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축 읽는 아이(나)

이제는 그의 꽃이 되고 싶다

느림보 이방주 2005. 1. 29. 09:57

 ‘이름’이라는 말은 ‘무엇 무엇을 이르다.’라는 말의 ‘이르다’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이 세상의 모든 언어는 모두 이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동사도 있고 형용사도 있지만, 그것조차도 처음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면 어떤 개념을 지시하는 것이므로 이름이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 예를 들면 ‘아름답다’라는 형용사는 그런 추상적인 개념을 이르기에 알맞은 구체적인 이름이다. 그러므로 어떤 언어든 이름 아닌 것은 없다. 곧 형용사는 상태를 이르는 이름이고, 동사는 동작을 이르는 이름이다. 따라서 언어는 이름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는 것도 이름부터 배우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사람의 이름만큼 절실한 소망을 담은 그릇은 없다. 그래서 소망을 담은 이름 이야기는 참으로 많이 전해지고 있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은 세종께서 논어의 ‘學而時習之不亦說乎’(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에서 ‘時習’을 떼어 이름으로 지어 주셨다고 한다. 성군이 신동에게 바라는 소망이 드러나 있다.

이름에는 이와 같이 학업의 성취나, 입신양명, 남자로서 갖추어야하는 덕망, 여성으로 지녀야 하는 부덕 등을 담기도 하였다. 이름에는 또 건강하고 평범하게 살기만 해도 복이라는 옛 부모들의 소박한 소망을 담아 짓기도 하였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조선 예종은 맏아들 이름을 ‘糞’이라 짓고 ‘똥’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왕자들이 건강하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뜨니까 수명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그렇게 지었을 것이다. 서민의 자식처럼 천하게 굴러다니면서 자라야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서 나온 부모로서의 소박한 소망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사람의 이름에는 부모나 주변 사람들의 소망이 담겨 있다. 그런데 소망을 담을 수 있는 것은 두 자 이름 가운데 단 한 글자밖에 없다. 다른 한 자는 항렬자이기 때문이다. 그 단 한 글자에 일생의 소망을 다 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래서 이름을 지으려면 한학자나 작명가를 동원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의 이름에는 부모님의 어떤 소망이 담겨 있을까? 작명가도 이름난 한학자도 동원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손수 지으신 내 이름이다. 항렬자인 ‘周’자 한 글자를 제외하고 수많은 글자 중에서 ‘芳’을 택하셔서 당신의 소망을 담으신 것이다.

 

사내 이름치고는 좀 어색한 글자인 ‘꽃다울 芳’을 택하신 아버지의 꿈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종종 이름에 얽힌 아버지의 꿈을 생각해 본다. 어떤 때는 항렬자와 곁들여 고민을 해 보기도 한다. 뾰족한 대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쉽게 생각하면 아주 간단하다. 그건 ‘두루 주변이 꽃다운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께서 소망하신 것은 참으로 의미 깊은 일이고, 자식을 위하여 참으로 가당찮은 욕심을 부리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자신이 꽃다운 것이 아니라, 나의 주위가 꽃답다면, 삶이 얼마나 행복하고 황홀하겠는가? 가는 곳마다 온통 꽃으로 장식된 삶은 생각만 해도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다. 한시를 쓰셨던 아버지만이 가지실만한 낭만적 소망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삶은 과연 아버지의 소망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생각해 보면 참으로 재미  있는 일이다. 어린 시절 나는 넷이나 되는 누나들의 경쟁적인 사랑 속에서 살았다. 초등학교 시절 내 검은색 양복의 흰 칼라는 항상 빳빳하게 풀 먹여 세워졌고, 긴 겨울에도 손등 한 번 갈라질 틈이 없었다. 양재 기술이 있었던 누님이 어른들 양복을 줄여 만든 모직 잠바를 입고 다니기도 했다. 도시락에는 종종 그 귀한 계란 반숙이 감추어져 있기도 했다.

 

나는 삼십 여 년 교직생활을 대개 여학생을 가르쳤다. 여학생들에게 시나 소설을 가르치는 일처럼 흥미진진한 일은 없다. 시를 문학으로 보지 않고 대학 입시 문제의 텍스트로 보는 목석같은 아이들도 시 한편에 눈이 초롱초롱해지기도 하고, 눈물을 글썽이기도 한다. 소설과 삶을 이야기할 때마다 감동의 시선이 가슴을 찌르기도 한다. 책상에 꽃이 시들 틈이 없었고, 입이 궁금할 사이가 없이 과일 같은 것이 책상에 쌓였다. 이 나이에도 손전화엔 메시지가 쌓인다. 이런 아름다움 속에서 산다는 것은 보통으로 누릴 수 있는 복이 아니다.

 

함께 술 마실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꽃같이 아름다운 심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주변에 모이는 사람들은 모두 살가운 정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다. 눈빛만으로도 한 아름 꽃다발을 대신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다. 뭐든 자꾸 함께 하고 싶어 하고, 뭐든 자꾸 나누어 주고 싶어 하는 이들이 내 곁에 모인다. 소주 한 잔에도 흥겨워지고, 점심 한 끼에도 훈훈해질 수 있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이들이다.

 

어쩌다 없는 재주로 문학을 가까이 하게 되었고, 그래서 만난 문학 친구들은 또 송이송이 꽃이다. 내 글에 공감과 비판을 함께 주는 장미도 있고, 어설픈 내 삶의 순간을 사진으로 정지시켜 보내주는 백합도 있다. 음치에 가까운 내 노래를 듣고 싶어 하는 목련도 있다. 꽃 중에는 물론 백합이나 목련만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 가시 많은 장미도 있고, 덩굴진 찔레꽃도 있지만, 그래도 바탕에는 꽃다운 정이 가득하고 그것 역시 나의 주변을 지켜 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름에 담긴 아버지의 소망이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언젠가부터 오만해지기 시작했다. 종종 ‘세상이 꽃처럼 내게 와서 나를 황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에 가서 그들을 꽃답게 해 주고 있다’라는 방자한 마음을 갖게 된 것이다. 주변으로 인하여 내가 은혜를 입는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하여 주변이 은혜를 입는다는 생각처럼 어리석은 생각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철부지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은 이제 내가 먼저 그들에게 달려가 그들의 꽃이 되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은 정말 최근의 일이다. 지금까지 나의 주변을 화사하게 만들어준 이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될 때가 된 것이다. 그저 주변을 화사하게 꾸미기만 하는 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의 의미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존재, 그럼으로써 조금이나마 나의 존재 의미를 지탱할 수 있도록 거듭나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주변을 위한 내가 됨으로써 남이 나를 드러내 주는 그런 꽃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버지께서 애초에 가지신 소망은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소망을 이루기 위하여, 꽃다운 나의 이름을 위하여, 의미 있는 나 자신을 위하여, 이젠 나도 그에게로 가서 그의 꽃이 되고 싶다.

(2005. 1. 28)

 

수필문학 2006년 3월호(통권183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