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축 읽는 아이(나)

보리밥이 싫은 이유

느림보 이방주 2002. 8. 4. 10:05
김선생님한테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그런데 또 보리밥 얘기를 한다. 점심은 먹어야 하지만 보리밥은 싫다.

사실 오늘은 여름 휴가 마지막 날이다. 방학을 맞아 꼬박 일주일을 편히 잘 지냈다. 이번 여름은 아무데도 가지 않고 방에서 뒹굴면서 읽고 싶은 책을 읽으며 한가롭게 지냈다. 하루 90분 정도를 사이버 연수에 참여해야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고스란히 일주일을 쉬어본 방학도 나에게는 드물다. 내일부터 가슴의 모든 기력을 긁어서 피를 토하듯 쏟아 놓아야 하는 수업이 시작되기 때문에 마지막 날인 오늘은 사실 금싸라기 같은 날이다. 그러나 내일의 순조로운 출발을 위하여 수업 준비를 해야한다. 나 자신도 감동할 수 없는 수업은 아이들 졸음만 부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에 나왔는데 보리밥의 성찬을 대접받게 되었다.

오후 한 시가 되기를 기다려 몇 분 선생님들과 학교 앞 야트막한 언덕 너머에 있는 '산너머'라는 보리밥집에 갔다. '꽁보리밥'집인데 기다란 나무 탁자가 서늘하게 느껴진다. 커다란 홀에 윙윙 돌아가는 두 대의 에어컨이 초겨울 날씨로 만들어 버렸다. 보리밥은 한여름에 그것도 풋고추를 쥔 주먹으로 이마의 땀을 훔쳐가며 먹어야 제 맛일 텐데, 서늘한 이 날씨가 참 맛을 낼 수 있을까?

다른 분들은 모두 보리밥을 주문했으나 나는 고집스럽게 칼국수를 주문했다. 반쯤 붉은 고추가 세로로 쭉쭉 쪼개져 나자빠진 열무김치, 숟가락에 착착 감기는 찹쌀고추장, 어른 만한 풋고추, 애호박 섞인 매콤한 풋고추된장찌개나 나오면 족할 듯한데, 쌀밥에나 어울릴 듯한 고구마 줄거리 나물, 다래순 묵나물, 줄기가 가느댕댕한 집콩나물무침, 참기름 두른 배추겉절이까지 소담하게 담겨 나온다. 더구나 그것들이 담긴 그릇도 고졸한 멋이 솔솔 풍긴다. 옛날 먹던 검고 오돌돌한 보리밥이 아니라, 하얗게 훌닦여서 쌀이 삼 할 정도 섞인 현대식 보리밥이다. 오히려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나는 보리밥을 흘끔거리며 뜨거운 칼국수 한 대접을 다 비웠다.

