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껍질벗기(깨달음)

아카시아의 오만(傲慢)

느림보 이방주 2002. 8. 12. 13:28

빗줄기 사이로 학교앞 동산의 울창한 아카시아가 더욱 그 오만한 녹음을 자랑한다. 아카시아 숲은 작년 봄 새로 배수지를 건설하느라 파헤친 붉은 황토를 가려 주어 정말 다행이다. 산 위인데도 아카시아 나무 사이로 가끔 자동차가 보일 듯 말 듯 지나기도 하는 것이 신기하다.

지난봄에는 자신의 최후를 보이듯 다른 해보다 더 짙은 향을 내품던 아카시아다. 숲이 온통 하얗게 뒤덮일 때쯤이면, 남학생들에게서도 향내가 폴폴 묻어난다. 운이 좋은 날은 수업 중에 눈을 들어 그 숲을 바라보면 가지 사이에서 어루는 샛노란 한 쌍의 꾀꼬리도 볼 수 있다. 아이들과 황조가를 읊고 있을 때 그런 행운을 발견할 수 있으면 오죽 좋을까 욕심을 부려 보기도 한다.

빗줄기는 더욱 거세게 내린다. 은빛 물줄기가 옛날 국수틀간에 대나무 꼬치에 걸어 널어놓은 국수 가닥처럼 뻗어 내리면, 그 물방울이 두 줄로 정렬한 아카시아의 작은 이파리 위에 은구슬이 되어 '또르르 또르르' 굴러 내리는 모습을 그려본다. 그런데 오늘도 비 내리는 숲 사이에 샛노란 꾀꼬리가 보인다. 그러나 그건 꾀꼬리가 아니다. 개나리 줄기가 비를 맞아 싱그럽게 쭉쭉 뻗어 내린 사이로 노랗게 물든 아카시아가 추레하게 서 있는 것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그건 한 무더기가 아니다. 개나리 사이 작은 아카시아들이 무더기, 무더기로 노랗게 물들어 있다. 하늘로 치솟아 클 만큼 자란 아카시아의 쭉쭉 뻗은 가지도 노랗게 물들었다. 어느새 단풍이 든 것인가?

그러고 보니, 우리 아파트 앞 매봉산 아카시아 잎이 하얗게 말라가던 것이 생각난다. 아카시아의 잎은 그 깃털 모양의 겹잎이 끄트머리부터 잎자루까지 작은 이파리 가장자리서부터 화톳불에 덴듯이 잿빛으로 퇴색되어 안쪽으로 처절하게 오그라들고 있었다. 그건 우리 동네뿐만이 아니었다. 소조령의 줄기인 신선암봉 기슭에도 아카시아는 제초제를 뿌린 듯이 그렇게 말라 있었고, 심훈님이 글 쓰던 필경사 뒤꼍의 청청한 대나무 숲 사이로 억척스럽게 내밀던 그 가지도 그렇게 말라 있었다. 다만 생기가 하늘로 뻗치는 듯하던 괴산 악희봉 아래 아카시아만은 아직도 싱싱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렇게 도도하던 아카시아가 여기저기서 왜 말라들고 있는가?

어린날 게으른 내 방 군불 땔감으로는 아카시아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다. 한겨울에 산기슭이나 밭둑에 지천으로 나서 아무런 쓸모 없는 아카시아 새 줄기를 낫으로 쳐다 커다란 아궁이에 가득 넣고 불을 붙이면 '후드득'거리며 독한 불빛이 튀어오르던 나무다. 불담이 좋아서 시골집 아랫목 장판을 발갛게 달구던 그런 아카시아다. 산골에 눈이 푹 쌓이면 아랫목에 배를 깔고 게으름의 행복을 향유하다가, 해가 설핏하면 톱을 들고 산으로 올라가 밑동이 곧고 가지 많은 놈의 꽁꽁 언 아랫도리를 톱으로 문질러 본다. 톱날이 드나들 때마다 단단한 목질 때문에 깽깽이를 울리는 듯한 소리가 났었다. 그렇게 단단하게 얼어 있을 때 도끼로 톡 치면 '통-'하고 맑은 소리를 내며 그 오만이 갈라진다. 갈라진 아카시아 장작은 징그러울 정도로 샛노랗다. 노란 만큼 샛노란 냄새가 난다. 속살에서 풍기는 독한 냄새는 하얀 꽃향기와는 사뭇 다르다.

