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축 읽는 아이(나)

눈길에서 -나의 문학, 나의 고뇌 -

느림보 이방주 2003. 7. 24. 10:32

눈 쌓인 길이라도 생각처럼 그렇게 심하게 미끄러운 건 아니다. 어제 아침부터 내리던 진눈깨비가 오후에는 함박눈으로 바뀌었다. 어제 돌아오는 길에 비하면, 기온이 뚝 떨어져 밤사이 포근하게 쌓인 눈길이 오히려 안전하다. 아침까지도 눈발이 화톳불 참나무 재티 날듯 햇살에 반짝인다. 차들이 모두 그림처럼 질서를 지킨다. 약속이나 한 듯이 좌우 대열을 맞추어 기어가는 모습이 20년 전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통일 행진' 보는 듯하다.

사람들은 이런 눈 쌓인 풍경을 바라보며, 농담처럼 시상(詩想)이 떠오른다고 한다. 詩, 그건 태초의 문학이다. 속된 세상의 아름다움을 신에게 전하는 주술이다. 가슴에 하나씩 신을 안고 사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을 보면 시상이 떠오르게 마련이겠지. 그래서 사람들은 문학은 기질이 아니라 본능이라 하나 보다. 문학은 대 숲에 대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라고 소리쳤다던 옛 이야기가 아니라도 본 것을 드러내고 싶은 '죽음에 닿아 있는 욕구', 바로 그것이다. 해 마다 보는 눈 쌓인 풍경을 바라보면서 시상을 떠올리는 게 사람이다. 본 것이 있고, 본 것에 대한 사색이 있고, 사색에 옷을 입히면 그것이 시가 되겠지. 그렇게 문학은 햇살에 눈발이 반짝이듯 반짝이면서 포근히 쌓여 가는 것인 줄 알았다. 문학은 그렇게 질서 있고 조심스럽게 행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인 줄만 알았다.

율량동을 지나 시내를 벗어났다. 차들은 조금 더 속력을 낸다. 정취 있는 옛길을 택할까 하다가 안전한 큰길로 가기로 했다. 발산교를 지나 고개를 넘으면 증평에서 오창, 옥산으로 이어지는 훤한 들판이 터진다. 이제 그 들판을 가르며 길이 나고, 가을 지낸 수수밭처럼 전봇대가 어수선하다. 눈에 덮인 들판을 바라보는 것도 운치 있는 일이다. 산, 들, 들판 한 가운데 있는 마을의 지붕들, 논 가운데 짚가리, 개울가 버드나무가 모두 하나 같이 소복이 눈에 덮여 백색의 천지를 이루고 있다.

제도나 규범을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등단'이라는 고개를 만들어 놓고, 호젓한 오솔길을 걸으며 사색에 잠기거나, 오롯이 둑길에 서서 연잎을 구경하며 혼자만의 정취에 심취한 문인들을 유혹한다. 그러나 고갯길에 오르면 들판이 보이듯 삐죽삐죽 솟아오른 마른 수수깡을 발견하고 훤하기만 한 것도 아닌 세계에 실망하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이 온통 백색만은 아닌 것에 절망하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이다.

눈은 청주국제공항 앞 교차로에도 녹다가 살짝 얼어 유리알처럼 윤이 나는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다. 해병대 출신 할아버지가 추위에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붉은 모자의 노병은 과거의 패기를 잃지 않고 젊고 멋진 손짓으로 차들을 보내고 가로막기도 하곤 한다. 내게도 멋있는 손짓으로 얼음 위를 돌아가도록 허락해 준다. 조심스럽게 좌회전을 했다. 차들은 어느 하나도 질서를 잃지 않고 행진을 계속한다.

