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아침, 산에 오르면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이 있다. 이 아침에 만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봄의 보송보송한 느낌이다. 어둑어둑한 새벽에 부서진 솔잎이 깔린 오솔길을 걸으면 흡사 양탄자를 밟는 듯한 감각이 부끄러움으로 전해 온다. 솔잎이 깔리지 않은 길이라도 오솔길에는 아직도 습습한 물기가 남아 있다. 날이 풀려 말랑말랑해진 오솔길은 역시 진한 수줍음으로 나와 만난다.
작은 날망에 오르면 산기슭이 온통 소복소복 흰 눈이 쌓인 듯하다. 보름을 지난 새벽달 빛은 희다 못해 처연하다. 그 처연한 달빛은 솔잎에도 꽂히고, 휘젓는 나의 팔에도 하얗게 내려앉는다. 달빛은 청솔의 성을 뚫고 기슭에 마구 피어난 진달래에 하얗게 묻어난다. 달빛이 온통 하얗게 묻어있는 진달래는 그 붉은 정열을 잃고 봄의 시름을 앓는 듯하다.
솔가지들이 잘려 나간 중간 날망에 오르면 시가지의 불꽃이 아름답다. 상가의 간판들이 불을 내리고, 주택가에 하나 둘 불이 켜지고, 간선 도로에 달리는 자동차들의 불빛이 수채화처럼 흐른다. 심호흡을 크게 하는 동안 시가지 불빛은 벌써 하나 둘 빛을 잃고 다시 우중충한 회색의 삶으로 돌아온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이렇게 밤이 아름답다. 한 낮에 감추어 두었던 빛의 아름다움을 한밤이면 드러내고, 동이 터지면 꼬리를 내리고 다시 회색의 다툼 속으로 자신을 숨긴다.
상봉에 올라 팔을 크게 흔들며 체조를 한다. 그야말로 전쟁을 치르는 마음으로 윗몸 일으키기를 결사적으로 한다. 이마에 땀에 흘러 안경에 맺힌다. 허벅지가 땡땡하다. 동쪽 멀리 하늘과 맞닿은 선도산 능선이 선명하다. 산 가까이 하늘은 더욱 붉어지기 시작하고 먼 하늘은 그 파란빛을 드러낸다.
하늘이 파래지면 기슭에 진달래의 붉은 빛은 더욱 불타는 듯하다. 옛날 진달래는 해마다 베어내서 소복하기는 해도 기슭에 깔리더니 이제는 키가 껑충 커서 타는 불꽃이 옛날보다 더 활기차다.
진달래는 대체 한겨울 동안 어떤 사색으로 지냈기에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모롱이에서
이렇게 타는 정열을 드러내는 것일까?
진달래는 대체 한겨울 동안 응달진 동토에서 어떤 색깔의 물을 길어 올렸기에
이슬비 간간이 뿌리는 해토머리에
이렇게 끔찍한 아픔을 드러내는 것일까?
진달래는 대체 어떤 열기로 한겨울을 모진 바람을 견디었기에
이렇게 사무치는 그리움을 드러내는 것일까?
산 중턱에는 산 벚꽃이 소녀의 젖멍울 같은 봉오리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촌스럽지만 화사하게 늘어진 산벚은 무성뚝에 마구 피어나는 꽃 터널보다 차라리 청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송이 송이가 소담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안개처럼 어렴풋한 모습으로 군데군데 무더기로 그 고고함을 자랑하는 산목련도 봄 아침의 축제에 한 몫 더한다. 화사하던 개나리는 어느새 파란 잎사귀가 돋아서 이미 천박해 보인다.
사람들이 사는 세계는 밤에 화려하다가 아침이 되면 잿빛 의혹의 세계로 돌아가는데, 자연은 아침이 오면 퇴색되었던 정열과 아픔과 그리움을 이렇게 아름다운 색깔로 드러내 놓는다. 겨울이 봄을 준비하듯 밤은 아침을 준비하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밤에 무엇을 준비하기에 그토록 현란한 빛으로 자신을 감추는가?
아침에 보여주는 건 결국 잿빛뿐인 것을…….
사람들은 겨울에 무엇을 준비하기에 그토록 컴컴한 사색으로 해를 넘기는가?
봄을 맞아 보이는 건 결국 새로운 다툼뿐인 것을 …….
봄을 맞아 피는 꽃이 부럽다.
동이 터지면 제 빛을 내는 꽃이 부럽다.
사람도 그렇게 밤새 준비한 것들을 아침이 되면 감춤 없이 보여줬으면 좋겠다.
사람도 그렇게 겨우내 깊은 사색으로 준비한 것들을 봄이 되면 한번씩 화사하게 보여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자신이 준비한 것만큼 어김없이, 자신이 사색한 것만큼 변함 없는 색깔로, 자신이 쌓은 것만큼의 두께로, 자신이 수용한 것만큼의 보드라움으로, 그렇게 숨김없이 보여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얼마만큼 부끄러운 색깔일까?
그러면 나는 얼마만큼 아픔의 색깔일까?
