태반이다. 싹은 어리지만 대목인 고욤나무 뿌리가 튼튼하기 때문에 접목에서 나온 감나무 싹은 1년만에 우리 키보다 더 자란다. 그렇지만 가늘고 길어 연약하기만 해서 역시 사람들의 보호가 필요하다. 버팀목을 세워 비바람에 지탱하게도 해주고, 주변에 보호목을 세워 짐승들의 침입도 막아 주어야 한다. 겨울에는 짚으로 방한복도 만들어 입힌다. 그렇게 한 3 년 사람들의 보호를 받고 나면 처음으로 꽃이 피고 한두 개 열매가 매달린다. 참으로 신통하고 귀엽다. 그러나 그 열매는 발갛게 익어 세상을 구경하는 영광을 맛보지는 못한다. 감나무의 영양을 걱정하여 형님들이 모두 따 버리기 때문이다.
이듬해부터 감을 수확하는데 그렇게 수확할 수 있는 감나무가 50주 이상 되었다. 감을 따는 일은 농가에서 매우 번잡스럽고, 큰 일이다. 더구나 한창 추수가 시작될 때부터 추수가 끝날 때까지라 그 시기가 맞물려 천대받기가 일쑤다.
감을 따면 곶감을 만들거나, 큰 바구니에 담아 연시로 만들기도 하고, 따뜻한 소금물에 담가 떫은맛을 우려내어, 먹기도 하고 내다 팔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곶감을 만드는 일은 할머니의 차지다. 제사가 많은 종가라 이듬해 감이 나올 때까지 제수로 써야 하기 때문이다. 할머니께서는 종가에 시집오셔서 제사를 지내시는 일로 늙으셨기 때문에 정성이 여간 아니셨다.
우선 감 고르는 일부터 다른 식구들은 참견을 못했다. 너무 커도 안되고, 너무 작아도 못 쓴다. 또 까치 주둥이 자국이 한 군데도 없어야 하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잘 익은 놈이어야 한다. 그런 놈들을 큰 광주리에 실하게 담아 깨끗한 행주로 먼지를 닦아 하루쯤 습기를 날려보낸 다음, 툇마루 따뜻한 양지쪽에 앉아 껍질을 벗기셨다. 벗겨진 감은 소쿠리에 담아 개나 닭이 침범하지 못하는 대문간 지붕 위나 장독 위에 널어 말리셨다. 속살을 온통 드러낸 감은 하루 종일 짱짱한 가을 햇볕을 받으면서 검붉은 색으로 변해 갔다. 그러면 거죽은 굳어지고 안으로는 말랑말랑해지면서 숙성해 간다. 거죽이 약간 쪼글쪼글해지면 할머니께서는 나를 시켜서 지붕 위에서 감 소쿠리를 내려오게 하시고는 손질을 하신다. 깎아 놓은 감이 모두가 검붉은 곶감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고추 만한 말벌이 달려들어 파 가기도 하고 까치가 상처를 내놓기도 한다. 그런 곶감을 할머니께서는 손으로 만져 상처를 아물게 하기도 하시고, 쪼글쪼글한 놈을 잘 만져서 제상에 올리기 좋게 모양을 내신다. 이 때 아주 망가진 놈은 내 차지가 된다. 할머니께서는,
"그놈이나 먹고 똘똘한 것은 손대지 말아야 한다."
하고 주의를 주셨지만, 한창 말랑말랑해진 곶감을 맛 본 나는 조상님이나 할머니의 엄명을 까맣게 잊어버리기가 일쑤였다. 어른들이 보시지 않는 틈을 타서 몰래 한 개 씩 보는 맛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할머니께서는 곶감이 한두 개씩 없어지는 것을 다 아시면서도 다른 일 같으면,
"이 놈 고약한 놈 어디라고 거기다 손을 대."
하시면서 불호령을 내리셨을 텐데 직접 걱정하시지는 않으시고
"조상 제사 지낼 귀한 건데 갖다 먹으면 죄받지."
하시면서 내 눈치를 살피셨다. 아마도 제수를 놓고 자손을 나무라는 일을 꺼리셨던 할머니의 깊은 정성이었나 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곶감은 댕댕이 줄을 끊어서 만든 바구니에 신문지를 깔고 채곡 채곡 넣어 광 안의 천장에 매달아 보관했다. 여기까지 와서 바구니에 담기는 곶감은 참으로 행운이다. 보관하는 일도 할머니께서 나를 시키셨다. 나는 개상 같은 올라 설 수 있는 물건을 광에 날라 놓고, 할머니께서 시키시는 대로 곶감 바구니를 천장에 매달았다. 아무도 범접할 수 없도록 높게 말이다. 집안 어디고 맘대로 돌아다니는 쥐가 제일 걱정이었다. 그러나 할머니께서는 쥐 말고 머리 검은 새앙쥐가 또 있다는 사실을 모르셨는지, 아셨는지. 아마 다 아셨을 것이다. 그래서 귀여운 손자 놈이 먹을 것까지 요량을 하셨을 것이다. 한겨울 밖에서 뛰어 놀다 집안에 들어오면, 우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다. 광으로 들어가 개상을 옮겨 놓는다. 살며시 곶감 바구니에 손을 넣는다. 키가 모자라 까치발을 떠도 겨우 손가락 끝이 닿을 듯 말 듯 한다. 손가락에 하얗게 곶감 분말이 묻어 난다. 가으내 맨살로 받은 햇볕이 하얗게 우러난 것이다. 이렇게 겨우 한 알 얻어 씹고 또 씹는다. 어디서 이런 고졸(古拙)한 맛이 솟아나는 것일까? 나는 겨우내 한 알 씩, 한 알 씩 훔쳐먹어 제삿날이 돌아오면 모자라는 곶감 때문에 어머니 애를 태우게 해 드렸다.
이제 와서 그 때의 일을 생각해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면 그냥 개구쟁이 시절의 소화(笑話)로 지나칠 수만은 없는 일 같다. 할머니의 정성과 어머님의 조바심은 곶감 만들기에만 쏟으셨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지금 이렇게나마 사람이 된 것은 곶감 만들기에 쏟으셨던 그분들의 정성이 아닌가 한다. 그러면 나는 곶감 만들기의 어디쯤 와 있을까? 아무래도 대목에서 막 터 오르는 새순은 지난 듯하다. 훌륭한 고욤나무 대목에 품질 좋은 감나무 접목이 접붙여져서 사람들의 보호를 받으며 꽃을 피우고 붉은 감이 되어 막 껍질이 벗겨진 정도는 될까? 아니면 이제 막 푸른빛이 가시고 군데군데 붉어지기 시작한 땡감이라도 될까? 가으내 받은 짱짱한 햇볕을 하얀 분말로 내놓는 그런 곶감의 경지에는 언제 도달하게 되는 것인가? 그래서 옛날의 나와 같은 개구쟁이 아이들의 때묻은 손가락에 하얗게 묻어나는 그런 완성의 경지를 과연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중간에 까치밥이나 되지 말았으면 좋겠다. 까치밥이 안되어도, 오뉴월 장마를 견디지 못하며 볕이 짱짱하지 못하다고 투덜거리며 스스로 곯아버려 저절로 떨어져 감나무 아래나 더럽히는 실패작이나 되지 말았으면 좋겠다. 곶감, 그것은 간절히 바라지만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성인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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