오늘날의 문학도 이렇게 질서 있는 행진을 하고 있을까? 글은 과연 진정한 글인가? 세상을 관조하지 못하고 드러나는 현상에만 현혹되어 있는 것은 언어 유희에 불과하다. 옛날 문인들이 하던 정치처럼, 정치가 문학을 닮아 자유스러우면서도 격조 높은 품격을 지녀야 하는데 정말 그런가? 도리어 문학이 정치를 닮아가고 있지나 않은가? 문학한다는 이들이 정치하는 이들을 닮고 있지나 않은가? 문학하는 이들은 그들처럼 패거리를 짓지나 않는가? 그들에게도 관조와 인식 대신에 패거리가 있고, 논리와 형상 대신에 협잡과 궤변이 있지나 않을까? 노병은 패거리들이 모두 흩어져 제게 맞는 길을 갈 수 있도록 바른 손짓으로 길을 알려 주고 있는가? 이런 눈길에도 관조와 사색의 길로 안전하게 좌회전을 할 수 있도록 멋진 손짓을 보낼 수 있는가?

오창 학교 앞을 지나 모정리에 들어선다. 다리 위는 더욱 심하게 미끄럽다. 차가 교행을 할 때는 더욱 조심스럽다. 그러나 시골로 갈수록 산은 더욱 아름답고,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를 것처럼 훈훈하다. 마을에서 노인들이 삽을 들고 나와 모래를 파서 찻길에 던진다. 서쪽 산줄기 아래 동향으로 들어선 마을이 죽 이어진다.

나의 문학은 올곧게 나가고 있는가? 조간에서 박경리 선생이 오늘날 문학을 삶의 위안으로 삼는 유희적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고 아프게 반성한 글을 읽었다. 나의 글은 생활의 넋두리나 아닌가? 나의 수필은 자신에 대한 실망을 포장하는 3차 포장지는 아닌가? 나의 글은 부당한 행동을 정당화하는 비겁한 궤변은 아닌가? 나의 나타와 비열한 삶의 낯뜨거운 정당화는 아닌가? 나의 글은 자조와 열등 의식의 돌파구는 아닌가? 내 글에는 세계에 대한 투철한 인식을 담고 있는가? 박경리 선생의 말처럼 이런 모든 것들을 위안 받기 위한 언어 유희는 아닌가? 나의 문학은 넋두리, 궤변, 변명, 언어유희의 나락으로 미끄러지고 있는 건 아닌가?

고속도로 육교 아래는 더욱 심하게 얼어붙었다. 좁고 굽이 잦은 길을 간을 졸이며 돌고 돌 때 뒤에서 비상등을 번쩍이며 덤프 트럭이 바짝 붙는다. 바로 좌회전하려면 엔진브레이크를 걸어 정차를 해야 할텐데 만약의 사태를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쪽 끼친다. 다리에 힘까지 빠진다. 나는 새로운 고뇌에 빠진다. 안전한 방향으로 회전하기 위하여 방향 지시등을 켰다. 노련한 트럭은 멀찍이 거리를 유지한다.

가까스로 좌회전을 하고 사무실 마당에 차를 세우고 길의 규모보다 많은 차량의 행렬 너머로 펼쳐진 들판의 설경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이 아름다움을 어떻게 내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세상의 모든 추한 것이나 아름다운 것이나 모두를 하나로 덮은 이 아름다움은 어떻게 객관화할 수가 있을까? 나의 문학의 종착점은 어디인가? 오늘 아침 눈길처럼 그렇게 미끄러움의 곡예를 거친 다음에야 도달할 수 있는 곳인가? 아니 나의 문학이 정류하고 있는 여기는 과연 어떤 곳인가? 이렇게 눈 덮인 아름다운 산야인가?

나의 문학은 과연 텅 빈 껍데기는 아닐까? 두렵다. 내가 머물러 있는 눈 쌓인 마당이 두렵다. 눈길에서 나의 고뇌는 가슴을 찌르는데, 뜨거운 커피는 더욱 뜨겁고, 흰눈은 내 안경을 더욱 차갑게 한다. 바람 한 점도 없는데 뒷산의 참나무에서 한 무더기 눈이 쏟아진다.
(2002. 1.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