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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근의 <아버지의 짐>, <할미꽃> (한국수필 2023. 12월호)

느림보 이방주 2023. 10. 18. 21:54

<심사평>

잔잔한 어조로 문학적 공명

이방주

서동근의 작품 <아버지의 짐>과 <할미꽃>을 당선작으로 한다. 두 작품은 조상으로부터 받은 가풍과 사랑을 존경으로 계승해야겠다는 다짐을 ‘짐’ ‘할미꽃’이라는 상관물에 실어 형상화한 작품이다. 수필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인식과 그것에 대한 형상의 수준이 작품성을 좌우한다. 인식은 독창적이어야 하고 형상은 개성 있는 문체여야 한다. 최근 들어 조상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남의 일이 된 듯하다. 작가는 <아버지의 짐>에서 어린 시절에 체험한 ‘아버지의 짐’과 짐을 대신 짊어졌던 기억을 소환하여 아버지 삶을 이해하고 이제 그 짐을 대신하며 누군가의 아버지로서 자신이 짊어지고 가야할 짐을 헤아리고 다짐한다. <할미꽃>에서는 이제 도시개발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난을 겪게 된 선영을 성묘하며 할미꽃에 담긴 전설과 함께 꽃의 생태를 통하여 선대 조상에 대한 감사함과 계승을 다짐한다. 이것은 전통 가족사회에 존재했던 사랑과 감화의 삶이 사라지는 사회 현상을 아프게 인식한 결과이다. 이러한 인식을 짐의 무게와 할미꽃의 속성을 빌려와 잔잔한 어조로 표현함으로써 문학적 공명을 불러일으켜서 수필문학이 갖는 치유 효과를 충분히 내포하고 있다. 수필의 장르적인 특성과 구조적 장치를 잘 갖추어 등단작으로 모자람이 없다고 생각되어 추천한다. 더욱 정진하길 바란다.

<당선소감>

서두르거나 재촉하지 않는 걸음으로

서동근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가쁜 숨을 헐떡일 때마다 매번 그냥 주저앉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마라톤을 시작하며 겪어야 하는 고통의 연속이다.

가을 햇볕이 내리쬐는 들녘을 걷던 중 뜻밖의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한국수필 등단 소식에 마치 푸른 하늘이 나를 위해 주단을 깔아놓은 듯 마음은 새털처럼 하늘을 날았다. 그것도 잠시 가슴 한편엔 무언지 모를 중압감이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글에 대한 특별한 소질이나 재능은 없는 듯하다. 다만 어릴 적 만화를 좋아 했고 형이 보던 문학책 언저리를 곁눈질 했던 것이 문학의 씨로 발아하여 새싹을 틔웠나보다.

사람이나 사물과 같은 어떤 대상을 통해 오래 생각하고 상상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자연스런 감정이나 느낌을 나만의 시각으로 표현하는 게 수필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수필을 공부하게 되면서 수렁에 빠져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곳을 빠져 나오려 발버둥치면 칠수록 더 깊은 늪에 처박히는 느낌이다.

순수하고 진실하며 성실하게 내 자신을 돌아볼 일이다. 결코 서두르거나 재촉하지 않고 나의 걸음으로 가련다. 많이 부족하고 성근 글임에도 불구하고 선정해주신 심사위원님들과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님과 임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처음 수필의 텃밭으로 이끌어 주신 신금철 선생님, 그리고 깊은 혜안과 알찬 지식으로 선도하시는 이방주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해드린다. 함께 공부하는 문우님들과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등단 작품>

아버지의 짐

서동근

해가 저문 지 한참이 지나도록 아버지는 돌아오시질 않았다. 부엌에서 저녁밥을 짓던 어머니는 연신 사립문을 흘낏흘낏 쳐다본다.

“해가 넘어갔으면 그만 들어오지 왜 이리 늦게까지 일을 하신다니, 네가 퍼뜩 나가봐라.”