그러면 나는 어떤 그리움을 드러낼까?
나의 봄에 만나는 나는 과연 어떤 빛깔을 담고 있을까?
(2002. 4. 3.)
브레이크 뉴스에 게재
http://jb.breaknews.com/sub_read.html?uid=10703§ion=sc50
작은 날망에 오르면 산기슭이 온통 소복소복 흰 눈이 쌓인 듯하다. 보름을 지난 새벽달 빛은 희다 못해 처연하다. 그 처연한 달빛은 솔잎에도 꽂히고, 휘젓는 나의 팔에도 하얗게 내려앉는다. 달빛은 청솔의 성을 뚫고 기슭에 마구 피어난 진달래에 하얗게 묻어난다. 달빛이 온통 하얗게 묻어있는 진달래는 그 붉은 정열을 잃고 봄의 시름을 앓는 듯하다.
솔가지들이 잘려 나간 중간 날망에 오르면 시가지의 불꽃이 아름답다. 상가의 간판들이 불을 내리고, 주택가에 하나 둘 불이 켜지고, 간선 도로에 달리는 자동차들의 불빛이 수채화처럼 흐른다. 심호흡을 크게 하는 동안 시가지 불빛은 벌써 하나 둘 빛을 잃고 다시 우중충한 회색의 삶으로 돌아온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이렇게 밤이 아름답다. 한 낮에 감추어 두었던 빛의 아름다움을 한밤이면 드러내고, 동이 터지면 꼬리를 내리고 다시 회색의 다툼 속으로 자신을 숨긴다.
상봉에 올라 팔을 크게 흔들며 체조를 한다. 그야말로 전쟁을 치르는 마음으로 윗몸 일으키기를 결사적으로 한다. 이마에 땀에 흘러 안경에 맺힌다. 허벅지가 땡땡하다. 동쪽 멀리 하늘과 맞닿은 선도산 능선이 선명하다. 산 가까이 하늘은 더욱 붉어지기 시작하고 먼 하늘은 그 파란빛을 드러낸다.
하늘이 파래지면 기슭에 진달래의 붉은 빛은 더욱 불타는 듯하다. 옛날 진달래는 해마다 베어내서 소복하기는 해도 기슭에 깔리더니 이제는 키가 껑충 커서 타는 불꽃이 옛날보다 더 활기차다.
진달래는 대체 한겨울 동안 어떤 사색으로 지냈기에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모롱이에서
이렇게 타는 정열을 드러내는 것일까?
진달래는 대체 한겨울 동안 응달진 동토에서 어떤 색깔의 물을 길어 올렸기에
이슬비 간간이 뿌리는 해토머리에
이렇게 끔찍한 아픔을 드러내는 것일까?
진달래는 대체 어떤 열기로 한겨울을 모진 바람을 견디었기에
이렇게 사무치는 그리움을 드러내는 것일까?
산 중턱에는 산 벚꽃이 소녀의 젖멍울 같은 봉오리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촌스럽지만 화사하게 늘어진 산벚은 무성뚝에 마구 피어나는 꽃 터널보다 차라리 청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송이 송이가 소담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안개처럼 어렴풋한 모습으로 군데군데 무더기로 그 고고함을 자랑하는 산목련도 봄 아침의 축제에 한 몫 더한다. 화사하던 개나리는 어느새 파란 잎사귀가 돋아서 이미 천박해 보인다.
사람들이 사는 세계는 밤에 화려하다가 아침이 되면 잿빛 의혹의 세계로 돌아가는데, 자연은 아침이 오면 퇴색되었던 정열과 아픔과 그리움을 이렇게 아름다운 색깔로 드러내 놓는다. 겨울이 봄을 준비하듯 밤은 아침을 준비하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밤에 무엇을 준비하기에 그토록 현란한 빛으로 자신을 감추는가?
아침에 보여주는 건 결국 잿빛뿐인 것을…….
사람들은 겨울에 무엇을 준비하기에 그토록 컴컴한 사색으로 해를 넘기는가?
봄을 맞아 보이는 건 결국 새로운 다툼뿐인 것을 …….
봄을 맞아 피는 꽃이 부럽다.
동이 터지면 제 빛을 내는 꽃이 부럽다.
사람도 그렇게 밤새 준비한 것들을 아침이 되면 감춤 없이 보여줬으면 좋겠다.
사람도 그렇게 겨우내 깊은 사색으로 준비한 것들을 봄이 되면 한번씩 화사하게 보여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자신이 준비한 것만큼 어김없이, 자신이 사색한 것만큼 변함 없는 색깔로, 자신이 쌓은 것만큼의 두께로, 자신이 수용한 것만큼의 보드라움으로, 그렇게 숨김없이 보여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얼마만큼 부끄러운 색깔일까?
그러면 나는 얼마만큼 아픔의 색깔일까?
그러면 나는 어떤 그리움을 드러낼까?
나의 봄에 만나는 나는 과연 어떤 빛깔을 담고 있을까?
(2002. 4. 3.)
브레이크 뉴스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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