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축 읽는 아이(나)

그래도 버릴 수 없는 것

느림보 이방주 2001. 12. 31. 19:20
하루에 한 가지씩 버리는 것이 삶의 지혜라고 한 어느 스님의 수필이 생각난다. 그 글을 읽으면서 언뜻 참으로 그럴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루에 한 가지씩 버리는 삶'은 사실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버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한 것이라면 더욱 어려운 일이다. 버리는 대신 '지혜로운 삶'을 얻게 되는 것이니까, 그렇게 얻은 지혜로운 삶은 또 언제 버릴 것인가. 그러니 참으로 완전히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큰 것을 아무런 생각 없이 과감히 버리며 살고 싶다. 그러나 큰 것을 과감하게 버리면, 더 큰 것이 돌아온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저 큰 것을 버리고 더 큰 것을 선택한 것일 뿐이다. 정말로 과감히 버린 후에 그 홀가분한 기분은 큰 것을 버려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홀가분한 삶을 살기 위해서 나는 버릴 것이 너무나 많다. 가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나의 비좁은 분수로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내가 가진 것은 지나치게 많기도 하고 너무 크기도 하다. 그래서 하루에 한 가지씩 버린다 해도 일생동안 다 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언제 홀가분하고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아무리 홀가분하게 살 수 있어서 버리는 것이 삶의 지혜라고 한다해도 나는 분수에 넘치는 그것을 버릴 수가 없다. 그것은 나에게 하나하나 모두가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작은 것은 작아서 소중하고 큰 것은 커서 소중하기 때문이다.

나는 남들이 흔하게 가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십 리나 되는 초등학교 등하교 길은 오늘날의 사색의 오솔길의 한 모롱이가 되었다. 학교길 시냇가의 뒤틀린 버드나무, 졸졸 흐르는 산골 물, 늦봄 보리 고개에 주린 배를 더욱 처연하게 했던 하얀 찔레꽃 흐드러진 방차 뚝, 하얀 찔레꽃을 더욱 흐드러지게 하는 하얀 나비, 발그레 올라오는 찔레 순 아래 스르르 미끄러져 숨던 징그러워서 안타까운 뱀, 풀섶에 밟히는 노란 민들레, 그거 밟는 때묻은 고무신에 꽂히던 따가운 봄 햇살의 추억은 버릴 수 없다. 그것은 오늘에 와서 내 사색의 울타리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가슴 찌르는 어머니의 눈물어린 사랑 의 추억도 남과 다르다. 그 애틋함이나 그윽함보다도 바라보시는 눈길에 뚝뚝 묻어나는 눈물이 내게는 남다른 재산이 되었다. 어머니의 눈물은 우리에겐 항상 넘치는 사랑이 당신에겐 미흡하다는 생각으로 흘리는 눈물이었기에 철이든 오늘에 더욱 가슴을 저리게 한다. 나는 어머니의 눈물어린 사랑의 추억을 버릴 수 없다. 거기서 대가(代價) 없는 사랑의 고귀함을 배웠기 때문이다.

넷이나 되는 누님들의 막내를 향한 사랑의 경쟁은 아직도 그치지 않는다. 누님들의 얼굴을 뵙는다는 것만으로도 그냥 복이다. 너무나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이다. 그 마음 씀씀이나, 나이 드실수록 곧 눈물이 뚝뚝 드러날 것 같은 눈빛이나, 가끔씩 던지는 해학적인 푸념이나, 짭짤한 음식 맛이나, 주지 못해 안달하는 마음이나, 내 분수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귀한 것들이다. 어떻게 이것을 버릴 수 있겠는가.

나에겐 가진 것이 이렇게 많다.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다해서 어떻게 이런 것들을 날마다 한 가지씩 버릴 수 있을까? 이런 지난날의 것들이 나의 턱에 남보다 많은 살을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나의 주변에는 두터운 턱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지난 것들에 대한 향수나 주변의 사랑이, 본래 가지고 태어난 내 눈에서 탐욕의 붉은 이끼를 시들게 하고 조금씩 따뜻함을 심어주는가 보다. 예전보다 많이 기세가 수그러든, 그래서 따뜻함조차 씨를 세웠다고 하는, 그런 눈빛을 좋아하는 이들이 선량한 사람만이 모일 수 있는 자신들의 동아리에 나를 함께 묶어주기 시작했다.