오늘도 어머니의 성화에 나는 땅거미 내려앉은 신작로를 내달렸다. 아버지는 봄철이면 하루 종일 들에 나가 해가 저물도록 일을 하시다 늦는 날이 많았다. 저 멀리서 지게에 쇠꼴을 잔뜩 짊어진 아버지가 걸어오신다.

“아버지 왜 이렇게 컴컴해질 때까지 일을 하세요?”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고단했을 아버지의 심중은 안중에도 없다. 귀찮게 찾아나서야 하는 게 불편하고 싫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책가방을 방바닥에 던져놓고 뒷동산에 올랐다. 먼저 올라온 친구들로 왁자지껄 소란스럽다. 우리들은 서로 편을 짜 축구 시합을 했다. 형 동생 할 것 없이 온 동네 아이들이 한데 어울려 뛰어논다. 해가 지는지도 모르고 축구를 하다보면, “얘야 그만 놀고 들어와 저녁 먹어라.” 하고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떨어지기 싫은 발길을 돌려야 했다. 집에 들어서면 나보다 더 늦으시는 아버지를 내가 찾아나설 차례다. 이런 일들이 봄부터 시작해 가을까지 수없이 반복된다.

아버지는 농사일 사이사이 틈 날 때마다 하천 제방 밑 하천부지를 삽으로 개간하셨다. 하천부지는 농지로써의 안정적인 토지가 아닌 임시로 사용하는 여분지다. 한여름 장마철 물이 불어나면 한순간에 물에 휩쓸려 흔적 없이 사라지기 일쑤다. 이른 봄 부지런히 밭을 일궈 여름장마 오기 전에 작물을 수확해야 하는 한계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장마로 인한 허망한 손실을 염려하여 굳이 시도하려 하지 않는다.

“아버지, 비가 오면 다 떠내려 갈 것을 왜 이리 힘들게 하세요.”

“조금만 부지런히 움직이면 여러 가지 채소를 심어 실컷 먹을 수 있는데 장마 걱정에 이 넓은 땅을 그냥 묵히냐?”

나는 그런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때는 솔직히 이해하기 싫었다. 해가 바뀌어도 여전히 아버지의 하루 일과는 바뀌지 않으셨다.

어느 해인가 그날도 아버지의 귀가는 늦으셨다. 아버지를 찾아 길을 나섰지만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곳저곳 계실만한 곳을 둘러보아도 없어 돌아서려는 순간 저 멀리 논둑 가에 희미한 물체가 보였다. 아버지가 지게에 당신 키보다 더 높은 풀더미를 지고 힘겹게 걸어오셨다. 단숨에 달려가 투정을 부렸다.

“어두운 밤길에 무거운 짐을 지고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이렇게 늦게까지 일을 하세요?”

아버지는 아무런 말씀도 없이 그저 갈 길을 재촉하신다.

“지게 내려놓으세요. 제가 지고 갈게요.”

“아서라! 지게질도 해본 사람이 하는 거지 힘만 믿고 했다간 몸이 버티지를 못한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지게를 빼앗다시피 하여 지고 일어섰다. 막상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섰지만 걸음을 뗄 때마다 전해오는 중압감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두 어깨를 짓누르는 고통과 걸음을 옮길 때 중심을 잡으려니 허리를 펼 수가 없었다. 가도 가도 집은 천릿길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어쩌다 나선 길에 아버지의 지게를 대신 짊어졌지만 힘들다고 내려놓을 수도 없어 이를 악물고 버텼다.

겨우 숨을 몰아쉬며 집에 도착했다.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고 현기증이 났다. 아버지는 묵묵히 지게를 받아 소에게 풀을 주고는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 하신다. 바지를 툭툭 털며 돌아서는 아버지의 눈가에 보일 듯 말듯 옅은 미소가 비친다. 그제야 고단했을 당신의 어깨가 눈에 들어온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식사할 때 외엔 잠시도 몸을 쉬지 않는 아버지가 거대한 산처럼 느껴졌다.

