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껍질벗기(깨달음)

탐욕의 계단

느림보 이방주 2002. 7. 12. 11:28

정말로 신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가? 삶은 신이 내린 은총인가? 시인 김남조는 이렇게 읊었다.

삶은 언제나
은총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김남조의 ' 雪日'에서)

그렇다면, 현암사에 가야 한다. 바위에 매달린 듯한 고찰에 그 어려운 계단을 밟고 올라 죄의 땀을 빼고 조금이라도 가벼워진 육신으로 부처님 앞에 고두(叩頭)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나의 삶이 신의 은총이라면, 살아온 것만큼의 은총을 달게 받아야 한다. 그러면 저 귀뚜라미를 잠재울 수 있을지 모른다.

십여 년 전 생겼다가 이제 잊을 때도 된 이명(耳鳴)이 다시 기승이다. 사실 이것도 나의 치졸한 탐욕으로 스스로를 혹사시켜 태어난 귀뚜라미다. 그 귀뚜라미가 잠시 기력이 쇠약해진 듯하더니, 지난 3월 초 물기 묻어 내린 눈 위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한 1분 30초쯤 놀란 후로 노망이 나버렸다. 군악대를 동원하여 귀뚜라미 퍼레이드를 벌이는 듯 쿵쾅거린다. 큰 북소리, 작은 북소리, 수자폰, 트럼펫까지 동원하다가 때로는 오토바이 에스코트까지 받으며 구색을 맞춘다.

이 괴로움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복도를 다닐 때 아이들 떠드는 소리도 생명의 음악소리처럼 아름답게 들리지 않는다. 그냥 괴로움이다.

3월에 약을 한 재 먹었다. 믿을 만한 한의사 선생님이 원인을 확실히 밝히고 침을 놓고 약을 주었는데, 그 약을 반쯤 먹었을 때 귀뚜라미들은 오토바이부터 멈추더니, 이어 수자폰, 북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러더니 아예 퍼레이드를 멈추었다.

그 약을 다 먹었을 때 귀뚜라미는 가는 숨소리마저 거두고 세상은 온통 조용해졌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본래부터 이렇게 맑은 것인가?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금방 가슴속에서 함박꽃을 피울 듯이 아름답게 들렸다. 나는 한의사 선생님께 간접적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의원 이름을 대 가며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을 하였다.

5월초 어느날 아침 재채기가 한번 오지게 나더니 귀뚜라미가 깨어났다. 이놈의 귀뚜라미가 숨을 거둔 것이 아니라 깊은 잠에 빠졌었나 보다. 재채기 소리를 예수가 게쎄마니 언덕에서 제자들을 깨우치던걸 흉내내어 내가 아이들에게 즐겨 지르는 "깨어나라."로 알아들은 모양이다. 요즈음에는 해가 뜨면 아침 퍼레이드를, 해가 지면 저녁 퍼레이드를 벌인다.

용서받아야 할 죄를 모두 싸안고 나의 무쏘에 키를 꽂았다. 현암정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절 입구까지 걸었다. 아내의 왼쪽에 서서 걸었다. 그래야 아내의 말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끊이지 않고 꼬리를 모는 자동차들은 모두 활기차고 행복하다. 계단 입구에서 누군가 우리를 보고 경적을 울리고 지나간다. 낯익은 차인데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손을 들어주기 전에 휙 지나가 버린다.

계단 아래 주차장에는 언제나 차가 빼곡하다. 앞이 툭 터지고 뒤가 막혀 한겨울에도 발바닥이 따끈따끈한 곳이다. 오솔길이 경사가 급해 장마 때마다 흙이 씻겨 길이 패이자 궁여지책으로 철사다리를 놓았는가 보다. 사다리 위 물건 나르는 삭도와 함께 옛절인 현암사 풍광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10m만 오르면 이내 하늘이 보이지 않는 숲이다. 그 동안에 등줄기에 땀이 밴다. 땀은 어느새 남방 속에서 줄줄 흘러내린다. 첫 단계 사다리를 오르면 중간에 숨을 고르면서 뒤를 돌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거기서 뒤를 돌아보면 호수에 갇힌 갑갑한 물을 내려다 볼 수 있다. 푸른 산줄기를 돌고 돌아 콘크리트 댐에 꽉 막혔으니 이 자연이 얼마나 갑갑할 것인가?