사태가 잦은 산을 조림하는 데에는 아카시아만큼 좋은 나무가 없을 것이다. 거친 돌비알에서도 제 그림자보다 멀리 뿌리를 뻗는다. 그러다 심심하면 뿌리에서 가지가 돋는다. 그 새끼 아카시아는 또 뿌리를 뻗고 새끼를 쳐서 온산을 뒤덮는다. 거기다가 씨앗까지 날려 온통 제 자식들의 세상으로 만든다. 당년에 조림이 되는 듯하지만, 아카시아 아래서는 어떤 풀도 자라지 못한다. 뿌리에서 풍기는 그 독한 냄새 때문일 것이다. 아카시아 뿌리의 생명력은 이 냄새로도 충분히 짐작이 간다. 제 세상을 만들려다 제 터전을 황폐화하는 것이다.

그래도 어린 시절의 아카시아는 추억 같이 아름다운 향기만으로도 좋은 나무로 기억되었다. 그런데 어머니 산소 아래 아카시아가 퍼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잘라내도 한여름만 지나면 엄청나게 키가 자라서 바로 앞에 보이는 산봉우리를 가렸다. 아카시아가 '문필봉'이라 불리는 그 봉우리를 가리면 보잘것없는 나의 글문조차 꽉 막아버리는 듯했다. 그리고 볕이 들지 않아 잔디가 주저앉는다. 제초제를 쓰라는 사람이 있지만 참아 본다. 그런데 이놈이 드디어 신성한 묘정(墓庭)까지 침범하는 오만함을 보인다. 연약해 보이는 새싹의 밑동을 잡고 당기면 그 뿌리는 인간의 욕심의 길이처럼 한없이 길다. 한 치쯤의 깊이로 곱게 자란 잔디를 찢으면서 제 키보다 서너 배쯤에서야 끝을 보인다. 이렇게 아카시아는 지상에서는 꿀에 젖은 향기로 벌나비를 유혹하고 세상을 현혹하면서도,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바로 한치 땅 밑에서는 남몰래 탐욕의 뿌리를 한없이 뻗어 간다. 묘정에 서서 그 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내 발 밑까지 뻗어 뚫고 올라 올것 같은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하늘은 아카시아의 오만과 탐욕에 철퇴를 내리려는 것인가? 어느날 매봉산 등산로 입구에서 밑동에서부터 자작나무 보굿이 들떠 일어나듯이 껍질이 벗겨져 속살까지 썩어 부서져 내리는 아카시아를 발견했다. 그리고 이 산 저 산에서 하얗게 타들어 가는 그 오만의 사체들을 생각할 때, 이제 이 땅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무서운 예감마저 들었다. -이 땅을 뒤덮은 탐욕의 최후의 날이 오는 것은 아닌가?- 이렇게 아카시아는 스스로의 오만과 탐욕의 어리석음으로 스스로의 땅을 황폐화하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 서울에서는 북한산 개발에 반대하는 스님과 신부들이 모여 삼독(三毒: 貪;탐욕, 瞋:성냄, 痴;어리석음)을 소멸하게 해 달라는 삼보 일배(三步一拜)를 올렸다고 한다. 남을 탓하기에 앞서 자신을 돌아보고 겸허하게 몸을 굽혀 머리를 땅에 대고 절로써 자연에 경의를 표한 그들의 행사는 그들만의 소망이 아니라, 나의 소망까지 한꺼번에 드러낸 것 같아 감사하기 이를 데 없다.

앞날의 자신의 운명을 짐작하지 못하고 아직도 정정한 학교 앞 아카시아에게 삼보 일배(三步一拜)를 권해보고 싶다. 비굴한 변명이나 치졸한 아첨이 아닌 안으로부터 겸허한 마음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굽힘으로써 삼독(三毒)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2002.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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