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 30분. 세 시간쯤 잤구나. 이 감방에서 이 시간에 잠에서 깨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방이 온통 벽으로 둘러싸인 내 감방은 여명을 알리지 못한다. 그냥 암흑만 있을 뿐이다. 지정된 연구 임무를 띠고 감금된 지 오박육일, 오늘 새벽에야 최종 보고서에 서명할 수 있었다. 정해진 날짜에 보고서를 작성하고 서명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이 감방은 자유의 천국이다.
오늘 새벽 우리는 출감을 기념하는 축배를 들었다. 나는 출감의 감격 때문인지 공포 때문인지 마구 마셔댔다. 속이 쓰리다. 그래도 그새 내 몸 구석구석을 지배하던 알코올은 이름 없는 바람이 되어 다 날아가 버렸다.
살그머니 현관문을 열고 복도로 나간다. 갈증이 나면 바로 그 자리에 정수기가 있다. 물을 한잔 마셔본다. 한잔, 또 한 잔……. 옛날 토종닭을 한 스무 마리 키우던 우리 닭장에도 꼭 이런 모양의 급수기가 있었다. 물통을 거꾸로 세워서 물이 쫄쫄 나오면 철창에 갇힌 닭들이 부리에 한 모금씩 물칠을 하고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는 으레 그 화려한 닭대가리를 갸우뚱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러고 보니 나도 물 한잔 마시고 하늘을 한 번 쳐다본 것은 아닌가? 주위를 둘러본다. 그 모습이 꼭 갸우뚱하는 닭대가리일 것 같아 더욱 주변을 살피게 된다. 그 냉기에 금방이라도 배뇨가 될 듯 배꼽 아래까지 싸늘하다.
밖은 어떨까? 운동을 하면 축구 빼고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널찍한 발코니로 나간다. 두 길도 넘는 철창만 아니라면, 검은색 실루엣을 거두기 시작하는 중미산의 화려한 변신이 코에 닿을 듯하다. 쇠창살,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보는 그 창살이 오박육일 동안 우리의 우리가 되었다. 하늘이 열린 것만도 얼마나 다행인가? 구름이 다시 내려와 골짜기를 스멀스멀 더듬는다. 아침 안개가 멀리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포도가 구렁이 꼬랑지처럼 사라진 모롱이 끄트머리에서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어둠이 걷히고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중미산은 참으로 환상 속의 세계이다.
건물 앞을 지나 산으로 올라가는 허술한 시멘트 포장도로에는 아직 가로등이 꺼지지 않았다. 연인인 듯한 젊은이들이 손을 잡고 천천히 산길을 걷는다. 검은 포장지를 걷어내는 것처럼 뽀얗게 걷히는 어둠 속에서 그들은 신비스러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의 창살 없는 자유가 부러웠다. 그러나 그들은 이 창살 안의 자유를 알 리가 없다. 잠이 오면, 그냥 나의 감방에 들어가 보송보송한 이불을 펴고 누우면 된다. 시장기가 돌면 복도에 라면과 온수가 준비되어 있다. 커피, 아이스크림, 수시로 제공되는 간식, 뭐든지 골라 먹을 수 있는 뷔페……. 정말 풍요의 감옥이다. 인터넷도 전화도 금지되고, 외부인과 접촉하는 것 빼고는 모든 자유가 보장되는 감방이다.
사우나를 하면 좀 나을까? 묻고 물어서, 두세 차례 간수들에게 신분을 검증 받고 사우나를 찾았다. 오늘 아침 처음으로 허용되었지만, 서명만 하면 통과다. 오륙천 원은 내야 들어갈 수 있는 보통 사람들보다 영어(囹圄)의 몸이 이래서 좋다. 열탕에 걸터앉아 20분쯤 좌욕을 하였다. 땀이 비 오듯 흐른다. 여기 누워 처음으로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자유를 누린다. 누워서도 바깥세상이 아주 가까이 보였다. 아직도 푸릇푸릇한 잡초가 보이는 걸로 봐서 바로 정원인가 보다. 유리를 깨고 뛰쳐나가고 싶었다. 풀포기를 잡고 허둥지둥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물속에 온몸을 푹 담근다. 탕 안의 물이 ‘출렁’ 흘러넘친다.
갑자기 내방이 궁금해졌다. 땀을 닦고 밖으로 나왔다. 체중계에 올라본다. 그간의 자유는 벌써 몇 백 그램을 늘리었다. 서둘러 내방으로 돌아와 보았다. 벗어 던져진 속옷, 양말, ‘휭-’ 열린 가방, 종이, 취재 노트……. 변함없이 그대로다.
아
내가 타주는 따끈한 꿀차 한 잔이 그립다. 출감 전야 새벽까지 마신 이별주의 달착지근한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서 맴돈다. 삶은 호박에 꿀을 타 먹으면……. 이런 날은 콩나물을 조금 넣고, 무를 삐져 달달 볶다가 굵은 멸치를 넣고 끓인 된장국이 그립다. 속이 확 풀릴 것 같다. 그러나 여기는 감옥이다. 식탁에는 굵은 대공이 잇몸을 쿡쿡 찌르는 시큼한 아욱국이었다. 넓적한 아욱 잎사귀가 푹 삶겨져 이빨에 감긴다. 개성 있는 내 입맛을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러나 이 느끼한 것들이 벌써 지겹다. 커피만 두 잔을 연거푸 마셨다.
나는 나간다. 오늘은 출감이다. 이제 푸른 수인 번호를 반납하고 가방을 메고 나가면 된다. 사람들과 악수를 하고 두 사람의 관리 요원에게 보고하고 현관을 나섰다. 싸늘하고 상큼한 바람이 전신을 휘감는다. 코끝이 시원하게 뚫리는 기분이다. 중미산을 기어오르던 가벼운 안개구름들이 모두 내려와 감기는 듯하다. 안개인 듯 이슬인 듯 흠씬 젖은 나의 애마는 헤엄치다 금방 올라온 무소처럼 물이 뚝뚝 떨어진다. 문을 열고 시동을 걸어 본다. 땅바닥을 박차고 하늘로 오를 것 같은 경쾌한 소리를 낸다.
나는 드디어 출감하는 것이다. 가볍게 마당을 한 바퀴 돌아 골짜기를 빠져나왔다. 다리를 건너니 훤한 세계가 펼쳐진다. 아직도 속은 싸늘하고 머리는 둥둥 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때 오늘 돌아가 해야 할 일들이 순서 없이 머리를 짓누른다. 잠시 잊었던 더욱 지독한 감방이 거기에 있었다. 그 날 아침, 나는 쓸데없이 출감 아닌 출감을 고대했던 것이다.
(2002.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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