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

불두화의 고백

느림보 이방주 2020. 6. 17. 09:04

불두화

 

 

2007513

연풍중학교 교정에서

 

교정에 불두화가 피었다. 뒤뜰 야생화단지에 화사하게 피었다. 회양목이 울타리처럼 둘러싼 야생화단지에는 모두 일년생 화초이고, 나무라곤 모과나무와 불두화 단 두 그루뿐이다. 봄에 피어난 야생화들은 다 지고, 금낭화조차 화사한 붉을 빛을 잃어가고 있는데, 불두화만 하얗게 피어났다. 불두화는 이렇게 봄꽃이 지고 여름 꽃이 피기 전, 5월의 한 복판에서 허허로운 뜰을 소담하게 채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연두색으로 쑥향이 솔솔 피어나는 찐빵 같더니, 어느새 여인의 하얀 가슴처럼 소담하게 피었다.

불두화는 향기가 없다. 어떤 사람은 꿀샘이 아예 없다고도 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꿀샘은 잎자루 바로 밑에 숨어 있다. 그래서 벌 나비가 별로 날아들지 않는다. 소담하게 피어난 불두화를 멀리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은은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 오는 듯하다. 그 향기가 좋아 얼른 가까이 다가서면 거짓말처럼 깨끗하게 사라져 버린다.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아야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을 보면, 이미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닐까? 그렇게 보면 불두화의 향기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두화는 성이 없다. 수술도 암술도 없다. 그래서 씨도 없다고 한다. 씨가 없다는 것은 따로 간직한 희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희망을 가지지 못한 사람만큼 큰 희망을 가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꽃을 나발 모양의 거죽만 보고 불두화라 부른 것이 아니라, 부처님오신 날을 전후해서 부처님의 뜰에 피는 자비로운 꿈이 그런 이름을 갖게 했는지도 모른다.

마흔을 갓 넘은 어떤 제자가 불두화를 보면 나일론 블라우스를 비집고 터져 나올 것 같은 여인의 가슴 같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 공연히 가슴이 후끈했다. 마치 제 자신을 말하고 있는 것같이 들렸기 때문이다. 아니, 그 순간에 그녀는 자신을 말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어떤 가슴을 가지고 있기에 불혹의 나이에도 가슴이 나일론 블라우스를 비집고 터져 나올 것 같으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묻지 않았다. 마흔을 넘어 중년의 여인이 된 제자의 가슴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초등학교 때 나에게 시를 배웠다. 어린 아이치고 참 고운 시를 썼다. 그의 시는 곱기만 한 것이 아니라 깊었다. 시골학교 뒷마당에 있는 우물처럼 아주 깊었다. 두레박 끈이 어른 팔로 몇 발이고 들어가는 그렇게 깊은 우물 같았다. 들여다보면 저 멀리 구름 없는 하늘이 하얗게 보이고, ‘-’하고 소리를 지르면 한참 만에 서늘한 바람을 휙 몰고 되돌아오는 그런 맑은 우물 같은 시였다.

그래도 나는 그냥 아이로만 보았다. 여느 아이들과 달리 그에게만은 나일론 블라우스를 비집고 터져 나오는 가슴이 있는 줄은 몰랐다. 그냥 여린 갈빗대가 하얗게 드러난 채 민숭민숭한 그런 가슴인 줄만 알았다. 어린 그 아이의 시를 읽으면서 나는 왜 고운 꽃과 맑고 깊은 샘밖에 볼 줄 몰랐을까? 그의 시에서 왜 풍만하게 터져 나오는 가슴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나에게는 가슴이 없었기 때문이다. 스물여섯 그 나이에 나는 시를 보는 따뜻한 가슴이 없었다. 아마도 시를 쓰는 아이도 그냥 아이일 거라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를 쓰는 아이에게는 여느 아이와 다른 가슴이 있다는 것은 짐작하지도 못했다. 삼십년이 지난 인제서야 겨우 가슴이 후끈해진다. 그것은 시를 보는 가슴도 없이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친 부끄러움 때문일 것이다.

불혹의 나이에도 솟아나오는 그의 가슴은 최근에 동화작가로 문단에 올랐다. 아이들에게 동화를 들려주겠다고 한다. 다시 대학에 편입해서 문학 공부를 시작했다. 훗날 아이들을 위해 동화방을 만들겠다고 한다. 이미 그 만큼의 동화책을 사서 모으고 있는 모양이다. 나일론 블라우스 사이로 터져 나오는 그의 가슴이 그렇게 따뜻하고 풍만한 가슴일 줄 몰랐다. 향기도 없고 벌 나비도 오지 않는 불두화를 보면서 피워낸 그의 소담한 꿈이 대견하다. 불두화처럼 순결하다. 향기 없는 불두화에서 느끼는 향기처럼 고고하다. 바라볼수록 소녀처럼 예쁘다. 가슴도 없이 시를 가르친 나는 그의 앞에서 불두화처럼 쑥스럽다.

교정에 불두화가 피었다. 하얗고 토실토실하다. 아니 풍성하다. 아니 금방 푸른 하늘에 하얀 꽃잎을 날릴 것만 같다. 세상을 하얀 꽃의 천지로 만들 것만 같다. 불두화를 바라본 날 밤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옛날에 대한 회한 때문만이 아니다. 그의 꿈이 불두화의 꽃가루처럼 온 세상을 덮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나일론 블라우스 속에서 부풀어 오르는 그의 가슴이 아른아른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가슴에 없는 듯 존재하는 향기가 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제 내 가슴의 꿈도 푸른 하늘에 몽실몽실 피어날 것만 같다. 내 가슴도 여민 옷섶을 비집고 몽실몽실 기어 나올 것만 같다. 나는 어느새 가물가물 스물여섯 그 옛날로 돌아가고 있는 것만 같다.