가끔 주변에서 걱정을 빙자하여 빈정거리는 얘기를 들을 때가 있다.

“자네 춘부장은 이 뙤약볕에 일을 하다가 병이라도 나면 어쩌시려고?”

마치 젊은 나를 힐책이라도 하듯 툭 던질 때마다 화가 났다. 솔직히 나도 삽이나 괭이보다 깨끗한 모시 적삼에 중절모 쓴 아버지의 모습으로 사시기를 바랐다. 왜 당신인들 그런 삶을 원하지 않았겠는가? 그런 삶을 살기에는 처자식들 앞날이 불안했을 테고 그럴 때마다 스스로의 마음을 다시 추슬렀을 것이다.

아버지는 다정다감한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식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당신의 생각을 강요하신 적이 없다. 그저 당신의 할일을 묵묵히 하실 뿐이었다. 세월이 지나 이제야 알 것 같다. 아버지가 지셨던 짐의 의미를….

정호승 시인은 ‘짐은 자신에게 선물이고, 조련사였다.’ 라고 했다.

아버지가 짊어지셨던 삶의 무게는 얼마였을까? 생각해 본다. 나 역시 내게 주어진 짐을 불평 없이 지려한다. 짐은 나에게 고통과 시련 속에 책임을 함께하는 신성한 의무란 생각이 들었다. 내딛는 발걸음이 조심스러워 진다.

 

할미꽃

서동근

한식을 맞아 선영에 올랐다. 해마다 4월 5일 전후 선영 선대 조상님들 묘소에 제를 올린다. 종갓집 종손이 고향을 떠나 인천에 살고 있기에 한식이 돌아오면 청주 인근 자손들이 선영에 모여 조상님께 예를 표한다. 그런데 선대 조상님들을 모신 선영이 산업단지로 편입되면서 부득이 묘지를 이장해야 했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명절 때마다 오르내리던 선영이 없어진다니 마음이 왠지 무겁고 찹찹하다.

선대조는 종손이 따로 서울 쪽 가족묘원으로 모시고 부모님 대부터는 집안별로 각자 모시기로 했다.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전에 준비해놨던 산성 쪽 야산에 모셨다. 마지막이 될 조상님들 묘를 돌아보며 절을 올렸다.

“여기 할미꽃이 피었네.”

친척 일행 중 누군가의 말에 돌아보니 산소 주변에 할미꽃 한 무더기가 보였다. 예전엔 흔히 볼 수 있었지만 어느 때부턴가 할미꽃 보기가 쉽지 않다. 꽃대와 꽃잎에 보송보송 아기 솜털처럼 잔털을 두르고 꽃은 늘 고개를 숙인 채 아래로 향해 있다. 꽃으로서는 결코 화려하지도 않고 눈에 드러나지도 않게 수줍은 듯 피었다 지고 만다.

한때 야생화에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다. 요즘 가정에선 아파트 베란다에 화분 한두 개씩은 흔히 키우고 있을 것이다. 대부분 공기 정화 기능이 있는 식물을 선호한다. 꽃들도 화려한 양화 일색이다. 야생화는 사람의 관심을 끌기에는 꽃잎이 화려하지 않고 외형 자체가 빈약한 편이다. 사람들 손길이 비교적 닿지 않는 산이나 들에 자생하기 때문에 수수하고 조용하다.

가끔 산행을 하다 보면 등산로 주변에 피어있는 이름 모를 꽃들을 보게 된다. 이른 봄 낙엽 사이로 올라온 보랏빛 제비꽃, 복수초, 노루귀 등 조그맣고 앙증맞은 모습에 정감이 간다. 야생화는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무심코 지나치거나 관심을 주지 않으면 눈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결코 자기를 돋보이려 하지 않고 자체의 아름다움을 피워내는 그 모습이 고결하고 순수하다. 그러나 생명력은 어느 꽃보다 강인하고 끈질기다. 한겨울 찬 흙 속에서 견디다 이른 봄 잔설을 비집고 올라오는 노란 복수초를 보고 있노라면 가녀린 어린 새싹의 생명력에 경이심이 든다.

