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래의 시 <연시>로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질투다. 한겨울 눈 속에서나 쓰는 하얀 벙거지를 쓰고 사진 속에서 씽긋 웃고 있는 그가 감을 얼마나 알고 있단 말인가? ‘여름 한낮/ 비름 잎에/ 꽂힌 땡볕이/ 이웃 마을/ 돌담 위/ 연시(軟柿)로 익다’는 식의 시의(詩意)의 전개가 자연은 인생의 한 뿌리라는 오묘한 이치를 소화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또 어린 날을 온통 고욤나무와 감나무 숲에서 함께 자란 알량한 나의 자존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창 너머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어린 날 날마다 보아도 가슴 울리던 고향집 감나무를 그렸다. 내 기억의 따뜻한 언덕에 서있는 감나무는 지금쯤 다른 나무보다 먼저 상순까지 낙엽을 끝내고 발갛게 익은 감만 소복하게 매달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감나무에서 발갛게 익어가는 감을 보면서도 먹고 싶다기보다 그냥 아름답다고 감탄부터 한다. 맞다. 감은 아무리 잘 익어도 떫은맛 때문에 바로 먹을 수 없다.
감은 떫은맛 우려내기를 해야 먹을 수 있다. 뜨거운 물에 하룻밤 담가서 재워야 떫은맛이 단맛으로 변한다. 떫은맛을 우려내야 단맛이 나고 향기가 남는다. 그렇게 떫은맛을 우려낸 재래종 원시(圓柿) 즉 월하감은 질곡을 넘어서 원시(元始)의 맛 그대로이다.
감나무는 여느 나무들보다 먼저 물들이기를 시작한다. 여린 감나무는 그만큼 추위를 타기 때문이다. 또 그 물들이기는 어떤 나무들 못지않게 화려하다. 감나무는 서산에 비끼는 가을 햇살이 기울기를 더하면서 바라보는 이마에 바늘이 꽂히듯 따가울 때 아랫도리에 난 가지는 벌써 엽면(葉面)에 반짝반짝 윤이 나기 시작한다. 잎맥이 녹색의 빛을 잃으면 잎몸은 모두 빨강이 되고 잎자루까지 노랑이 된다. 엽면에 윤기를 더하면 작은 바람에도 살랑거리지 못하고 낙엽이 된다.
감나무가 낙엽을 시작하면 푸름 속에서 남몰래 붉어가던 감이 얼굴을 드러낸다. 열매의 물들이기의 시작은 잎새의 물들이기보다 화려하지 못하다. 꼭지에서 먼 부분부터 녹두색으로 엷어지다가 노랑이 된다. 꼭지는 더욱 단단해지고 과일을 감싸고 있던 작은 잎이 점점 윤기를 잃고 말라갈 때는 감은 흐릿한 분을 바르고 완전히 분홍이 된다. 이때쯤 과육이 오르기 시작해서 월하감은 통통하게 살이 찐다. 나무가 삼분의 이쯤 낙엽을 하고 그 나신(裸身)을 드러내면 열매는 옷고름을 꼭 그만큼만 풀고 가슴을 드러내는 여인의 얼굴처럼 발갛게 익는다.
잎새의 물들이기에 비해 꼬질꼬질할 것 같던 열매의 물들이기는 가을의 녹의홍상(綠衣紅裳)의 고름을 풀면, 햇살의 따가움이 영글어 터질 것같이 부푼 속살을 드러낸다. 감은 이렇게 열매가 익어가면서 내면을 채운다. 무서리가 내리면 껍질의 희미한 분가루가 없어지면서 더 얇아지고 윤기가 흐른다. 그 때 나무는 녹의도 홍상도 훨훨 벗고 목마른 중생에 젖을 물리듯 세월을 넘어선 여인이 된다.
그러나 땡감을 그냥 먹을 수는 없다. 여름내 땡볕을 받았다 해서 그냥 달기만 한 것은 아니다. 떫은맛을 우려내야 한다. 땡감을 그냥 먹었다가는 목이 메고 입안이 뻑뻑하고 그야말로 ‘땡감 씹은 기분’이 된다. 감의 떫은맛은 ‘탄인’이라던가 하는 성분이 있어서 그렇다는 얘길 언뜻 들었다. 아무래도 감은 쉽지 않은 과일이다.
월하감의 ‘떫은맛 우려내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래도 옛날 어머니의 솜씨를 따라갈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머니 손이 가면 하룻밤 사이에 떫은맛이 다 우려져 단감이 되었다. 어머니는 우선 뜨거운 물에 소금을 약간 섞었다. 그리고 바가지로 휘저어 너무 뜨거운 김은 날려 보냈다. 땡감을 항아리에 차곡차곡 담은 다음 맨 위를 콩잎으로 살짝 덮어 감이 데이는 것을 방지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뜨거운 김을 날리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물을 부었다. 그리고 헌 이불을 덮어씌워 온도를 유지하도록 하신다. 나는 이때 물의 온도를 감으로는 짐작해도 몇 도였는지 기억할 수 없어 아쉽다. 이튿날 새벽이면 감 맛을 보는데 소금기 때문에 껍질이 약간 찝찔하지만 속살은 꿀맛이었다.
떫은맛 우려내기는 꼭 열탕에 담그기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언젠가 첫눈이 너무 일찍 내려서, 미처 수확할 사이도 없이 발갛게 나무에서 익어가는 감에 소복하게 흰눈이 쌓인 적이 있다. 그 아름다움을 보고 나는 탄성을 올렸지만, 어머니는 애석해 하셨다. 언 감은 곶감 만들기도 어렵고 단감을 만들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연시로나 만들어야 한다. 연시는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땡볕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차가운 눈을 맞아야 황홀한 끝을 이룬다.
언 감은 우려내기를 하지 않아도 단맛이 된다. 오히려 우려내기를 한 것보다 더 단맛을 낸다. 그러면 그것은 ‘우려내기’가 아니었단 말인가? 나는 그 후에 그건 우려내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수용성인 탄인 성분이 고온이나 냉온에서 불용성 탄인 성분으로 변하여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고향집에 지천으로 둘러있는 감도 결코 수수한 과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씨를 뿌려도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반드시 접을 붙여야 하는 것도 그렇고, 나무가 예사롭지 않은 색으로 아무리 우리를 유혹한다 해도 열매는 바지에 쓱쓱 문질러 한입으로 물어 뗄 수 없는 것도 그렇다. 감은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감은 어떻게 떫은맛을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그 떫은맛을 감출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입안에 떫은맛을 지니고 살면서 떫은 그 말 한마디로 일상의 수고로 쌓은 공덕을 모두 도로(徒勞)로 만들어 버린다고 한다. 사랑하는 후배 동료들이 해주는 쓴맛 같은 충고이다. 나도 입안에 떫은맛을 감출 수는 없을까? 뜨거운 맛이나 차가운 맛을 보여주면 감추어질까. 가지고 있는 것이나, 가지고 있으면서 감추는 것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말이다.
반드시 침을 삼키며 참고 기다려야 오묘한 맛을 보여주는 감이 부럽다. 아니 떫은맛을 감추는 것이면서도 우려내기를 하는 것이라고 오랜 세월 진실을 가려온 그 앙큼함이 더 부럽다.
(2002.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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