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나무가 되고 싶다. 대관령에 찬바람에도 잘 견디어 내고, 척박한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도 고고하게 서 있는 그런 소나무가 아니라도 좋다.
동해안 하얀 모래 띠를 따라 검푸르게 성으로 모여 서서 하얀 파도를 바라보는 그런 소나무가 아니라도 좋다. 문의면 문덕리 월리사를 감싸안고
다북다북 모여서 있는 그런 포근한 소나무가 아니라도 좋다. 대청 호반 강안(江岸)을 따라 언덕배기에 암갈색 밑동으로부터 푸른 하늘을 향한 발간
꿈을 가지고 쭉쭉 뻗어 지조처럼 서있는 그런 소나무가 아니라도 좋다.
나는 그냥 한 그루 잔솔이라도 소나무가 되고 싶다. 우리 동네 구룡산 기슭에 커다란 서양소나무 아래라도 그냥 그렇게 한겨울 푸르름만 잃지 않으면 된다. 우리 고향 어머니 산소 곁에서 해마다 두어 뼘씩 커 가는 소나무처럼 그냥 그렇게 커갈 수만 있으면 된다. 한여름이라도 해 일찍 지는 응달에서 볕바른 쪽으로 기울어지는 가지 긴 소나무처럼 그냥 그렇게 긴 가지 하나만 축축 처질 수만 있으면 된다. 가지가 가늘어 괴롭겠지만, 우리에게 멋있어 보이는 처진 소나무라도 가는 가지 끝에 겨우 한 줌 푸른 솔잎만 쥐고 있을 수 있으면 된다.
추위도 바람도 다 이겨내고, 수백 년 마을을 지키는 장수하는 소나무가 아니라도 좋다. 마을 앞 신당에 서서 수호신처럼 뭇 사람들의 절을 받지 않아도 좋다. 뿌리로 송하주가 되고, 잎으로 송엽주가 되고, 옹이로 송절주가 되고, 열매로 송실주가 되어 그 향기만 전할 수 있으면 된다.
나는 사람들 키보다 작은 반송(盤松)이라도 소나무가 되고 싶다. 땅속뿌리로부터 소복소복 가지가 뻗어 나와 삐죽삐죽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또 한 그루 목련이 되고 싶다. 자목련도 좋고 산목련도 좋다. 나는 그냥 한 그루 목련이 되고 싶다. 떨어지는 꽃이 추하다하더라도 나는 그냥 한 그루 목련이 되고 싶다.
진천 잣고개 대흥사 뜰에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목련처럼 그렇게 소담한 꽃이 아니라도 좋다. 바람이 손끝을 찌르지 않고 지나가는 봄날을 가려 한두 송이라도 피어날 수만 있으면 된다. 하얗고 도톰한 흰나비의 날개 같은 꽃잎 사이로 노란 꽃술이 소복하게 보이기만 하면 된다. 고향집 돌아가는 산모롱이에 언뜻언뜻 보이던 어머니 하얀 치맛자락의 영상만 보이면 된다. 소백산 형제봉 햇볕 바른 골짜기에 피어나는 듬성한 산목련처럼 한철 늦게 피어나더라도 먼 산 바라보며 갸웃 고개짓하는 노루새끼 맑디맑은 동공에 하얗게 그림질 수만 있으면 된다.
산사를 감고 있는 꽃잎 같은 봉우리들의 한가운데에 커다란 꽃술 같이 피어난 각연사 대웅전 뜰의 목련이 아니라도 좋다. 초가집 돌담 너머로 한두 송이라도 얼굴을 내밀 수 있으면 된다. 그냥 그렇게 그리움이나 전하는 목련이 되고 싶다.
나는 또 한 그루 동백이 되고 싶다. 바닷바람 마주 바라보며 안으로 타는 그리움을 빨갛게 드러낼 수 있는 한 그루 동백이 되고 싶다. 검푸르고 반질반질 윤기 흐르는 소복한 잎새들 속에 안으로 키워온 빨간색 탐욕을 감출 수 있는 한 그루 동백이 되고 싶다. 잔가지 얽힌 속으로 옥색으로 맺혀진 단단한 죄의 열매를 감출 수 있는 한 그루 동백이 되고 싶다.
잿빛 절 집을 뒤덮을 듯 푸르고 붉게 피어오르는 선운사 동백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낮에도 어둡고 칩칩해지도록 하늘을 가린 보길도 당숲의 무자비한 동백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정말 동백인가 싶게 한 아름씩이나 되는 나무가 숲을 이룬 보길도 뾰족산 아래 자갈밭 동백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바람 마주쳐 바람날 것 같은 여인의 한 같은 오동도 동백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냥 신당에 한 그루 심겨져 열아홉 처녀의 소망이나 실어주는 그런 동백이면 된다. 그냥 절 집 마당에 심겨져 비구니의 믿음이나 지켜주는 그런 동백이면 된다. 그냥 젊은이들이 뼈를 기르는 학교 뜰에 심겨서 그들의 타는 열정과 사랑과 절조만 바라볼 수 있으면 된다.