나의 글방에는 회원이 삼백 명에 육박한다. 열 살 어린 소녀로부터 이순(耳順)의 성자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거기 함께 감동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남기고 간다. 또 어떤 이는 남기고 싶은 아름다운 자취를 가만히 감추고 그냥 지나가는 감동스런 아름다움도 있다. 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그들의 손길을 버릴 수 없다. 나는 그 아름다운 숨소리에 다 답할 수가 없다. 그들의 호흡이 너무나 진솔하고 삶의 아픔이나 아름다움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도 나는 버릴 수가 없다. 십대 소녀의 순수함이나, 이십대 대학생의 열렬함이나, 사십대 중반 삶의 원숙경에 든 아줌마들의 진솔한 말씀을 어떻게 날마다 하나씩 버릴 수가 있겠는가? 더구나 이제 곧 종심(從心)의 경지에 들어 성인이 될 분들의 고귀한 말씀을 어떻게 버릴 수가 있겠는가?

나의 친구들 중에는 진리에의 정진을 포기하고 나타의 삶으로 떨어지는 것을 붙잡아 주는 목탁도 있고, 나의 교만과 독선과 아집의 울타리에 구멍을 파는 딱따구리도 있고, 잠드는 나의 이성과 열정을 두들겨 깨우는 단호한 죽비도 있다. 끝없이 침잠하는 나를 흔들어 안개처럼 피어오르게 하는 파랑새도 있고, 껍질을 벗고 적당히 세속에도 적응하도록 유혹하는 자작나무도 있다. 모두 아득했던 밤을 지나 찬란한 아침으로 이끌어주는 소중한 이들이다. 나는 이들을 버릴 수 없다.

나를 한데 묶어준 동아리가 수없이 많지만, 정말로 깨끗한 사람들이 모여서 글을 읽고 쓰기로 한 열한 명의 직장 동료가 있다. 거기에 일원이 되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자랑스럽다. 모인 사람들 모두가 웃어야 할 때 잘 웃고, 울어야 할 때 함께 울고, 남 잘된 일을 진정으로 기뻐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내 분수로는 그들이 기뻐할 때 정말로 기뻐하고, 그들이 맘 아플 때 진정으로 맘 아프고, 그들이 웃을 때 소박하게 웃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러나 나는 비록 게으르고 따뜻함이 모자라서 세상의 어떤 일에도 열을 다하지 못하는 타고난 느림보이지만, 여기만큼은 열심히 따라다니고자 한다.

나는 이렇게 가진 것이 너무 많다. 아프지만 아름다운 추억과, 나를 사랑으로 보듬어준 어머님의 사랑의 추억과 누님들의 사랑, 내가 사랑해야 하는 착하고 똑똑한 나의 피붙이들, 그 마음을 우려내듯 음식 맛 잘 내는 맛깔스러운 아내, 나의 두툼한 턱과 탐욕이 시드는 눈을 좋아하는 친구들, 그리고 내 글방을 사랑하는 회원들, 착한 사람들의 모임인 '금내골 글방' 친구들을 버릴 수 없다.

내 참새 날개만도 못한 분수로는 다 품을 수 없는 그 많은 것들이 내 주변에 모여들고 있지만, 나는 하나도 버릴 수 없다. 하루에 한 가지씩 그것을 버린다는 것은 나만이 탐욕의 질곡에서 탈출하는 삶의 지혜 아닌 지혜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제 오히려 나의 게으름 때문에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지나 않나 찾아보아야겠다. 그것이 오히려 삶의 지혜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작고 보잘것없는 나, 나는 가진 것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새해에는 잃어버리고 있는 소중한 것을 더 찾기 위해서 느림보의 발걸음을 조금 더 재게 놀려야겠다.
(2001.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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