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

조롱박꽃 피는 사연

느림보 이방주 2022. 3. 25. 20:54

조롱박꽃 피는 사연

 

 

새벽 6시쯤 주중리에 갔다. 벌써 볕이 뜨겁다.

오늘은 조롱박꽃을 보았다. 야산 비얄에 있는 블루베리 밭에 고라니 침입을 막으려고 쳐놓은 그물 담장에 덩굴을 걸어놓고 다만 몇 송이가 피었다.

박꽃은 초가지붕에 달빛을 받으며 피어야 제 멋이라는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야겠다. 이렇게 피어 있어도 새벽하늘보다 처절하게 하얗다. 하얀 꽃잎 다섯이 다소곳하다. 다섯 꽃잎을 하나로 겹치면 한 잎으로 보일 만큼 크기도 모양도 닮았다. 화심은 연한 노란색이다. 수꽃은 수술을 지니고 암꽃은 암술을 지녔다. 수술은 하나가 불끈 솟았고 암술은 세 쪽이 가운데가 갈라진 모습이 똑같다. 호박꽃도 그렇고 박꽃도 그렇고 수술은 수컷 모양이고, 암술은 암컷 모양이다. 식물은 꽃이 생식기이다. 사람은 생식기를 부끄럽다고 감추는데, 꽃은 제 몸에서 제일 예쁘게 꾸미고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피어난다. 그래도 꽃이나 고라니나 나아가 사람이나 닮아 있는 모습이 신비스럽다. 그러고 보면 인류라고 하는 개체가 꽃이나 고라니보다 잘났다 할 것도 없다.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것들은 하나하나 모두 한 가지일 따름이다.

저기 저 수술의 꽃가루가 암술에 닿는 순간 암술은 진저리를 한번 치고 꽃 아래 어린 조롱박은 오진 아픔을 겪을 것이다. 아픔을 견디어낸 조롱박은 날마다 연두색을 더하여 제가 클 만큼 커서 익어갈 것이다.

이미 가루받이를 끝낸 조롱박은 큰 놈이 하나 작은 놈이 하나 여린 덩굴에 매달려 있다. 작은 놈은 잎사귀 뒤에 숨었다. 아침 햇살에 연두색 윤기가 자연 그대로이다. 조롱박은 엄살을 피우지 않고 아무리 볕이 뜨거워도 클 만큼 크고, 아무리 가물어도 제 색깔을 낸다. 자연을 원망하지도 사람을 탓하지도 않는다. 제가 그냥 자연인 걸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사람보다 깊은 철인(哲人)이다.

조롱박은 요즘은 그냥 액세서리 노릇밖에 못한다. 예전에는 생긴 대로 쓰임새가 다 있었다. 커다란 박은 바가지로, 조롱박은 조롱박으로 씨오쟁이 대신도 되고 간장 종그래기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사람과 함께 사는 쓰임새가 있었다. 귀염 받는 액세서리는 아니었다.

초가지붕에 서리가 하얗게 내리면 박을 딴다. 익은 박은 톱으로 켜서 박속을 발라내고 가마솥에 삶았다. 삶은 박을 식혀서 달챙이로 껍질을 박박 벗겨내면 노란 바가지가 되었다. 덜 익은 박은 썰어 말려 박고지를 만들거나 박국을 끓여 먹었다. 무국보다 구수하고 호박국보다 옅은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노각을 저며 끓인 노각국보다 더 맑고 깔밋했다. 모내기를 하거나 논매기 두레가 열리는 날 한 마흔 명쯤 되는 일꾼들과 들에서 바가지에 국밥을 나누어 먹던 그림이 눈에 선하다. 박은 그렇게 사람의 살림이 되고 살이에 한몫했다. 사람이 박을 기르고 박이 사람의 일용이 되었다.

지금은 박을 톱으로 켜서 바가지를 만들어 쓰는 사람도 드물고, 박고지를 반찬으로 먹는 사람도 드물다. 박속을 끓여먹거나 한가위 날 탕국으로 박국을 끓여 먹는 집도 드물 것이다. 바로 내 어린 시절로 반세기만 거슬러 올라가면 예사로 알았던 박에 대한 추억이다. 나는 송편 한 잎 베어 물고 박국 한 술 떠먹던 감미로움이 혀의 기억에 배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런데도 오늘의 박은 제 노릇을 못하고 있으니 신세가 참 처량하게 된 것이다.

신라 역사에 ‘사람들은 박[瓠]을 朴이라 부르는데, 처음에 큰 알이 마치 박과 같았던 까닭에 朴을 성으로 삼았다. [辰人謂瓠爲朴 以初大卵如瓠 故以朴爲姓]'라고 한 것으로 보아 박이 신라 때도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신라 때부터 바가지를 쓰고 박국을 먹은 우리 민족의 생활 문화가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바로 그날까지 계속되다가 없어진 것이 아닌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책임이다. 이제 조롱박이 공예의 재료로 더 고급스러운 예술품이 되어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웬일인지 박에게는 참 미안하다.

박꽃은 내가 추억에 잠긴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새하얗게 지쳐가고 있다. 이제 돌아서자. 어제 저녁 피어나 밤을 지새웠으니 이제 잠들 때가 되었다. 한 생명이 태어날 때 비밀이 있듯이 저들이 성장함에도 비밀스런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물망에 매달린 조롱박도 아까보다 조금 더 커다래진 느낌이다.

(2018. 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