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었다. 넓은 유리창으로 햇살이 곰실곰실 방안으로 퍼지는 그런 집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 분홍색 커튼을 힘주어 젖히면, 맑은 유리창에 이슬방울이 쪼르르 흘러내리고, 그 사이로 흰 눈이 포근히 쌓인 소나무 가지들이 보이는 그런 창이 그리웠다. 아주 가까이 있는 뜰에서는 앵두나무나 산수유 같은 성급한 나무들이 봄을 기다리고, 창가에는 게발선인장이 새빨간 꽃을 소복하게 달고 있는 그런 아늑한 창이 있는 나의 방을 갖고 싶었다.
우리집은 누구나 '큰집'이라고 불렀지만 유리창은 없었다. 그냥 창호지로 바른 갑갑한 문뿐이었다. 창이라야 마루로 통하는 격자문의 창호지를 한 뼘쯤 도려내고 유리를 두 눈 크기로 오려 붙여 밖을 염탐하는 것이 전부였다.
옛날 사람들은 왜 집을 지으면서 창을 만들 줄 몰랐을까? 왜 창도 없는 집안에 아이들을 가두어 두었을까? 어린 시절 나는 참으로 갑갑했다. 밖을 볼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답답했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데. 밖에는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데. 바라봐야 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바라봐야 하는 것들을 바라봐야 아이들의 꿈이 여물고, 여문 꿈을 터트릴 수 있었을 텐데.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가슴을 꿈으로 장식하고 살아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창이 있는 집에 살고 싶었다. 의자에 앉으면 그냥 밖을 바라 볼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맑고 큰 창이 있는 나 혼자만의 방에서 사색에 잠기고 싶었다. 거기서 바라보는 세계는 유리 안에 든 그림이 더욱 아름답듯이 그렇게 아름다웠을 것이다. 또 거기서 바라보는 소나무는 예사 소나무가 아니었을 것이다. 거기서 바라보는 울타리 둘레에 아무렇게나 자란 대나무도 예사 대나무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건 모두 내 의지가 되고, 내 소망이 되었을 것이다. 거기서 바라보는 이른봄 산수유나, 철쭉은 어린날 나의 꿈의 씨앗이 되었을 것이다.
이제 그 때의 소망만큼 넓은 창이 있는 내 집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창이 그리운 나이를 지나 버렸다. 창은 아름다운 것만 보여 주지도 않고, 거기 보이는 것만으로 채우기에는 욕망의 그릇도 너무 커 버렸다. 어느덧 노을지는 서창 있는 서재에서 책이라는 세상을 담은 창으로 세상을 내다보아야 하는 그런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런 창으로는 천재들의 꿈을 엿볼 수 있다. 천재들의 꿈에서 어린날 나의 꿈을 발견하고 흥분하는 만만찮은 재미도 있다. 거기에는 내가 그리워하는 전설도 숨어 있고, 지향하는 미래의 환영도 있고, 정신세계를 보양할 수 있는 사색의 보약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책이란 창으로만 내다보기에는 너무나 넓고 커다란 세계가 되어 버렸다. 이 시대의 창은 이제 무섭게 변해 가고 있다. 또 내다보기에는 세상은 무서울 정도로 어둡고 침침해졌다. 창이 아무리 넓고 맑아도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세상은 맑기만 한 것도 아름답기만 한 것도 아니다. 아니, 그리운 세상이 아니라 도망치고 싶은 세상이 되었다. 어린날 창이 있는 곳에서 살고 싶었던 나의 꿈은 전설이 되어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
이렇게 그립지도 않은 세상은 창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보인다. 또 햇살 내려 쬐는 가깝고 포근한 뜨락만 보이는 것도 아니다. 소나무만 보이는 것도 아니고, 대나무만 보이는 것도 아니다. 불타는 듯한 철쭉이나 화사한 앵두나무만 보이는 것도 아니다. 바라지도 않는 세상은, 아름답지도 않은 세상은 구석구석 잘도 보인다. 거실 한가운데 괴물처럼 놓여 있는 텔레비전은 온 세상을 남김없이 폭로한다. 맘만 먹으면 인터넷으로 남의 안방까지 엿볼 수 있는 요지경 속 같은 세상이 되어 버렸다. 보고 싶은 세상보다 보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마수를 내뻗어 나의 순수를 유혹한다.
인터넷이라는 이 시대의 창은 내가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이 아니라, 난자(亂者)들이 무자비한 시선으로 나의 밀실을 들여다볼까 두려운 창이 되었다. 난자들이 나를 마구 난도질하고 마구 분할하여 나도 모르는 사이에 경매에라도 붙일 것 같은 중압감으로 시달리게 하는 창이 되었다. 세계는 이제 내린 커튼을 걷어올리라고 협박하고 있다. 아니, 아예 창을 열라고 위협한다. 이 도척(刀尺) 같은 세계는 이제 보이지 않는 창으로 나를 훔쳐보고 있다. 아니, 훔쳐가고 있다. 아니, 아직도 나만의 것이 남아 있다고 자신할 수도 없다.
나는 이제 아주 작은 유리로만 밖을 내다볼 수 있었던 그 옛날의 전설이 그립다. 거기에 보이는 아름다운 세계가 그립다. 책이란 창으로 그리는 꿈을 바라보던 고서의 향기가 풍기는 나의 서재가 그립다. 서창으로 불타는 노을 빛을 받으며 사색의 창으로 세상을 내다보던 나의 서재가 그립다.
나는 이제 창을 내리고 싶다. 짙은 커튼으로 나의 창을 가리고 싶다. 그리고 노을 빛 불타는 나의 서재로 돌아가고 싶다. 내가 바라볼 수 있는 세계보다 나를 들여다보려는 세계가 더 두렵기 때문이다. 나를 가리고 내가 원하는 명상의 세계에 잠기고 싶기 때문이다.
(2003. 2.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