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

앗싸, 호랑나비

느림보 이방주 2020. 8. 8. 13:59

이제 지겹다. 정말 멀미난다. 유월 하순에 시작한 장마가 칠월을 빗속에서 지내게 하더니 입추가 지나도 멈출 줄을 모른다. 세상에 물이 흥건하다.

세상 뿐 아니라 세상살이가 장마에 빠져 버렸다. 정월에 듣도 보도 못하던 코로나가 들어와 세상에 겁을 먹이더니, 일마다 급류에 휘몰아쳐 제정신이 아니게 했다. 어떤 이는 코로나 방역에 날밤을 새우며 싸우다 목숨까지 버리는가 하면, 어떤 이는 코로나를 파도 타듯 올라타고 유유히 대양으로 나가 깃발을 날리기도 했다. 부동산 정책은 오르락내리락 우왕좌왕, 정부는 으르렁으르렁, 검찰은 비실비실, 의원은 두리번두리번, 무지하고 무능하고, 오만하고, 염치없고, 비굴하게 몽니부리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휘말리고 돌아쳐 갈피를 잡지 못한다. 가치는 바퀴 빠진 자전거다. 핸들도 하나 페달도 하나 방향도 모르고 멈출 줄도 나아갈 줄도 모른 채 비틀거린다. 역사는 서커스 하듯 기우뚱기우뚱 빙글빙글 왼돌이밖에 모른다.

우산에 부딪치는 빗소리를 들으며 미동산수목원 둘레길을 걸었다. 오늘은 친구 산여山如가 힌두교와 불교 이야기를 했다. 힌두교의 발생과 거기서 진보적인 불교의 생성, 전파, 전래까지 소상하고 일목요연하다. 산여를 받치고 있는 생각의 주추는 ‘무상無常’이다. 무상은 머물러 있지 않고 바뀌고 변하고 순환하는 이치가 아닐까. 나는 희미하긴 하지만 인연생기因緣生起에 머물러 있다고 말했다. 산여는 무상이나 인연생기나 통하지 않겠느냐고 한다. 맞다. 씨앗을 심어 조건에 맞으면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그렇게 바뀌고 변하고 순환하는 것을 인연생기라 하면 본질이고 무상이라 하면 현상일 것이다.

함께 걷던 친구 불온이 ‘느림보 형은 인연생기가 화두네.’라며 수긍해 주었다. 대신 씨앗이 열매로 익어도 내 것이라 욕심내지 않겠다고 했다. 그럼 누구 거냐. 심어 가꾼 사람 것이 아니겠냐고 한다. 열매는 다음 세대의 밑거름이 되어야 하니 자연이 주인이다. 그건 얼마 전에 불온이 미몽인 나를 깨우쳐 준 말씀이다. 열매는 썩어서 다음 세대에도 그침 없는 인연생기의 영양이 되어야 한다. 열매가 자연이 주인이듯 정치의 열매도 민중이 주인임을 알았으면 좋겠다.

둘레길을 두 시간쯤 걸으면 원점으로 돌아온다. 우거진 수목이 아름다운 골짜기를 한 바퀴 돌아오는 원점회귀가 반갑다. 순환이다. 세사도 인연생기로 무상을 체험하면 원점으로 돌아온다. 겨우 두 시간에 순환하는 우주의 원리를 체험한다. 복의 씨앗을 심으면 복의 열매가 달리는 것도 순환의 원리다. 사랑의 씨앗을 심으면 연이 좋지 않아도 결국 사랑의 열매가 달린다. 악의 씨앗, 미움의 씨앗을 심어 열린 열매를 세속에서 부메랑이라 한다. 자업자득 말이다. 그것도 인연생기의 원리이고 무서운 순환이다.

수목원 진입로에 활짝 핀 무궁화가 가득하다. 나무는 작아도 깔끔하고 꽃이 많다. 꽃송이가 유난히 크다. 홍단심, 자단심, 백단심이 모두 아름답다. 나는 백단심을 좋아하는데 모두 홍단심이 예쁘다고 한다. 꽃송이가 모두 새하얀 배달계도 순수미가 보인다. 그런데 그때 홍단심에 커다란 호랑나비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앗싸, 호랑나비다.’ 누군가 외쳤다. 꽃에 앉으면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홍단심에 앉았다. 호랑나비가 워낙 커서 날개를 펼치고 앉으니 화판에 가득하다. 날개로 꽃술을 다 가리고 퍼득이며 꿀을 뽑고 있다. 대신 무궁화는 가루받이를 할 것이다. 상생相生이다. 나는 사진을 찍을 생각도 못하고 그 성스러운 모습에 넋을 놓았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진다. 호랑나비를 바라보다가 문득 고산 윤선도의 하우요夏雨謠가 떠올랐다. ‘비 오는데 들에 가랴, 사립 닫고 소 먹여라/ 마이 매양이랴 쟁기 연장 다스려라/ 쉬다가 개는 날 보아 사래 긴 밭 갈아라’ 나는 이 시조가 당시 사대부들의 기회주의적 행태를 조롱한 시로 생각되었다. 아니면 고산 스스로의 기회주의적 처세가 부지불식중에 배어나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구나. 비를 무릅쓰는 호랑나비는 사람과 다르구나.

비는 그치지 않고 더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오후부터 호우가 예보되어 있다고 불온이 말했다. 나비는 호우주의보를 듣지 못했는지 본분을 다하려는지 꽃을 옮겨 다니며 사업에 열중이다. 곤충들은 천기의 변화나 지각의 변동을 미리 예측한다는데 다 알고 있으면서 호우를 무릅쓰고 나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시인보다 거룩해 보였다. 무궁화는 호랑나비 덕으로 작달비 속에서도 가루받이를 한다. 아름다운 홍단심은 씨를 받아 이름대로 무궁무궁 피고 지고 또 피어 무궁화가 될 것이다. 고마운 일이다.

장마 때면 농투사니들은 일이 없어도 들에 나간다. 나랏일 하는 사람들도 오랜 장마처럼 어려움이 지속되면 호랑나비가 되어 조정에 나서야 한다. 나라에 어려움이 있는데 하향遐鄕에 내려가 낚싯대나 메고 조정을 곁눈질하는 자칭 지사志士인지 은사隱士는 호랑나비가 아니다.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한다. 그런데 요즈음 불법 앞에는 평등하지 못하다는 우스개가 있다. 이렇게 가치가 흔들리는 세상에서 낚대나 메고 강가에 서성이며 열매나 흘낏거리는 인사들은 호랑나비가 될 수 없다. 장마가 너무 길다. 너무 긴 장마에 나무도 풀도 기업도 민초도 고통스럽다. 그래서 호랑나비가 그립다. 좌우도 차별하지 않고, 열매를 탐하지도 않으며, 오만도 비굴도 몽니도 모르는 호랑나비가 그립다.

제가 먹을 열매도 아닌데 호우를 다 맞으며 가루받이에 나선 호랑나비가 고맙다. 잿밥은 생각하지 않고 염불에만 전념하는 호랑나비, 꿀도 꽃가루의 달콤함도 잊어버린 호랑나비, 그런 호랑나비가 그립다. 나라가 이 지경인데 장마를 피해 사립 닫고 열매나 속셈하는 자칭 은사들도 ‘마이 매양’인 들로 나왔으면 좋겠다. 자전거를 고쳐 타고 기우뚱거리지도 않고 왼쪽 오른쪽을 분별하여 바른 가치를 찾아 달렸으면 좋겠다.

앗싸, 호랑나비, 호랑나비야 날아라. 인연생기의 꽃밭은 바로 여기니라.

 

 

(2020. 8.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