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수필창작 교실/등단 추천작품

20 민은숙의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창>, <깊은 밤 숨은 그림 찾기> (한국수필 2023. 4월호(338호)

느림보 이방주 2023. 3. 28. 16:05

심사평

박진감 있는 서사와 톡톡 튀는 비유

민은숙의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창>, <깊은 밤 숨은 그림 찾기>

이방주

민은숙님의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창>, <깊은 밤 숨은 그림 찾기>를 이달의 당선작으로 뽑는다. 민은숙님의 두 편의 작품은 인간은 끊임없는 외로움의 존재이며 그 근원과 해결 과정을 통하여 자아의 존재 이유를 탐구하는 모습에 눈길이 갔다. 외로움은 인간의 근원적인 아픔일 수 있지만, 그것을 치유하는 과정이 삶의 길이며 가치 실현의 길임을 이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작품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창>은 타인의 외로움의 현상을 보면서 그의 외로움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외로움을 발견한다. 그런 계기로 모든 인간의 근원적인 외로움을 탐구하게 된다. <깊은 밤 숨은 그림 찾기>는 주차해 놓은 차를 찾지 못해서 깊은 밤 홀로 방황하는 과정에서의 작가 자신의 외로움을 토로하였다. 두 작품은 자아의 외로움과 타인의 외로움의 근원은 결국 타인에 대한 불신과 소통의 부재에 있음을 찾아낸다. 신뢰를 바탕으로 한 말이 소통의 창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발견한 것이다. 그러므로 외로움이라는 근원적인 아픔으로부터 탈출하는 길은 신뢰와 소통이라는 메시지를 독자에게 넌지시 일러주고 있다. 작가는 단순한 일상의 체험을 소환하여 박진감 있는 서사와 톡톡 튀는 비유로 독자를 자신의 작품 세계로 이끌어 철학적으로 해석하여 전함으로써 공명을 주고 있다. 세계에 대한 독특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 수필적 상상의 세계를 개성적으로 형상화하는 기법이 작가로서의 미래가 밝다고 생각되어 추천한다. 좋은 작가가 되기 바란다.

 

당선소감

낮은 자세로 사유하고 해석하는 글을 쓰는 날갯짓

민은숙

영화에서만 보았던 나비 효과가 작년 저에게 일어났습니다. 영의 충고를 빙자한 작은 격려는 제 어깨에 봄 나비를 살포시 얹었습니다. 문학이란 흐릿한 길목에 미약한 날갯짓으로 발을 디디라 독려했습니다. 그 여파로 11책 만들기 프로젝트에서 만난 짧은 연은 생의 전환점에 서 있는 절 귀인이 계신 곳으로 인도했습니다.

멀리서 본 수필은 희극이었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니 너무 깊어 비극인 듯했습니다. 그래도 자꾸만 빠져보고 싶은 절 이끌어주는 분들이 계셔서 외롭지 않았습니다. 수필은 연륜과 깊은 성찰이 요구되는 문학이란 생각이 듭니다. 늦었다고 생각했는데 제 물꼬를 터 준 길잡이가 계신 행운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앞서 길을 만들어 놓은 문우들의 발자국을 따라가며 즐거이 사는 참 복된 길이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수필문학이란 심연에 엄두를 낼 수 있게 마중물을 부어준 영, 알면 알수록 심오한 수필의 세계를 동행하는 수필교실 선생님들, 스쳐 지나갈 수도 있는 연을 놓지 않은 강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우월한 신장만큼이나 귀한 가르침으로 한국수필의 좁은 문에 입장할 수 있게 지도해 주시는 이방주 선생님, 깊은 감사 인사 올립니다.

배움의 끈을 놓지 않고 일상의 작은 것에도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뉴욕의 태풍이 아닌 낮은 자세로 사유하고 해석하는 글을 쓰는 날갯짓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약력:

서원대학교대학원 졸업. KB국민은행 20년 근무

서원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교실 수료.

코스미안뉴스 칼럼니스트. 시산맥 웹진 편집위원

이메일 : sylvie70@naver.com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창

민은숙

떨어진 겨울의 끄나풀이라도 잡아보는 수은주이다. 우수가 지나갔다. 홍조 띤 봄을 품고 변심한 바람에 힘껏 항거한다.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의미일까. 걸어둔 패딩 잠바를 다시 꺼내서 입는다.