나는 한 그루 동백이 되고 싶다. 믿음과 열정과 사랑과 절조나 바라볼 수 있는 그냥 그런 동백이 되고 싶다. 소망이나 담아주는 그런 동백이 되고 싶다.
그러나 내가 어찌 향기를 전하는 소나무가 될 수 있겠는가? 내가 어찌 그리움을 전하는 목련이 될 수 있겠는가? 내가 어찌 소망을 전하고 사랑과 믿음을 지키는 동백이 될 수 있겠는가?
나는 그냥 흔해 빠진 꽃이라도 진달래가 되었으면 좋겠다. 응달에서 오히려 잘 자라고, 척박한 땅에서 오히려 붉게 피어나 산야에 지천으로 흩어진 진달래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그 치열한 생명력으로 죽음처럼 다가오는 북쪽을 향한 응달에서 마주치는 찬바람도, 툰드라처럼 얼어붙은 동토도 다 견딜 수 있는 진달래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한 맺힌 두견이 밤새워 울어 울어 피 토하듯 뚝뚝 떨어진 붉은 진달래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냥 노랗게 흐드러지는 개나리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아무데나 떨어져 씨를 세우고, 아무데나 휘어져 뿌리를 내리고는 아무렇게나 휘청거리며 피어나는 개나리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그 이름은 부끄럽지만, 참 요즘에는 '개'만큼 어둠의 손님을 몰아내는 용기를 가진 사람도 드무니 이름이 부끄러우면 어떤가? 그냥 그래도 '나으리'이니 무에 부끄럽겠는가? 나는 그냥 그렇게 흐드러지는 개나리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또 계절마다 껍질 벗는 자작나무가 되고 싶다. 벗어 던져야 할 껍질 많은 세상에서 때마다 계절마다 껍질 벗고 새롭게 태어나는 백화가 되고 싶다. 벗는 껍질이 쓰리고 아프겠지만, 날마다 굵어지는 몸뚱아리를 위안으로 그렇게 온 껍질 다 벗어 던지고 팔만 대장경 경판도 되고, 천마총 그림 물감도 되는 자작나무가 되고 싶다.
내 어찌 동토를 견디어 진달래를 바라랴. 내 어찌 현란한 개나리를 바라랴. 내 어찌 껍질 벗는 백화를 바라랴. 그래도 나는 그냥 그런 한 그루 나무가 되고 싶다.
(2002. 4. 5.)
나는 그냥 한 그루 잔솔이라도 소나무가 되고 싶다. 우리 동네 구룡산 기슭에 커다란 서양소나무 아래라도 그냥 그렇게 한겨울 푸르름만 잃지 않으면 된다. 우리 고향 어머니 산소 곁에서 해마다 두어 뼘씩 커 가는 소나무처럼 그냥 그렇게 커갈 수만 있으면 된다. 한여름이라도 해 일찍 지는 응달에서 볕바른 쪽으로 기울어지는 가지 긴 소나무처럼 그냥 그렇게 긴 가지 하나만 축축 처질 수만 있으면 된다. 가지가 가늘어 괴롭겠지만, 우리에게 멋있어 보이는 처진 소나무라도 가는 가지 끝에 겨우 한 줌 푸른 솔잎만 쥐고 있을 수 있으면 된다.
추위도 바람도 다 이겨내고, 수백 년 마을을 지키는 장수하는 소나무가 아니라도 좋다. 마을 앞 신당에 서서 수호신처럼 뭇 사람들의 절을 받지 않아도 좋다. 뿌리로 송하주가 되고, 잎으로 송엽주가 되고, 옹이로 송절주가 되고, 열매로 송실주가 되어 그 향기만 전할 수 있으면 된다.
나는 사람들 키보다 작은 반송(盤松)이라도 소나무가 되고 싶다. 땅속뿌리로부터 소복소복 가지가 뻗어 나와 삐죽삐죽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또 한 그루 목련이 되고 싶다. 자목련도 좋고 산목련도 좋다. 나는 그냥 한 그루 목련이 되고 싶다. 떨어지는 꽃이 추하다하더라도 나는 그냥 한 그루 목련이 되고 싶다.
