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일주일쯤 몸이 부실해져서 아침 등산을 걸렀다. 무슨 연유인지 안방 공기와 다른 공기가 목구멍에 닿으면 그 너머에 있는 것들이 다 넘어올 것 같은 기침이 쏟아졌다. 귓전에 스치는 바람은 부드럽지만, 아직도 아침 공기가 부실한 내 목에는 걸린다. 별수 없이 기침이 멎을 때까지 아침 운동을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한 이레만에 밟는 흙의 감촉은 훨씬 부드럽고 애틋하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산길에는 서양 소나무에서 바늘처럼 쏟아진 솔잎이 발에 짓밟혀서 흙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래도 밟혀 부서진 솔잎들이 양탄자처럼 부드럽다.
봄은 세상에 참으로 새로운 것들을 잔뜩 쏟아놓고 지나간다. 아파트 앞 언덕에 산더미처럼 심어놓은 개나리도 병아리 주둥이 같은 애절한 하소연만 남기고 파란 이파리 속에 숨어 버렸다. 보랏빛 잎이 나오기 시작한 산벚나무는 그 꽃이 이미 분홍색으로 죽음의 물들이기를 하고 있다. 진달래도 치아가 다 망가진 할머니 입술처럼 쪼글쪼글하게 입을 다문 지 오래다. 산기슭에 꺽다리 백목련도 이미 커피 빛으로 숨을 거두고 있는 중이다.
어느새 철쭉이 그 독살 맞은 분홍빛으로 진달래를 위협하고, 조팝나무꽃이 별사탕 쏟아놓은 것처럼 하얗게 피어 특유의 향기를 흘리고 있다. 산 복사꽃은 터트리기 전부터 발그레한 멍울이 바람든 사람의 심장을 설레게 한다. 날망에 모여 리듬에 맞추어 춤인지 체조인지 몸을 흔드는 여인네의 굵은 허리도 어느새 유연해졌다. 낯선 사람들의 어둠에서는 보이지 않던 얼굴에도 웃음과 활기가 가득하다.
봄은 한 이레만에 세상을 화려하고 생기 넘치게 바꾸어 놓으면서 왜 나한테는 거친 말로라도 한 마디 불러주지 않았을까? 산은 한 이레만에 이렇게 부드럽고 포근하게 세상을 바꾸어 놓으면서 한 마디 귓속말도 전해 오지 않았을까?
매봉산 날망 끄트머리까지 사람들 발자국에 패어 드러난 솔뿌리에 내가 도로 채이며 빠른 걸음으로 걸어 본다. 진땀이 난다. 끈적끈적하는 봄의 느낌이 피부에 닿는다. 날망 끝에 서서 갖가지 삶이 빼곡하게 들어선 시가지를 내려다보니 그래도 선도산에 피어오르는 동녘의 불빛이 더 찬란하다. 작년에 피었던 꽃이 또 피어나려고 해맞이를 한다. 이렇게 세상은 내게 오는 것이 아니고, 세상은 나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다만 내가 찾아가야 얻을 수 있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어린날 나는 부실한 몸으로 어머니 치마폭에 싸여 성장하면서 원하는 세상 모든 것을 어머니가 이루어 주시는 것으로 생각했다. 밥을 원하면 밥을 마련해 주시고, 옷을 원하면 옷을 주시고, 공부를 원하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마련해 주시는 것으로 알았다. 당신은 매운 고독으로 안으로 수없이 바늘을 꽂으면서도 내가 웃음을 원하면 웃음까지도 주셨다.
막내인 나의 어머니는 다른 어머니보다 더 쉽게 나이가 드시고, 더 빨리 근력이 없으셔서 원하는 것을 주워주고 싶어도 주워줄 수 없게 되어도 나는 그런 어머니를 원망했다. 더욱이 이제 세상에 계시지 않고 흙으로 돌아가 땅속에 집을 짓고 사시는 어머니께 지금도 거기 달려가, 때로 왜 내게 원하는 건 주시지 않고 원하지 않는 것만 주시느냐고 원망하기도 한다. 대지 같은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다 일러 주시지 못하신다고 원망하듯이, 어머니 같은 대지에게 내게 원하는 것을 다 챙겨주지 못하는 것을 원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봄이 내게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스쳐 지나가듯이 세상은 이렇게 아무 말도 없이 스쳐 지나가는 것임을 알았다. 꽃은 왜 말없이 그냥 떨어져 흩날리느냐 원망할 수도 없고, 떡갈나무 잎은 어느새 그렇게 파란 이파리를 윤이 나게 피웠느냐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세상은 나를 찾아오는 것이 아니니까. 세상은 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니까. 세상은 내가 찾아가 만나야 하는 것이니까.
아직은 늦지 않았으리라 혼자라도 생각하면서 봄을 찾아 나서야겠다. 아직은 늦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면서 지는 꽃잎이라도 만나러 나서야겠다. 아직은 늦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면서 피는 이파리를 찾아 나서야겠다. 나를 기다리지 않는 세상을 찾아 나서야겠다. 그래도 아직은 꽤 많이 남아 있을 나의 세상을 찾아 나서야겠다.
(2003. 4.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