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이다. 3학년 ‘범생이’ 하면 대번에 떠오르는 영재가 교무실로 뛰어 들어왔다. 입에는 웃음을 흘리고 있지만, 눈에는 ‘글썽’ 구슬이 맺혔다. 영재가 감싸 쥔 새끼손가락에 그 아이 눈에 맺힌 눈물방울만큼 빨간 핏방울이 솟았다. 누가 봐도 대수롭지 않은 상처다.
“정말 별거 아닌데요. 소독할 수 있는 약 좀 발라 주세요.”
허둥대는 모습이 수염발 잡힐 나이인 고3으로 보기엔 너무 귀엽다. 하긴 이 녀석은 턱 언저리에 솜털도 없다. 계집애처럼 곱상한 피부에 만날 때마다 웃음을 흘린다. 짧게 깎은 머리가 아니라면 영락없이 계집애다. 이 녀석은 시간을 돈보다 더 소중하게 여긴다. 책을 끼고 산다. 눈썹만한 틈이라도 그냥 버리는 법이 없다. 게다가 그 흔한 무스도 칠할 줄도 모를 뿐 아니라, 교복 저고리에 단추 한 번 놓친 적이 없는 녀석이다.
“왜 그라니?”
“문에 쳤어요.”
“아구 이 피 좀 봐.”
나는 어쩌나 보려고 좀 허풍을 떨어 보았다.
“에이 별거 아녜요.”
“인마, 피가 막 나는데.”
“아니 쫌밖에 안나요.”
그 때, 같은 3학년 중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범순이’ 하나가 뒤따라 들어 왔다. 현영이다.
“너는 뭐여?”
“선생님 쟤 피나서 어떡해요?”
“니가 뭔 상관여?”
짐짓 시큰둥해서 바라보니 얼굴이 완전히 사색이다. 안쓰러워 죽겠다는 얼굴이다. 발을 동동 구른다. 다친 애보다 더 아픈 표정이다. 웃긴다. 다친 녀석보다 더 큰 눈물방울을 달고 있다.
“니가 그랬니?”
“아니 그냥 쟤가 인문사회실에서 나오다가 문틈에 쳤어요.”
“그런데 왜?”
현영이가 안쓰러워하는 이유가 슬그머니 재미있었다. 나는 어느새 밴드로 그 녀석 손가락을 싸매고 있었다. 영재 얼굴을 훔쳐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열없이 씩 웃는다.
“선생님 쟤가요 문에 쳤는데요. 인문사회실 출입문이 문제가 많아요.”
사뭇 원망하는 말투다. 퉁명스럽기까지 하다. 금방 눈물방울이 굴러 내릴 기세다. 발을 동동 구르며 또 한마디 한다.
“선생님 꼭꼭 잘 매주세요.”
“그런데 왜 니가 그렇게 안달인데?”
대답이 없다. 입만 삐쭉 내민다. 영재를 바라봤다. 난처한 듯 웃음을 찌르르 흘린다. 나는 다시 그 녀석 가슴을 콕 찔러 보았다.
“니가 다쳤는데 쟤가 왜 저런다니?”
‘잘 모르겠는데요.’ 이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 녀석 대답이 웃긴다.
“에이 선생님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이 아무것도 아닌데 왜 그러세요.”
“그려, 아무것도 아녀?"
"……."
" 다 됐어.”
서둘러 마감했다. 녀석은 하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물색모르는 현영이 얼굴은 아직도 사색이다. 안쓰러워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다. 입술 언저리가 ‘제가 다친 게 나았을 것’이란 말이라도 튀어나올 듯 실룩거린다.
아이들이 슬금슬금 교무실을 나가 버렸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요.’와 ‘아무것도 아녜요.’의 차이점을 곰곰이 생각하며 계단을 올랐다. 한 계단을 오르면서 나도 메마른 입술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 이놈들이 …….”
(2005.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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