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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김애중 <입춘에 지는 잎/수필과 비평 2022년 5월(통권 247호)

느림보 이방주 2022. 9. 9. 04:17

심사평

김애중 - <입춘에 지는 잎>

김애중의 <입춘에 지는 잎>을 신인상 당선작으로 한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죽음을 제재로 하여 삶의 세계를 열어가는 지혜를 보여주었다. 죽음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변할 수 없는 인간의 고뇌이다. 한국문학에서도 고대로부터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의 고통을 다루고 있다. 죽음에 대한 고뇌는 공포와 사별의 슬픔에서 온다. 김애중의 <입춘에 지는 잎>에 드러난 고뇌도 사별에 대한 섭섭함이 슬픔으로, 슬픔이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이어지는 고뇌를 다루었다. 제재로 불러온 죽음에 대한 슬픔과 공포는 사별한 시매부의 덕과 인품과 함께 그가 죽음을 맞은 입춘이 아이러니한 배경이기에 더 크게 다가온다. ‘밝은 햇살’이 예사롭지 않고, ‘푸른 바람’이 섞인 봄빛 속이라 떠난 이에 대한 슬픔이 더 컸다. 슬픔은 곧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공포로 엄습한다. 그러나 죽은 나무에서 새 잎이 나는 입춘처럼 자연과 합일을 이루어 사별한 이의 살아오는 동안의 덕이 자양분이 되어 자손에게 이어지는 순환의 섭리를 믿으면서 기쁨으로 변환된다. 이 작품은 제재를 보는 안목과 그에 대한 인식을 형상화하는 변증법적 사유가 돋보인다. 훌륭한 작가가 되리라 믿는다.

(이방주)

 

당선소감

마음속에 그리던 일이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이 순간이 하고픈 일을 한번 더 그려보게 하는 디딤돌이 됩니다. 벅찬 느낌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어요.

어릴 때 학교에서 배운 여러 가지 일들을 언젠가부터 실제로 느끼고 스스로 깨닫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살면서 맞닥뜨리는 삶과 죽음의 경계, 희로애락을 겪는 과정에서 가장 인간적인 제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사실 저는 그런 모습이 싫었어요. 인생에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다였습니다. 보편적 감정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어요.

수필을 배우고 쓰면서 글 이외의 것을 더 많이 배우게 됩니다. 일상을 철학적으로 바라보는 방법을 지도해주신 선생님, 따뜻한 시선으로 힘을 보태주신 선배 문우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더욱 정진해서 좋은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수필과 비평》 가족이 되어 참으로 기쁩니다.

 

약력

충북 괴산 출생

서원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교실 수료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재학

무심수필문학회 회원

청주시기록활동가

이메일 : kajstar@hanmail.net

 

입춘에 지는 잎

김애중

차분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소용돌이쳤다. 정월 초하룻날 밤에 첫째 시매부의 부음이 들려온 것이다. 남편과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연세가 높긴 해도 명절 준비하느라 불과 며칠 전까지 운전도 하셨는데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분은 우리 육남매 부부 중에 제일 어른이다. 내가 시집온 이후 지금까지 40여 년을 한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좋은 일, 나쁜 일을 함께 겪으며 살아왔다. 오래전 남편의 사업이 무너졌을 때 누구보다도 제일 많이 응원해주셨다. 가까이 살아서 그렇기도 했겠지만 그분의 성정이 따뜻했기 때문이다. 자진해서 남편을 보증 서주고 사업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몇 년 뒤 다시 어렵게 되어 큰 손해를 입었다. 급기야 1년 동안 힘들게 농사지은 쌀가마 수십 개를 압류당해 빼앗길 뻔하기도 하고, 살고 있는 집으로 빨간딱지가 날아오기도 했다. 그런데도 매몰찬 소리 한마디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기다려준 분이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 간신히 그 빚을 다 갚았을 때, 그분의 머리에는 이미 하얀 서리가 내려 있었다.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이 늘 함께했다.

다행히도 그분의 노후는 남부럽지 않았다. 5남매를 키우면서 여러 가지 고생을 했지만, 자손들이 훌륭하게 성장해 제법 효도했다. 특히 말썽꾸러기였던 막내딸은 철이 들면서 얼마나 예쁜 짓을 하는지 그분의 비타민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그분 또한 낙천적인 성품으로 주위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 복지회관 댄스동아리에 참여해 마을축제장에서 친구분들과 환하게 웃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른다. 아깝고, 아쉽고, 슬프다.