평생 친구이자 길잡이인 동생과 KTX 오송역을 향해 출발한다. 싸늘한 냉기가 흐르는 바깥임에도 성큼 봄을 마중 나온 성미 급한 사람들이 보인다. 옷차림이 현란하다. 깃 없는 코랄 재킷, 반짝이 핑크 트위드(tweed) 상의, 베이지색 트렌치코트가 어색하지 않은 건 춘삼월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음이리라.

예약된 정기 검사가 있어 대학병원으로 향하는 길이다. 주기적인 추적 검사는 표준 치료에 뒤따른 조치이다. 활시위를 당기는 달갑지 않은 촉박함을 보태고 싶진 않다. 안 그래도 병원 소독약 냄새에 불안이 고개를 쳐들지 않던가. 넉넉한 시간을 확보했기에 심신이 여유롭다. 시간에 예민한 동생에 맞춘 일정표가 커피를 대접한다.

생로병사는 숨탄것들의 숙명과도 같다. 세상에 질병이 많기도 하다. 유명 맛집으로 착각할 만큼 올 적마다 병으로 고통 받는 이가 많음을 체감한다. 관리 대상인 예후는 삶의 질을 벼랑으로 떨어뜨리는 요인 중에서도 최고봉이 아닐까. 외래 건물에 있는 영상 의학 센터는 아동 병동을 건널목처럼 사이에 두고 있다.

무심코 시선을 비껴간다. 세상의 때라곤 찾을 수 없는 티 없는 어린아이가 링거를 꽂은 채 지나간다. 잘 깎아놓은 밤톨 같은 두상에는 외모를 빛내는 머릿발이라 칭하는 그 한 가닥이 없다. 행여나 모르는 사이에 연민이 스친 내 눈빛을 발견하진 않을까. 그것이 못내 두렵다.

오늘은 생각보다 일찍 검사를 마치려나 보다. 예약 시간보다 일찍 당도한 접수처에서 번호표를 뽑았다. 고맙게도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호명한다. 동생이 탈의실에 들어간 사이 나는 소지품을 챙긴다. 발등에 주삿바늘을 달고서 절룩거리며 나타난 동생을 본다. 얼른 일어나서 부축해 검사실에 들였다.

낯선 여인이 다가왔다. 팔오금에는 주삿바늘을 꽂았다. 화장기라곤 없는 얼굴에 핏발 선 눈이 언뜻 보인다. 초면인 내게 서슴없이 말을 건넨다. 새벽에 부산에서 상경했다고 한다. 얼마나 말이 고팠으면 생판 남에게 경계가 없을까. 자신의 일정을 줄줄 읊는 여인에게서 나는 독거노인인 엄마를 본다. 얼추 오십 대 후반으로 보인다. 뇌종양을 앓았다는 과거형에서 표정을 얼른 갈무리한다. 기운차게 항해하는 그녀의 언어의 바다에서 나보다 어리다는 단어를 낚는다.

동행이 있음은 누군가에겐 부러움의 대상이다. 여인은 혼자 왔다. 동생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챙기는 그림이 썩 괜찮았나 보다. 진단 후 혼자서 수없이 열차를 탔다고 한다. 씩씩한 기상이 넘친다. 그녀의 일신상의 정보들이 주저 없이 자진 투신한다. 내가 캐낸 게 아닌 스스로 떨어져 나온 것들이 차곡차곡 눕는다. 그녀의 눈가에는 말투와 다른 농도 짙은 쓸쓸함이 겉돌고 있다.

갓 잡은 해산물일지라도 장기간 냉장고에 방치하면 부패한다. 몸 어딘가에 방치된 말도 상하지 않을까. 티키타카와 동떨어진 섬에서 쌓은 말들이 두터워지면 세균이 번식하는지도 모른다. 공간을 환기하듯 말을 신선한 것으로 바꿔줘야 하지 않을까. 불면에 새벽을 뚫고 상경했을 그녀가 보인다. 장시간 이동한 이의 묵은 말을 빼는데 협조하리라.

공감이란 적극적인 경청이다. 얼마나 오래 묵혔을까. 얼마나 켜켜이 쌓았으면 속사포로 연발할까. 그녀의 메마른 눈동자에 차츰 물기가 돈다. 이 순간 동생이 조금 늦게 나와야 하지 않을까. 문득 생각이 오지랖을 넓힌다. 나는 고개를 연신 주억거리며 추임새로 간을 맞춘다. 대기 좌석에 사람들이 꽤 있음에도 홀로 앉은 이는 없다. 그녀의 신상 명세가 이력서인 양 내 옆에서 한 줄씩 늘어난다. 남은 시간이나마 그녀의 허한 말풍선에 경청을 넣어 허공에 띄워 주고 싶다.