진천 잣고개 대흥사 뜰에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목련처럼 그렇게 소담한 꽃이 아니라도 좋다. 바람이 손끝을 찌르지 않고 지나가는 봄날을 가려 한두 송이라도 피어날 수만 있으면 된다. 하얗고 도톰한 흰나비의 날개 같은 꽃잎 사이로 노란 꽃술이 소복하게 보이기만 하면 된다. 고향집 돌아가는 산모롱이에 언뜻언뜻 보이던 어머니 하얀 치맛자락의 영상만 보이면 된다. 소백산 형제봉 햇볕 바른 골짜기에 피어나는 듬성한 산목련처럼 한철 늦게 피어나더라도 먼 산 바라보며 갸웃 고개짓하는 노루새끼 맑디맑은 동공에 하얗게 그림질 수만 있으면 된다.
산사를 감고 있는 꽃잎 같은 봉우리들의 한가운데에 커다란 꽃술 같이 피어난 각연사 대웅전 뜰의 목련이 아니라도 좋다. 초가집 돌담 너머로 한두 송이라도 얼굴을 내밀 수 있으면 된다. 그냥 그렇게 그리움이나 전하는 목련이 되고 싶다.
나는 또 한 그루 동백이 되고 싶다. 바닷바람 마주 바라보며 안으로 타는 그리움을 빨갛게 드러낼 수 있는 한 그루 동백이 되고 싶다. 검푸르고 반질반질 윤기 흐르는 소복한 잎새들 속에 안으로 키워온 빨간색 탐욕을 감출 수 있는 한 그루 동백이 되고 싶다. 잔가지 얽힌 속으로 옥색으로 맺혀진 단단한 죄의 열매를 감출 수 있는 한 그루 동백이 되고 싶다.
잿빛 절 집을 뒤덮을 듯 푸르고 붉게 피어오르는 선운사 동백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낮에도 어둡고 칩칩해지도록 하늘을 가린 보길도 당숲의 무자비한 동백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정말 동백인가 싶게 한 아름씩이나 되는 나무가 숲을 이룬 보길도 뾰족산 아래 자갈밭 동백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바람 마주쳐 바람날 것 같은 여인의 한 같은 오동도 동백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냥 신당에 한 그루 심겨져 열아홉 처녀의 소망이나 실어주는 그런 동백이면 된다. 그냥 절 집 마당에 심겨져 비구니의 믿음이나 지켜주는 그런 동백이면 된다. 그냥 젊은이들이 뼈를 기르는 학교 뜰에 심겨서 그들의 타는 열정과 사랑과 절조만 바라볼 수 있으면 된다.
나는 한 그루 동백이 되고 싶다. 믿음과 열정과 사랑과 절조나 바라볼 수 있는 그냥 그런 동백이 되고 싶다. 소망이나 담아주는 그런 동백이 되고 싶다.
그러나 내가 어찌 향기를 전하는 소나무가 될 수 있겠는가? 내가 어찌 그리움을 전하는 목련이 될 수 있겠는가? 내가 어찌 소망을 전하고 사랑과 믿음을 지키는 동백이 될 수 있겠는가?
나는 그냥 흔해 빠진 꽃이라도 진달래가 되었으면 좋겠다. 응달에서 오히려 잘 자라고, 척박한 땅에서 오히려 붉게 피어나 산야에 지천으로 흩어진 진달래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그 치열한 생명력으로 죽음처럼 다가오는 북쪽을 향한 응달에서 마주치는 찬바람도, 툰드라처럼 얼어붙은 동토도 다 견딜 수 있는 진달래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한 맺힌 두견이 밤새워 울어 울어 피 토하듯 뚝뚝 떨어진 붉은 진달래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냥 노랗게 흐드러지는 개나리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아무데나 떨어져 씨를 세우고, 아무데나 휘어져 뿌리를 내리고는 아무렇게나 휘청거리며 피어나는 개나리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그 이름은 부끄럽지만, 참 요즘에는 '개'만큼 어둠의 손님을 몰아내는 용기를 가진 사람도 드무니 이름이 부끄러우면 어떤가? 그냥 그래도 '나으리'이니 무에 부끄럽겠는가? 나는 그냥 그렇게 흐드러지는 개나리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또 계절마다 껍질 벗는 자작나무가 되고 싶다. 벗어 던져야 할 껍질 많은 세상에서 때마다 계절마다 껍질 벗고 새롭게 태어나는 백화가 되고 싶다. 벗는 껍질이 쓰리고 아프겠지만, 날마다 굵어지는 몸뚱아리를 위안으로 그렇게 온 껍질 다 벗어 던지고 팔만 대장경 경판도 되고, 천마총 그림 물감도 되는 자작나무가 되고 싶다.
내 어찌 동토를 견디어 진달래를 바라랴. 내 어찌 현란한 개나리를 바라랴. 내 어찌 껍질 벗는 백화를 바라랴. 그래도 나는 그냥 그런 한 그루 나무가 되고 싶다.
(2002.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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