사람들은 인정 어린 옛날이 그리워서 보리밥을 먹는다고 한다. 사람들은 낭만적인 추억에 잠기기 위해서 별미로 보리개떡을 먹는다고 한다. 어느 여성 공직 후보자는 고구마를 삶아먹으며 대학을 다녔다고 자신의 서민성을 자랑한다. 칼국수만 먹던 옛날이 그리워서 다른 사람에게도 칼국수를 권하면서 서민의 흉내를 낸 대통령도 있다. 그러고 보니 보리밥, 보리개떡, 칼국수, 고구마 먹은 과거가 서민임을 증명하는 빼놓을 수 없는 이력서인 모양이다. 그리고 남들은 그렇게 먹고살던 옛날의 가난이 그만큼 자랑스러운 모양이다. 나는 자랑할 수 있을 만큼만 가난했던 그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보릿고개가 아직 먼 한겨울인데도 보리밥이라도 먹을 수 있는 아침을 기다려 본 사람도 그게 추억일까? 점심에 보리개떡 한 조각을 들고 한 15분을 걸어가서 사촌형제와 점심을 에워본 사람도 보리개떡이 구수한 추억일까? 보리 베기 전 온상에서 팍팍한 씨고구마를 캐어 옆구리에 돋은 새살을 도려 먹다가, 그것도 흡족해 하시며 바라보시는 어머니의 찌적찌적한 눈이 어린 가슴을 도려내던 것도 기억하고 싶은 향수일까? 혁명정부가 따비를 일구는 집에 한 포씩 주던 밀가루에 밀기울을 반이나 섞어 넓죽넓죽한 국수가닥이 목구멍을 까칠까칠하게 훑고 내려가던 아픔도 기억하고 싶은 서민의 표상일까? 그렇게 아프고 구질구질한 가난도 자랑일 수 있을까?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어린 시절의 길고도 지루했던 가난이 부끄럽다. 초등학교 시절, 어느 시인의 말처럼 알프스보다 높은 보릿고개의 주림이 힘겨워 십리나 되는 논두렁길을 긴 팔 늘어트리고 걷던 하교길의 어찔어찔하던 기억이 한없이 부끄럽다. 검붉고 토실토실하게 올라오는 찔레순, 배때기가 오동통한 삘기를 만나는 횡재가 부족해서, 논두렁에 연하고 실하게 돋아 오르던 개망초, 아카시아 새순 같은 것들이 모두 예사롭게 보이지 않던 옛날의 내 눈이 말할 수 없이 부끄럽다. 가난은 운명이 아니라 풍요로운 삶에 대한 의지의 부족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연자방아 디딜방아를 다 갖추고, 두 머슴이 지키는 행랑채에 지나는 길손을 재워 보내던 전설같이 요족하던 이야기를 어머님께 듣기도 했던 나는 어린 나이에도 누군가 자신의 자리를 충실히 지키지 못해 밑바닥에 떨어진 '은총의 돌층계'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 가난이 더욱 부끄러웠다. 나의 그런 부끄러움은 어린 시절에 학교 오가는 길에 들밥을 먹는 어른들의 호의를 한 번도 어린 아이처럼 밝고 자신만만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가난은 내 어린 시절을 끝없는 열등의식 속으로 몰아 넣었다. 가난에서 온 육체적 허약함은 마음까지도 여리고 힘없이 만들어 버렸다. 그런 심약함은 내게 무슨 일이든지 대결하여 승부를 가리려는 도전 의지를 빼앗아 갔다. 내가 디디고 선 땅바닥이 그냥 푹 가라앉아 버릴 것 같은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거기에 그런 나의 속사정을 눈치챈 이들은 나를 더욱 자괴감에 빠지게 했다. 학습장이나 크레파스를 챙겨 주시던 초등학교 2학년 때 선생님, 강냉이 가루를 한 되박 더 담아 주던 3학년 때 선생님, 수련장이나 전과를 챙겨 주시던 선생님, 하얀 쌀밥이 날마다 소화 안되던 5학년 때 짝꿍 영목이, 마을에 잔치가 있을 때마다 뒤꼍에서 남몰래 불러주시던 숙모님……. 짐승처럼 주린 배를 채우고 돌아설 때의 부끄러운 뒤꼭지가 나를 끝없는 열등의식의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가난은 나를 패기의 가난뱅이로 만들었다. 가난은 또 나를 정열의 가난뱅이로, 사고(思考)의 가난뱅이로, 낭만의 가난뱅이로, 이상의 가난뱅이로 만들었다. 철나면서 그런 철빈에서 벗어나게 되었는데도 나는 굳이 과거의 가난을 감추고 싸 바르면서도 가난 때문에 얻은 나의 비좁은 헤아림을 버릴 수 없었다. 가난의 부끄러움에서 배운 열등 의식은 성장한 다음에도 나를 부딪쳐보지도 않고 주저앉아 버리는 졸렬한 남자로 만들었다. 가난은 이렇게 내 삶의 커다란 장애물이다. 가난은 내 비좁은 가슴의 범인이고, 졸렬한 마음의 범인이다. 그 가난의 흔적들은 성인이 되고, 가난을 느낄 필요가 없는 오늘에도 나를 비틀어 짜고 있다.

나에게 보리밥은 곧 가난의 발자국이다. 보리밥은 마음의 가난의 씨앗이다. 보리밥은 나의 추억의 치부이다. 사실 고구마나, 보리개떡이나, 칼국수는 남과 가난으로 비교되지는 않는다. 그건 집에서만 먹어도 되기 때문이다. 보리밥은 정말 피할 수도 없고 드러낼 수도 없었던 가난의 표상이다.

나는 이렇게 부끄러운 가난을 뒤돌아보기 싫다. 지금에 와서도 그건 추억이었노라고 생각하기도 싫다. 나는 이런 가난을 다시 생각나게 하는 보리밥이 가슴 아프다. 보리밥을 보면 감추고 싶었던 내 과거를 들킨 것 같아 가슴이 저리다. 보리밥을 보면 나의 좁아터진 앞자락을 드러내 보인 것 같아 싫다.

어떤 사람은 어린 시절의 가난이 자랑스럽기도 하겠지만, 아직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식탁에 흘린 밥알이 아까운 나는 그 시절의 가난이 정말 못 견디게 부끄럽다.
(2002. 8.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