그녀는 전사인 듯하다. 그녀의 말을 빌자면 남자도 하기 힘든 몸과 기술로 벌어먹고 사는 이다. 몹시 씩씩한 그녀를 기계 조립이란 생업이 뒷받침한다. 일정을 마치면 부산행 열차에 오르고 삼일절에 다시 상경해야 한다. 거스러미 이는 일을 해도 마음을 연약하게 만드는 백색 병원이다. 분지에서만 산 나는 바닷가에서만 산 그녀에게 소량의 말을 주고 다량을 받는다. 할 수 있는 최대의 친절인 말줄임표를 늘린다.

이야기를 상실한 삶은 빈곤한 삶이다. 혼자 살 순 있겠지만 소통은 원활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늙을수록 입은 줄이고 지갑을 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싱겁다고 웃을 수만은 없는 슬픈 말이다. 이상하게도 지갑보다 입을 벌리게 된다. 받는 이는 적은데 발설하고자 하는 이는 늘어난다. 글도 그러하다. 요즘은 독자보다 작가가 많다고 하지 않던가. 배설이 목마른 세상에서 나는 살고 있다. 하나인 이유가 특별한 입은 닫고, 귀를 쫑긋 세워야겠다.

만남이 희박한 이는 누적된 말을 덜기 좋은 상대일지 모른다. 감흥 없는 긴 인연보다 짧아도 밀착한 밀도의 말이 기운을 주나 보다. 상하기 일보 직전인 말을 쏟아내도 거부하지 않는 반응에 공백이 없다. 낯선 나는 말을 곱씹어 곡해하지 않는다. 문 앞까지 따라 나와 배웅하는 그녀에게서 배설 뒤에 따르는 평안을 본다.

동생 혼자 보내기 싫어 동행한 병원에서 끈 없는 이와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 기우는 장사에도 기분 상하지 않은 창을 연다. 정담이 고픈 이가 많은 세상이다. 말 잘 주워 담을 몸의 창을 기울이면 그것도 보시하는 것이 아닐까.

 

깊은 밤 숨은 그림 찾기

민은숙

유비무환은 돌발 변수에 강한 힘을 발휘한다. 반시간이면 넉넉한 역에 혹시나 하여 복사한 양만큼 앞선 시각에 출발한다. 생각지도 않은 화장품 엑스포가 진행 중일 줄이야. 주차 공간을 찾는 것이 급선무이다. 역내에서 좀 떨어진 시골길을 지나 JJ 부동산 앞에 차를 세운다. 망막에 위치를 공들여 각인하고 역으로 향한다.

인문학 칼럼니스트 공모전에 무작정 도전장을 내밀었다. 칼럼이란 글자로 언어로 귀에 익도록 보고 들었다. 막상 써보려고 하니 개지 한가운데서 호미 한 자루 들고 선 것처럼 막막하다. 먼저 정의부터 짚어보고자 한다. 인문학이란 광야에서 파종하려면 그래야 할 것만 같다. 짧지만 깊은 고민 끝에 씨앗 두 종류를 골랐다. 하나는 그나마 익숙한 심리학에 관계를 덧댄 상호작용이다. 나머지는 요즘 심취하고 있는 적극적 몰입이다. 넓게 뿌리기에는 나의 협소한 저장고란 한계가 있다. 알찬 북주기로 잘 키워 선보이리라.

가는 날이 장날이다. 미리 시뮬레이션한 버스를 기다린다. 광화문 일대에서 시위 중이라 운행하지 않는다고 한다. 불길한 예감이 가슴을 섬뜩 스친다. 손을 명치에 얹고 긍정으로 다스린다. 예정에 없던 지하철을 탔다. 모녀로 보이는 어머니는 내 목적지가 궁금하시다. 세종문화회관은 종각이 더 빠르다면서 근방까지 날 챙긴다. 줄었던 미간이 늘어나며 긴장이 풀린다. 따스한 말 한 조각이나마 나도 누군가의 구김을 펴는 데 일조하리라.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쥐를 잡는다는 말이 있다. 예정된 당선자 발표일인 금요일이다. 예정된 공지는 감감무소식이다. 칼럼니스트가 되고자 하는 열망은 강했으나 미흡하다는 걸 안다. 어떤 사람들이 당선되는 걸까. 대표전화로 질의했다. 국내는 물로 해외에서도 응모자가 많아 심사가 늦어졌다고 한다. 간절하면 이루어지리라. 늦어진 공지에 내 이름이 앞머리에 떠 있다.