예전에는 바위에 매달린 것 같은 암자에서 바라보면 멀리서부터 구불구불 산골짜기를 돌아 강가에 기다랗게 펼쳐진 논밭을 적시면서 비교적 힘차게 흐르던 강이었다. 그런데 그 흐름을 꽉 막아 버린 것이다. 날마다 그 답답함을 내려다보시는 부처님이 얼마나 갑갑할까? 아니, 그 닫힘의 아래에 흐르는 흐름을 다 읽고 계실 것이다. 계단을 오르는 나의 답답함을 다 읽고 계시듯이……

계단이 끝나는 곳에 여고생으로 보이는 아이들 몇이 힘들게 오르고 있다. 그 답답함이 무언지도 모르는 아이들에게도 경쾌한 재잘거림을 앗아간 듯, 무거운 다리만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하늘은 물을 돌려놓는 인간들에게 벌을 내리듯 이 오르막을 오를 때 언제나 바람 한 점 흘리지 않는다.

절에 올라 아내는 대웅전으로 가고, 나는 인사도 없이 물을 찾았다. 그러나 그 작은 물구멍에선 물이 나오지 않는다. 목이 타는데, 땀은 이렇게 많이 나는데 물이 없다. 가뭄에 물을 아끼느라고 절에서 막았거니 하고 생각했다. 속세의 사람들은 큰 물길을 막아 제 혼자 차지하려 하더니, 사찰에서는 생명의 물길을 막았구나. 그러고 사람들은 어떻게 세상 사슬로부터의 해방을 바랄까? 그릇에 괴어 있는 물을 한 구기를 떠 마시고 대웅전으로 향했다.

등산화를 벗고 3배를 올렸다. '자비하신 부처님, 물길을 막은 인간의 사악함을 용서하여 주소서. 인간의 탐욕을 용서하소서. 제 한 몸만 아는 옹졸함으로부터 해방하소서. 스스로 만든 사슬로부터 해방하소서. 벗어나려고 하는 탐욕으로부터 해방하소서. 자비하신 부처님 인간을 탐욕의 사슬로부터 해방하소서.' 아이들이 대웅전을 기웃거렸다.

아내가 물 줄을 여니 시원하고 깨끗한 물이 쏟아진다. 이 물줄기는 본래 쌀이 나오는 구멍이었는데 옛날 어느 동자승이 한 번에 한 사발밖에 나오지 않는 계율을 어기고 욕심을 부려 쌀이 끊기고 대신 물이 나오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그냥 옛말이 아니구나 생각되었다. 부처님은 이제도 살아 나의 탐욕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깨끗하다고 생각되는 물 한 구기를 더 얻어 마셨다. 사실은 마찬가지인데 금방 나오는 물이 더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탐욕이 아니겠는가? 아이들이 물을 마시는 동안 쌀바위 얘기를 해 줄까 하다가 '그것도 또한 욕심이다.' 싶어 참았다. 누군가 나의 탐욕을 조금이라도 정화시킬 수 있는 지인(至人)을 만날 것 같은 예감을 뒤로하고 탑으로 올랐다. 공연히 전화를 여닫으면서---

탑에 오르면 물이 다 보인다. 물 건너 잘 가꾸어진 길도 보인다. 그 길에서 절을 바라보는 경치도 또한 일품이다. 이른 봄 새순이 돋을 때, 거기 서서 바라보면 제비집처럼 암벽에 매달아 놓은 이 절 주변의 녹음이 정말로 아름답다. 내가 사슴이나 토끼였으면 하는 욕심이 생긴다. 산 벚꽃이 어우러진 날이 지나고 한 여름 비나리는 날, 물위에 떨어지는 굵은 빗자위를 쳐다보다가 이 언덕을 바라보면 어느 새 물을 건너 빗줄기를 타고 오르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가을에는 유난히 많은 개가죽 나무에 붉은 물이 배어 절이 불구덩이에 든 것 같아 우리를 놀라게 한다. 한겨울 함박눈이라도 내릴라 치면, 찔레꽃 필 때 흰나비처럼 춤추는 하늘의 축복 너머로 아직도 푸르고 싱싱한 소나무 속에 묻힌 절집의 기와지붕이 환상처럼 아름답다.

그래도 여기서는 물막이가 보이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합장을 하고 탑돌이를 하면서도 결국 자연을 향한 탐욕만 들키고 말았다. 휙, 한 가닥 바람이 분다. '깨어나라' 죽비(竹비)로 어깨를 '툭' 치는 듯하다.

떠날 때 그냥 떠났어야 한다. 탐욕을 버리려는 탐욕으로, 그래서 귀에서 우는 귀뚜라미를 잠재우려는 욕심으로 떠나지 말았어야 한다. 바람이 된 부처님 '깨어나라'하고 아무리 죽비를 내 두른다해도, 탑돌이를 할 때 잠시 잠자던 귀뚜라미는 깨어나 더 크게 울어댄다. 신은 내게 그만큼의 돌계단만 허용하신 모양이다. 거기쯤의 자갈밭에 던져버리신 모양이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없이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雪日'의 다음 부분)


그러나, 내려오는 길에 고사리만 한 움큼 훔쳐 품에 안고 왔다.

(2001.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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