장례를 치르면서 다섯 조카들을 지켜보았다. 울지 않기로 했다며 애써 미소를 보이는 큰 조카의 눈망울엔 커다란 눈물방울이 가득 괴어 있었다. 큰 조카도 나이 오십 줄에 접어들어 머리가 희끗희끗하다. 내가 갓 시집왔을 때 졸랑졸랑 따라다니던 귀여운 얼굴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조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망연자실하는 조카들 사이로 그들의 아들딸들이 보인다. 그리고 조문 온 내 아들과 손자도 보인다. 아, 나는 어느새 이 집안에서 나이 많은 어른이 되어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슬픔과 더불어 이런 황당함을 느끼다니 나는 짧은 순간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떠오르면서 그동안 살아온 세월이 뒤죽박죽되어 한꺼번에 밀려왔다.

햇살 좋은 날 그분은 한 줌의 하얀 가루로 변신하여 우리를 만났다. 누런 잔디와 포슬포슬한 흙을 덮고 영원의 집으로 들어갔다. 흙을 만지는 조카의 손이 공손하다. 조카의 어린 자손들이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가는 사람과 뒤따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잔잔히 흐르는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보였다. 부서지는 햇빛을 받아 안고 밝게 웃고 있는 그분의 얼굴이 사진틀 유리 속에서 어른거린다. 언뜻 남편 얼굴로도 보이고 내 얼굴로도 보인다. 이제 남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섬뜩하거나 무섭지 않고 오히려 담담해진다.

마을에서 가까운 작은 산에 그분을 묻고 집에 돌아왔다. 내가 뭐 한 일이 있나, 조금 울고 그냥 서 있었을 뿐인데 종일 괭이질이라도 한 것처럼 몸이 천근만근이다. 잠시 쉬었다가 휴대전화를 살펴보니 입춘대길을 기원하는 글씨와 그림들이 문자로 들어와 있다. 아, 오늘이 입춘이구나. 입춘날 그분은 흙으로 돌아가셨다. 산에서 본 밝은 햇살이 예사로운 게 아니었다. 푸른 바람이 섞여 있는 봄빛이다.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오고 있다. 계절도, 사람도, 모든 숨탄것들이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이다.

얼어붙은 겨울이 지나간 자리에는 어김없이 새로운 생명이 차지한다. 마치 나뭇잎이 떨어져 흙으로 돌아가 다시 새잎을 피우는 것처럼 돌아가신 분은 자신의 육체를 흙에 묻고 봄을 피우리라. 자손들은 그분의 자양분을 받아 세상 살아가는 힘을 얻을 것이다. 그들도 때로는 굴곡지게, 또는 행복하게 살 것이며 어느 날 조용히 잎을 떨굴 것이다.

손자들이 하늘 향해 무럭무럭 크고 있다. 나는 흙을 향해 한발 한발 가고 있다. 무엇을 뿌리고 갈 것인가. 다시 한 번 삶의 자세를 생각해 본다. 가족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살갑게 하지 못했고, 어떤 사람에겐 원망하는 마음이 남아 있기도 하다. 여기에 있을 때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기도 하고, 남의 친절을 의심하기도 했다. 아직도 이러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하고 슬퍼진다.

잎새에게 물어보았다. “가을이 오니 무서우냐?” 잎새가 대답했다. “아뇨, 봄과 여름 내내 완전한 생명을 누렸는걸요.” 어느 책에서 본 내용이 가슴을 두드린다. 봄과 여름 동안 햇빛과 합일하며 뜨겁게 살아온 잎새의 충만함이 느껴진다. 나는 언제 충만해 본 적이 있던가. 잎새의 당당함에 내 모습은 한없이 초라해진다.

입춘도 지나고 우수도 지났다. 경칩이 머지않았다. 오랫동안 묵어있던 고루한 마음을 털어버리고 개구리처럼 동면에서 깨어나야겠다. 다가오는 봄과 여름에 저 잎새처럼 뜨거운 햇빛을 온몸으로 받고 싶다. 합일의 기쁨을 맛보고 싶다. 후회와 원망을 줄이고 충만한 순간들을 즐길 수 있다면 가을이 온다 해도 나는 무섭지 않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