어릴 적 내 눈에 비친 어머니는 늘 헐렁한 옷에 투박하고 거칠어진 손마디, 여자로서의 아름다움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바쁜 농사일과 자식 걱정에 당신의 치장은 안중에도 없었다. 어쩌다 외할아버지 제삿날이면 막내아들 손에 씨암탉 들려 밤길 앞세워 집을 나서는 것이 유일한 외출이었다. 곱게 빗질한 쪽진 머리에 은빛 비녀가 달빛에 유난히 반짝거렸다. 난 어머니가 모처럼 차려입은 옥양목 치마에 하얀 모시 저고리 모습이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다.

봄이면 꽃시장을 들른다. 1년 365일 화려한 조명 아래 계절에 관계없이 꽃을 볼 수 있다. 화훼 농가에서 키운 꽃들이 꽃봉오리가 트기 전에 화원에서 손님을 기다린다. 언제든 원할 때 꽃을 살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화려한 양화보다 다소 빈약해 보이는 야생화에 눈길이 간다. 오히려 연민의 정을 느낀다.

무덤가에 핀 할미꽃을 조심스레 삽으로 떠 비닐봉지에 담았다. 본래 있던 그 자리에 있어야 마땅하겠으나 얼마 뒤 묘지를 이장하려면 중장비로 파헤쳐 뭉개 버릴 것이다. 집 화단에 옮겨심기로 했다. 할미꽃은 여러해살이로 한번 심으면 그 자리에서 꽃잎이 진 뒤 겨울을 나고 봄에 싹을 틔워 꽃을 피운다. 자생력이 무척 강하다. 거실에서 키우는 꽃들을 관리하기란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다. 때에 따라 물주고 자주 환기를 시켜 줘야 생명을 유지한다. 잠시 게으름을 피웠다간 죽이기 일쑤다. 봄철에 꽃 한번 보고 고사시킨 꽃이 무지기수다. 그러나 야생화는 한번 심으면 한 자리에서 사계절을 지낸다. 일일이 손이 자주 가는 일반 꽃들에 비해 키우기가 아주 수월하다. 크게 돋보이진 않지만 묵묵히 살아가는 우리네 서민들 삶을 닮았다.

할미꽃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부모 없는 두 손녀를 힘들게 키워 모두 시집보냈다. 홀로 남은 할머니가 추운 겨울 손녀집을 찾아 나서다 어느 이름 모를 길가에서 홀로 동사하고 말았다.’ 할머니가 죽은 자리에 피어났다는 전설은 설화지만 듣는 이의 마음을 아리게 한다.

할미꽃은 늘 고개를 숙이고 있다. 대부분 꽃들은 하늘을 향해 활짝 피어 있다. 그러나 할미꽃은 모든 걸 수용하고 체념한 듯 자신의 생애를 묵묵히 견디며 꽃을 피운다. 마치 내 어머니가 가족과 자식을 위해 희생하며 살다 죽어서도 허리 한번 펴지 못한 모습처럼 보인다. 그래서 볼 때마다 애처롭다. 혹시 무덤가에 꽃으로 환생한 것은 아닐까? 문득 무덤가의 할미꽃이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오작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성스레 햇볕 잘 드는 마당가 화단에 할미꽃을 옮겨 심었다. 어머님께 제주 올리듯 정성껏 물을 주었다. 이제 내년부턴 선산에서 조상님들을 뵐 순 없다. 그러나 왠지 가슴이 뿌듯하고 마음이 편안하다. 할미꽃은 이제 내 가슴에서 마음을 전하는 전령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