불길한 예감은 왜 적중하는 것일까. 돌아오는 길은 더듬지 않고 제대로 향할 수 있었다. 즐거웠던 시상식으로 이완된 근육이 비몽사몽간에 당도한 역이다. 오늘이 다 가기 전에 침대에 누울 수 있다는 생각에 없던 기운이 솟아난다. 애마를 찾아간 나는 햄스터 쳇바퀴 돌듯 밤을 헤맸다. 등이 축축하도록 걸었건만 원점이다. 망막을 추종하는 감성 때문에 이성이 속울음만 씹는다. 밤에 들뜬 엉뚱한 길은 버틴 기력을 후들거리게 한다. 풀린 시계태엽을 대체 몇 회되감은 걸. 계맹의 낮과 밤의 차는 예상치보다 컸다. 만 오천보가 머리에 쥐나도록 깨닫게 한다. 그간 보이는 부분만으로 얼마나 편협하거나 조급하게 행동했던 것일까. 그랬다. 뜨물 같은 한밤 이면이 대기하는 줄도 몰랐다. 보고자 하나 볼 수 없다는 도덕경 문구는 후렴이 된다. 깊은 밤에 걷기 한번 제대로 한다.

시골길은 순박하지만은 않다. 의외로 통이 크다. 빛은 물론 상식까지도 통째로 삼킨다. 새벽이 가까워지는 야심한 밤, 꼬박 하루 삼만 보에 절인 몸이 탈진할 것만 같다. 부츠는 피곤 앞에 적나라하게 노출을 감행한다. 역에서 본 비니 쓴 배낭을 불러 세운다.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남자는 트럭을 안내한다. 찰나가 이렇게도 긴 시간이었던가. 억측과 어두운 상상이 꼬리를 문다. 뒤늦은 겁대가리가 올라온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그를 뒤따르는 손가락이 떨며 자판을 두드린다. '이 차량번호 잊지 마. 한 시간 내 나한테 연락 없으면 신고해. 나 지금 트럭 타' 오늘 일정을 아는 친구에게 다급히 보낸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이다.

새삼스레 나이를 먹었다고 심안이 깊어지지 않음을 체감한다. 그나마 위기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소심함은 있다. 자극적인 헤드라인과 공포영화가 알려준 건 자나 깨나 인적 드문 밤길 조심이다. 안다는 고질병이 선한 이마저 치한으로 둔갑시킨다. 경계를 부르는 어둠의 저편에서 송곳니를 드러내는 사회악이 씁쓸하다. 불거진 의심병이 차 문고리에 바짝 붙는다. 남자가 감도는 어색한 공기를 환기하려 대화를 시도했다. 어디 다녀오냐는 물음에 발작을 일으킨다. 서울병원에 치료차 다녀왔다는 어설픈 거짓말로 버벅거렸다. 어디 아프냐는 질문에 수술한 동생인 척한다. 혹시나 몹쓸 생각이라도 한다면 환자니까 잠재우라고 밑밥을 깔아둔다.

바짝 졸았던 가슴이 별안간 펴지면서 벅차오른다. 그토록 찾았던 눈에 익은 부동산이 보인다. 익숙하다는 게 이렇게나 가슴 떨리는 거였구나. 늘 곁을 지켜 고마움을 몰라준 것이 낯부끄럽다. 남자는 차 가까이 내려 주겠다며 좀 더 가자고 한다. 혼자서 범죄 영화를 찍었던 나는 스스로가 찔러서 전광석화로 인사하며 하차했다. 익숙한 애마에 올라타자마자 문을 잠근다. 친근감이 투여한 진정제가 뜨물을 걷어낸다. 후우, 날숨이 빠져나오자 심장이 제자리를 찾는다. 들숨이 참 길었다.

날 세웠던 어깨가 내려온다. 집으로 오는 여정이 이렇게나 길 줄이야. 그 남자에게 뒤늦은 미안한 감정이 쫓아온다. 손 내밀고는 덜컥 가슴이 철렁한 것은 아는 것이 병이다. 증세가 잦아들고 난 후에야 비로소 아직 살만한 인심이 뭉클하게 고맙다. 생의 가장자리 테두리에서는 작은 선심이 큰 고단함을 날려준다. 음지의 반대편 양지를 본다. 이 세상은 혼자만으로 살 수 없음을 통감한다.

깨진 달빛 부스러기에 쿨럭이며 주저앉을 때마다 날 일으켜준 자장이 있음을 오감으로 안다. 내게 드리워진 애정과 그늘이 있다. 보이지 않는 등 뒤에서 밀어주는 응원과 격려로 나는 오늘도 앞으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